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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의 『래여애반다라』

비평쟁이 괴리 2013. 4. 12. 06:53

 

이성복의 새 시집, 래여애반다라(문학과지성사, 2013)를 읽으니, 그의 시는 아주 깊은 우물을 파서 지구의 내핵에 이른 후 더 이상 바깥으로 나올 생각을 할 여지가 소멸되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자벌레가 파먹은 어떤 눈은 옹이같다 눈물은 빗물처럼 밖에서 흘러든다 기어코 울려면 못 울 것도 없지만 고성능 양수기가 필요하리라(눈에 대한 각서, 부분)

 

그의 눈이 옹이이고, 아예 그의 육체가 옹이이다. ,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2008)에서 그는 을 건너 침묵의 세계로 건너갔고 거기에서 육체가 진저리치는 광경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이제 그는 저 육체의 버둥거림이 남긴 적막 속에 스스로 유폐된 듯하다. “흐릿한 눈을 뜨고.

 

내가 밥 먹으로 다니는

강가 부산집 뒤안에

한참을 늘어지게 자던 개,

 

다가오는 내 발자국 소리에

깨어나, 먼 데를

보다가 다시 잠든다

 

그 흐릿한 눈으로

나도 바라본다,

 

어떤 정신 나간 깨달음처럼

허옇게 펼쳐진

강 건너 비닐하우스 (강가전문)

 

바깥에서 생의 미각을 즐기는 사람들은 결코 이런 표현을 알지 못하리라. “어떤 정신 나간 깨달음처럼 / 허옇게 펼쳐진 / 강 건너 비닐하우스.” 하물며 느낄 수가 있으랴. 허옇게 펼쳐진 게 비닐하우스인지, 비닐인지... 그게 펄럭이는 건지, 철썩이는 건지... , 썩이는 건지...

그래서 그런지, ‘산다는 것애 대한 그의 묘사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다. “부푼 똥배 아래, 수영복 실팬티만 한 음부 / 한가운데 못에 긁힌 핏자국 같은 구멍”, “오직 쾌락을 마시고 무명을 배설하는 / 이 흉물스런 기계”(조각에서), “그리운 탯줄 대신 빨간 고무호스를 달아줄까”(눈에 대한 각서) 같은 표현을 보라. 그는 인간의 절실한 감정이나 핍진한 사건 뒤에 남는 건, 더러운 오물, 너저분한 잔해, 그리고 , 어쩌면 저렇게 내버려둘 수 있을까, / 돼지 껍데기처럼 말라가는 검은 비밀”(앉아 있는 누드)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런 끔찍한 구절은 또 어떠한가?

 

수건, 그거 맨정신으로는 무시 못할 것이더라

어느 날 아침 변기에 앉아 바라보면, 억지로

찢어발기거나 태워 버리지 않으면 사라지지도 않을

낡은 수건 하나가 제 태어난 날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나 저제나 우리 숨 끊어질

날을 지켜보기 위해 저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소멸에 대하여 1, 부분)

 

게다가 그가 수다히 반복해서 그 더러움을 지목하는 대목은, 쿠르베Courbet세계의 기원이라고 명명했던 그 부분, 여자의 음부이다. 요컨대 그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가 아니라 태초에 불결함이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슬며시 눈길을 주어야 하는 것은, 그가 그 추잡한 생의 폐허를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삶의 신비는 그의 초기시부터 내장되어 있었던 그의 중요한 주제적 특성인데(신기하다 , 신기해 , 햇빛 찬연한 밤마다[남해 금산]라는 제목에도 나와 있듯), 그는 그 신기함에 대한 인식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그 신기함의 인식은 모든 선이해를 접어 놓은 일종의 이해의 현상학적 환원에서 시작하는 것인데, 그러나 동시에 감정의 차원에서는 혐오와 호기심이라는, 사전적인 감정 훈련(혹은 감정 교육)이 없었더라면 갖지 못했을, ()/()를 기본으로 하면서 감정의 모든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그런 느낌을 동반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없다면, 그의 신기함에 대한 인식은 단지 거기에 그쳤으리라.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인식을 기점으로 시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가령,

 

이번 생의 기억은 시퍼런 강물이 물어뜯는 북녘 다리처럼 발이 시리다(노래에 대한 각서, 부분)

 

에서와 같은 발시림같은 몸의 움직임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그 감정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유보하는 걸 전제로, 그가 그렇게 자신이 스스로 파놓은 동굴의 깊이 속으로 침잠하고 있는 동안에도 세상과 교통하는, 혹은 세상에 작용하는, 즉 세상과 나를 동시에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실로 그는, “나도 떨고 있는 별 하나를 뱃속에 삼켰다라고 분명한 과거형으로 또박또박 말하고 있지 않은가? “여러날 굶은 생쥐가 미끄러운 짬밥통 속에서 엉덩방아 찧다가 끝내 날개를 얻었다 하리라”(생에 대한 각서)라고 자신의 삶을 규정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래서 역시 다음과 같은 끔찍한 시에서도

