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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의 수준 - TV는 언제 책을 읽을 건가?

비평쟁이 괴리 2014. 8. 29. 16:58

 

* 이 글은 대산문화2014년 여름에 발표된 것이다. 귀국 후 잡지를 받아 읽어 보았다. 잡지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참 요란한 세상이다. 말할 수 있는 통로들이 사방에 활짝 열려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지식인들이 입만 열면 열린사회를 주장했었다. 그래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란 책이 나왔을 정도이고, 같은 이름으로 그 책을 패러디한 소설도 쓰여졌다. 그 단어가 얼마나 회자되었는지는 지금 원고를 작성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확인된다. ‘열린 사회라고 띄어 쓰면 워드프로세서의 맞춤법 감시 모듈이 당장 빨간 밑줄을 긋는다. 붙여 쓰면 사라진다. ‘열린사회가 하나의 보통명사로 자리 잡았다는 얘기다. 마침내 열린사회가 도래한 거나 진배가 없다. 그랬더니 좋은가? 모든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는 건 좋아졌다는 증거다. 그러나 저마다 제소리를 내는지 모두가 한소리를 내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사방에서 목청을 뽑으니 항상 귀가 멍멍하다. 게다가 이야기가 많아지면 덕담보다는 험담이 더 많아진다는 걸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얼마 전 타계한 스웨덴 노인은 분노하라는 지상명령을 세상에 퍼뜨려 지구 전체를 분노의 도가니로 만든 바 있다. 그 양반이 그런 외침을 내지른 게 이해되지 않는 게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당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당연히 분노하고 싸워야 한다. 문제는 언로가 열릴수록 정당한 것에 대한 합의가 더욱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리는 모든 개인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 자유에는 생각과 표현의 자유가 기본적으로 들어 있는데, 그건 사람 수만큼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걸 가정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말이 많아질수록 시비(是非)를 가리는 기준은 점점 불확정성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기준이 적정한 수로 축소되는 것이야말로 열린사회의 질을 보장하는 일이 될 것이다. 게다가 그 축소의 작업이야말로 열린사회다운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견해와 다른 견해들을 경청하고 그것들과 협의하는 태도가 습관화된 사회가 열린사회일 터니 말이다. 열린사회는 성숙한 사회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생각이 가장 빈번히 노출되는 자리, 즉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미디어를 통해서 단련되어야 한다. 오늘날 그 미디어는 인터넷과 TV이다. 인터넷과 TV가 같이 묶이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그 묶음은 유효하다. 인터넷을 잡담들이 공론 행세를 하는 장소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TV도 그렇다는 점에서 그 둘은 통한다. 이렇게 말해야 하리라. TV는 인터넷의 정보 더미를 엄선한 장소이다. 다만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그 선별은 양질의 관점에서 행해지는 게 아니라 상업적 성공, 즉 시청률에 근거해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니 여기에 방금 말한 성숙한태도가 있는가? 타인의 말에 조용히 기울이는 귀들이 있는가?

나는 정보화 사회는(따라서 TV역시) 구조적으로 자기성찰 장치를 내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외착시켜야 한다는 말을 거의 20여 년간 해 왔다.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 같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는 계속 말하련다. TV를 성찰케 하는 장치 중의 하나가 책 관련 프로이다. 이 역시 나의 관점에 의하면, , 즉 문자문화는 구조적으로 자기성찰을 내장한 문화이다. TV가 책을 어떻게 대하는가는 그것이 정보와 주장들을 제공하는 자리이길 넘어서서 다른 생각들이 서로 교류하는 장소이길 어떻게 꿈꾸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지표이다.

