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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Y는 괴리씨가 편집에 관여하던 잡지로 등단한 시인이다. 괴리씨가 무려 70매에 달하는 해설을 곁들여 세상에 내 놓았으나 오랫동안 원고 청탁도 받지 못한 채로 무명 시인으로 살았다. 그렇게 된 까닭으로는 세 가지 정도가 있었다. 우선 그의 시가 알쏭달쏭하기 짝이 없다는 것.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는 거창한 선언으로 시작한 그의 시에는 미래의 모든 시의 씨앗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어쨌든 기존의 어떤 시와도 닮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것이 세상의 모든 시인들과 세상의 모든 시 잡지 편집자들의 몰이해를 야기한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다음 그의 시에 대해 해설이랍시고 붙은 괴리씨의 글이 또한 난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뭔가를 꼼꼼히 분석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도대체 시종이 분명치 않았다. ..
문학평론하는 괴리씨는 살아 오면서 틈틈이 모은 책이 3만권 쯤 된다. 돈이 생길 때마다 쪼개서 산 것들이 대부분이다. 애착이 안 갈 수가 없다. 유복하게 태어나질 못해서 비좁은 집을 겨우 장만했으니, 책을 그 안에 우겨 넣기가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다. 이사하면 대뜸 안방부터 서재로 접수하고 거실, 복도, 아이들 방에까지 책을 쌓아 놓고 살아야만 했다. 나이가 들면서 호봉도 올라가서 조금씩 집을 넓혀갈 수 있었지만, 책의 속도가 언제나 일방적으로 빨랐다. 그러다 보니, 늘 책을 이고 사는 꼴이었다. “어디 ‘책 한 권 주면 안 잡아 먹지!’하는 호랑이가 안나타나나?” 아침마다 비난수하는 게 이 말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분홍빛 거짓말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괴리씨는 책에 관한 한 수집할 줄만 알았지..
※ 이 글은 박이도 시인이 편집하시는 『창조문예』2015년 11월에 발표된 글이다. 출간된 지 1달이 지났으므로 잡지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M씨의 모바일 체험기 M은 한 때 아동문학 편집자였다. 출판사 집안에서 자라서 책에 대한 안목이 나쁘지 않았다. 때문에 양질의 도서를 많이 냈고 상도 여러 개 탔다. 그는 하지만 대학교수인 아내가 연구년 차 영국으로 공부하러 갈 때 동행하면서 출판사를 그만 두었다. 그는 그 즈음 작가들과 교제하는 일에 지쳐 있었다. 작가들이란 아무리 정성을 쏟아 부어도 한없이 흘리기만 하는 밑빠진 독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요구는 종류도 수없고 되풀이도 한이 없었다. “인세를 올려달라.” “자료를 찾아달라.” “디자인을 바꿔 달라.” “모모 작가와 한 출판사에서 책..
* 이 글은 『대산문화』2014년 여름에 발표된 것이다. 귀국 후 잡지를 받아 읽어 보았다. 잡지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참 요란한 세상이다. 말할 수 있는 통로들이 사방에 활짝 열려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지식인들이 입만 열면 ‘열린사회’를 주장했었다. 그래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란 책이 나왔을 정도이고, 같은 이름으로 그 책을 패러디한 소설도 쓰여졌다. 그 단어가 얼마나 회자되었는지는 지금 원고를 작성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확인된다. ‘열린 사회’라고 띄어 쓰면 워드프로세서의 ‘맞춤법 감시 모듈’이 당장 빨간 밑줄을 긋는다. 붙여 쓰면 사라진다. ‘열린사회’가 하나의 보통명사로 자리 잡았다는 얘기다. 마침내 열린사회가 도래한 거나 진배가 없다. 그랬더니 좋은가? 모든 사람들이 제 목소리..
내가 2006-2007년 기간에 파리에서 체류하면서 가장 놀랐던 일 중의 하나는 쥴리에트 그레코Juliette Gréco의 공연 소식을 접한 것이었다. 1972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신길상 선생님에게서 처음으로 불어라는 새로운 외국어를 배울 때 쥴리에트 그레코는 에디트 피아프, 이브 몽탕과 더불어 이미 하나의 전설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아직도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노래를 하고 있다니! 그건 경이였다. 그때 처음으로 그이의 삶을 찾아보았는데 1927년 생이셨다. 2006년 당시 79세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와서 이이가 지난 해 말에 일찍 유명을 달리 한 자크 브렐Jacques Brél을 추모하는 앨범을 내고 공연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2’ TV의 미셀 드뤼케Mich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