 

둥근 탁자, 비치파라솔 쇠막대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사이다 병이 거꾸로 꽂혀 있다 전에 엠시 하던 김 모가

가수 이 모 양의 그곳에 깨진 소주병을 박아 넣은 것도

저랬을 것이다 그러니까 마구 쑤셔 헐어 터져 진물 나는

구멍에 날카로운 구멍 하나 덧쑤셔 넣은 것이다 문제는

처박힌 구멍이 게울 것 다 게우고도 좀처럼 주둥이를

쳐들 수 없다는 것, 나는 아무래도 저 구멍이 풀밭 같은

너의 가슴에 내 마음은 뛰어놀았지하던 이 모 양의

목소리로 흥얼거리는 것 같다 순한 양 같은 그녀는 또

어느 풀밭을 헤매며 험한 꼴 당하고 있을까 삼십 년도 더

지난 지금 그녀의 그곳은 마침내 아물어 붙었을까 아무래도

지난 삼십 년은 이 모 양!” 하고 불렀을 때의 그 떨림

같아서, 눈 비비면 순한 양떼 같은 졸음이 마구 쏟아진다 (유원지에서, 전문)

 

어떤 소리, 생의 소리라고 할 밖에 없는 그런 소리, 또는 떨림이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바로 게울 것 다 게우고도 좀처럼 주둥이를 쳐들 수 없는 그 구멍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 비밀이 무엇인가? 그것을 물어보기 전에 우리가 느끼는 것, 그래서 더욱 그 비밀을 캐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것은, 시 전반에 걸쳐 흐르고 있는 리듬이다. 그 리듬은 어떤 시적 규칙에 따른 리듬이 아니라 삶이 동반하는 언어가, 좀 더 과감하게 말해, 삶 그 자체인 말이 일으키는 운율이다. 즉 일상의 느낌이 자연발생적으로 창자로부터 구강을 거쳐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의 다발들이 연주하는 기이한 화음이다.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그대로, “언어학적으로 구조화된 무의식그 자체의 리듬이다. 이게 밤하늘의 우주의 음악소리인가? 지구 전체의 삶이라는 이름의 지진인가? 그것이 무엇이든, 그 리듬은 시집의 제목,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로 수렴된다. 이 까다로운 이두문자를 간단히 줄이면, “오다, 서럽더라가 되고, 자세히 풀이하면 이곳에 와서, 같아지려 하다가, 슬픔을 맛보고, 맞서 대들다가, 많은 일을 겪고, 비단처럼 펼쳐지다쯤 된다고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적고 있다. 이럼으로써 시인은 한국인의 전통적인 감정, 적어도 1988년 이전의 한국인들의 가장 큰 광상의 집단무의식을 이루고 있던 설움을 완벽히 재주조하고 있다. 설움은 비단처럼 펼쳐진다! 내가 정말 궁금해 하는 게 그것인데, 그것을 여하튼 시 하나하나는 부인할 수 없는 물증으로서 내 코 앞에 엄지 손가락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독자의 그런 당황스러움을 예견한 듯, 시인은 짐짓,

 

하기야 날마다 떠오르는 해가

그곳의 나무와 물안개를 알 것이며,

날마다 지는 해를 나무와

물안개가 무슨 수로 알았겠는가 (오다, 서럽더라 4, 부분)

 

라고 시치미를 떼고 있으나, 그 질문을 던지는 자가 그 리듬을 드러내는자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 점에 착목한다면, 저 기괴한 일상이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그로부터 튀어나온 무엇(질문), 그것을 드러낸다고 말해야 하리라.

시편들을 다시 음미하면, 일상이라는 괴저(壞疽)로부터 튀어나오는 것은 이다. 시인은 생에 대한 각서에서 사람 한평생에 칠십 종이 넘는 벌레와 열 마리 이상의 거미를 삼킨다 한다 나도 떨고 있는 별 하나를 뱃속에 삼켰다고 말했다. 그것은 드러내는 자, 시인이 삼킨 것은 이고, ‘은 벌레들과 거미들과 더불어 있지만 시인이 특별히 삼킨 것이라는 뜻을 품고 있는 진술이다. 이 별과 벌레들의 관계를 시와 시 아닌 것의 관계로 바꾸어 보고, 시에 대하여를 읽으면, 그 점이 더욱 명확해진다.