한국의 TV에서 책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나는 다른 나라의 TV의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우회적으로,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렇기 때문에 더 효과적으로, 그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마침 나는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으며 하는 일 없이 하루 종일 TV나 틀어놓고 있는 참이다. 여기 TV에서 우리나라의 지상파에 해당하는 TNT 방송 채널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우선 정규 독서 토론 프로그램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프랑스 5’ 채널에서 프랑수아 뷔넬François Busnel큰 서점La grande librairie’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국회 방송인 ‘LCP-Publc Senat’에서 방영하고 위성 방송 TV5를 통해 전 세계에 송신하고 있는, ‘메디치 도서관Bibliothèque Médicis’(사회: -피에르 엘카바크Jean-Pierre Elkabbach)이 있다. 이 두 프로는 주간 방송인데, 1,2번 재방송한다. 1시간 동안, 통상 3~4인의 신간 저자들을 초청해 이야기를 나눈다. 따라서 어림잡아, 한 주에 이 두 프로를 통해 5~8권의 책이 소개되고 있다. 매일 프로도 있다. ‘프랑스 2’채널의 서가에서Sur l’éta-gère’(모니크 아틀랑Monique Atlan 진행)프랑스 3’ 채널의 하루에 책 한 권un jour, un livre’(진행: 올리비에 바로Olivier Barrot)이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일주일에 5일 동안 매일 한 권의 책을 리뷰한다. 다음 프랑스 5’자유롭게 들어오세요Entrée libre’ 프로는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매일 문화를 섹션 별로 나누어 소개하는 프로그램인데, ‘문학항목이 일주일에 4-5번 정도 들어간다. 일주일에 최소한 4권의 책이 공개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역시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진행되는 2시간 30분짜리 아침 대화형 뉴스 프로그램인 프랑스 2’텔레마텡Télématin’은 아주 다양한 문화·예술 코너를 갖고 있는데, 항상 책이 화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하루에 한 권 이상의 책을 만날 수 있다. 역시 프랑스 2’에서 일요일에 미셀 드뤼케Michel Drucker가 진행하는 토크쇼 신나는 일요일Vivement dimanche’에서도 화제가 된 책의 저자들이 종종 초대받아 대화를 나눈다. 아주 박하게 잡아, 이 프로에서 일주일에 1권의 책을 소개한다고 하자. 마지막으로 프랑스 2’ TV는 일요일 오전을 종교방송으로 채우고 있다. 불교에서 시작해, 이슬람교, 유대교, 동방정교, 프로테스탄트, 가톨릭 순서로 진행된다. 이 중 특히 불교, 이슬람교, 유대교 프로는 15~30분 정도의 프로인데, 각 종교를 이해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기독교 프로가 전례 혹은 복음 활동 등 실천에 더 집중하는 것과 대조된다. 여하튼 이 세 프로는 해당 주제에 관한 책을 3~5권 정도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어림잡아 일요일 오전에 9권 이상의 책이 소개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상파, 그것도 관영방송인 4개 채널에 국한하여 계산할 때 일주일에 30권의 책이 항상 방송을 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루에 4권 이상이다. 그것이 최소치이다. 프랑스 관영방송의 방송프로를 모아 놓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는 사이트가 있으니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소는 http://pluzz.francetv.fr/ 이다. 한국에서도 시청할 수 있는지는 여기서는 확인할 수 없다.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선 한국의 경우에는 특별한 도서 프로가 아니면 책이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전무하다. 그런데 공중파 방송에서 책 프로가 지금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있다면 거기서 다루어지는 책들이 그게 한국 TV에서 일주일에 소개하는 책의 수량이 된다. 양도 문제지만 책 소개의 질도 심각하다. 5~6년 전 ‘KBS 1TV’에서 박명진 교수가 진행한 ‘TV 책을 말하다가 꽤 수준높은 프로그램이었는데, 시청률 저조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고 정운영 교수가 EBS에서 진행한 독서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역시 지금은 사라졌다. EBS가 입시 중심 방송이 되면서, 예전에 있던 그 좋던 문화 프로그램들의 상당수가 폐기되었다. ‘TV 책을 말하다가 방영되던 무렵, MBC에서 개그맨들이 진행하던 책 프로그램이 있었다. 진행자들이 책도 읽지 않고 나와서 쇼핑몰에서 싸구려 상품 선전하듯이 소개하던 프로그램이었는데 시청률이 꽤 높았고, 그 프로에 소개된 책은 단기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런데 왜 지금 그 프로가 사라졌는지 알 수 없으나, 그 폐해가 컸다. 그 이후 다른 채널의 책 프로그램에서도 책을 읽지 않은 출연자들이 중구난방으로 수다를 떠는 걸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그 뿐이랴. 인터넷 서점을 중심으로 성장한 도서 평론가들 중에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서평을 올리는 걸 지금도 자주 볼 수 있다. 어쩌다가 이런 풍토가 무심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프랑스 TV가 책을 말하는 일에서 참조할 점은 그 양에만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도 책과 생활 사이의 거리가 아주 가깝다는 것이다. 한국의 TV 토크쇼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연예인, 개그맨, 그리고 정치평론가들이다. 그러니, 늘 하는 얘기가 출연자들의 신변 털기나 몸으로 때우는 오락 혹은 모든 정치적 사안을 황당한 해프닝들로 번역해내서 시청자의 눈을 짜릿짜릿하게 해주는 토론의 이름을 달고 있는 쇼들이다. 반면 프랑스의 TV에서는 생활, 건강, 취미, 요리, 문화, 역사, 예술, 영화, 퍼포먼스, 독서, 정치, 경제, 범법, 일탈에 이르기까지 삶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그런데 주의 깊게 봐야할 것은 이 다양한 분야들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아주 활발히 공조(共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종교 프로의 경우들처럼 다른 분야에 관한 프로에서 책이 등장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다음, 이 역시 긴히 참조해야 하는 현상은 책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매우 육감적이라는 것이다. 그 감각성은 가령 큰 서점이나 메디치 도서관에서 사회자가 책을 직접 읽어가며 저자와 대화를 나누는 데에서부터 밤새도록 두 남녀가 번갈아 가며 책읽기를 실연하는 다이렉트 8’ 채널의 심야 프로그램 밤의 끝으로의 여행Voyage au bout de la nuit’(워낙 이 이름은 셀린느Ferdinand de Céline의 그 유명한 소설의 제목이다)에서 책 읽는 사람의 썩 요염한 자태에 이르기까지(이는 오래 전의 소설 겸 영화 책읽어주는 여자La lectrice[레이몽 장Raymond Jean의 소설을 미셀 드빌Michel Deville1988년 영화화했다] 를 상기시킨다) 폭넓은 범위에서 확인된다. 마지막으로 TV에서 다루는 책의 수준이 통속 소설에서부터 조르쥬 페렉Georges Pérec의 난해한 소설이나 사회분석서, 그리고 철학 책에 이르기까지 아주 넓게 퍼져 있으며, 그것들이 아주 세밀하게 위계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의 미디어뿐만이 아니라 식자들이 배워야 할 게 이것인지도 모른다. 책들이 일상적 차원에서 잘 유통되려면 고급한 도서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 오히려 낮은 수준에서부터 꼭대기까지 골고루 퍼져 있어야 대중들의 책 체조를 통한 정신 건강의 향상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문화의 수평적·수직적 분포가 대 은하를 이루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와서 가끔 목격하면서 놀라는 것은 앞에 동전 그릇을 놓아둔 채로 가부좌를 한 자세로 문고본을 읽고 있는 거지의 모습이다. 그 앞을 지나며 나는 저이는 디오게네스일까?, 궁금해 한다.