 

어느 접도 구역에서나 그렇지만,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가깝다 사람들 말씨도 벌써 충청도고, 지세도 해발 천오백이 넘는 속리산 문장대에 가깝다 그저 행정구역으로 상주시 화북면이고,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충청북도 보은군이 아니다 한번도 상주시 화북면이 되려 한 적 없고, 되지 않으려 한 적도 없다 시 아닌 모든 것들이 그렇다, 시는 해발 천오백이 넘는 속리산 문장대 어느 절벽에…… (시에 대하여, 전문)

 

삶은 모든 명명을 가로지르며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며 묵묵히 저의 운동을 진행한다. 시인은 시 아닌 모든 것들이 그렇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 시인은 곧바로 에 대해 말하는데, 이 어순은 시 역시 삶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시 역시 이다, 라고 그 어순은 말하고 있다. 다만, 삶 중에서 시 아닌 것들과 시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시 아닌 것들지세도 해발 천오백이 넘는 속리산 문장대에 가깝다, 시는 해발 천오백이 넘는 속리산 문장대 어느 절벽에……이다. 이 비교 항에서, “속리산 문장대가 갖는 기능과 말없음표의 존재 양태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속리산 문장대는 이중으로 기능한다. 우선 그것은 똑같이 시 아닌 것들에 인접됨으로써, “시 아닌 것들의 조건적 공통성을 지시한다. 시 아닌 것들도 시도 모두 속리산 문장대에 인접해 있거나 붙어 있다. 다음 그것은 거꾸로 시 아닌 것들과 시를 구별하는 근거가 된다. 속리산 문장대시 아닌 것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지점이며, 동시에, “시 아닌 것들가 아님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그 구별의 실제는 시 아닌 것들은 그것에 가깝고’, ‘는 그것의 어느 절벽에...”라는 것이다.

통사적으로 보자면, “시 아닌 것들은” “속리산 문장대에 인접할 수 있으나 속리산 문장대는 아니며, 또한 거기에 완전히 다다를 수도 없다. 반면 속리산 문장대어느 절벽에” ‘다달아 있거나’, 거기에서 ‘~이다.’(‘으로서 존재한다.’) 속리산 문장대시 아닌 것들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최종적 가두리이며, 동시에 그 둘을 구별하는 결정적 경계이다. 다른 한편, ‘말없음표가 언어로 정확히 서술될 수 없음을 가리킨다. 서술되지 못하는 대신에, “시 아닌 것들을 이해하게 해주는 다양한 참조 사항들을 제공한다. 이 점을 생에[ 대한 각서나도 떨고 있는 별 하나를 뱃속에 삼켰다에 빗대어 보면, ‘는 빛이고 시 아닌 것들은 어둠(존재 그 자체)이며, 시는 시 아닌 것들을 비추어 무엇인가 알게 해주며, 대신 그 자신은 결코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제 독자는 그의 시 빛에게를 진정한 시의 존재론으로 읽을 수 있다.

 

빛이 안 왔으면 좋았을 텐데

빛은 왔어

균열이 드러났고

균열 속에서 빛은 괴로워했어

저로 인해 드러난 상처가

싫었던 거지

빛은 썩고 농한 것들만

찾아 다녔어

아무도 빛을 묶어둘 수 없고

아무도 그 몸부림 잠재울 수 없었어

지쳐 허기진 빛은

울다 잠든 것들의 눈에 침을 박고,

고여 있던 눈물을 빨아 먹었어

누구라도 대신해

울고 싶었던 거지,

아무도 그 잠 깨워줄 수 없고

아무도 그 목숨

거두어줄 수 없었으니까 (빛에게, 전문)

 

이것을 두고 혹 어느 편협한 사람은 이 역시 시와 시 아닌 것들의 이분법이 아니냐고 힐문할 지도 모르겠다. 편가르기 아니냐고. 시인의 선민의식 아니냐고. 그러나 그런 반박은 쓰잘 데 없는 것이다. 빛과 어둠 사이에 미리 위계질서를 만들어 놓는 사람의 어리석은 고정관념이다. 정 고집을 피운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으리라. 저 빛은 어둠을 비춘다기보다 어둠 속에 스며들어 그 내부로부터 밝아지는 전구라고. 빛은 삶의 뱃속에” 파고 들어가 삶의 가장 밑바닥을 찾아갔고, 삶과 더불어 몸부림치고 진저리쳐서, 사실 삶 그 자체가 되었다고.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시가 들어섬으로써 삶은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자신을 굴리던 운동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운동으로 종목을 바꾸었으며, 사는 게 괴로워졌다고, 괴로워지는 대가로 새 삶을 얻었다고.

그러나 내가 이런 어물쩡한 대답으로 그쳐서는 안되리라. 무엇보다도 이 모든 얘기들의 물증처럼 내게 밀려왔던 이 개개 시편들의 시적 존재양태를, 그 모습과 그 목소리와 그 율동과 그 리듬을 분석해야 하리라. 그것을 그냥 삶 그 자체의 시됨의 증거라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저 물건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지금까지 수도 없이 반복했던 괴로움이 실은 생의 희열임을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니 나 스스로 즐거움을 시늉해 볼 시도를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2013.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