이쯤 되면 프랑스 철학이 20세기 후반기부터 세계 사상을 주도하게 된 근원을 얼마간 짐작할 수 있다. 또 그로부터 8시간 앞서 나가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제 말할 권리를 마음껏 누리는 사회에서 왜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빈번히 되풀이되고 있는 지에 대해서도 느낌이 온다. 책을 읽지도 않고 이야기하는 태도는 알지도 못하면서 조율이시를 우기는 풍토와 직결되어 있다. 저 조율이시는 의례 형식일 수도 있고 대형 여객선의 항해원칙일 수도 있다. 그로 인한 재앙을 우리는 또 다시 참담히 보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리고 아는 척 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지금도 우리는 차분히 생각을 나누기보다는 삿대 끝에 제 주장을 달아매느라고 바쁘다. 인터넷과 TV는 지겹지도 않은지 늘 그 꼬락서니만을 보여준다. 책을 꺼내는 순간에서조차 그렇다. 이제는 알고서 말할 때가 되지 않았나? 다시 말해 책 좀 읽고서 말할 때가 되지 않았나? 책을 읽는 것은 지식을 얻는 일이기도 하고 남의 생각을 받아서 제 생각을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뜻에서도 책 좀 읽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TV가 그래야 하지 않을까? 누구보다도 네티즌들이 제대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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