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2010년 '여성 동아 장편 공모' 심사평 본문

심사평, 추천사 등

2010년 '여성 동아 장편 공모' 심사평

비평쟁이 괴리 2022. 12. 8. 08:08

예심을 통해 올라 온 이채원의 나의 마라톤 참가기와 류마리의 사라진 편지는 저마다 고유한 개성을 갖춘 작품들이었다. 난소암과 그에 따른 불임으로 인해 지속적인 정서 불안의 상태에 놓여 있던 주부가 남편의 불륜에 의해서 심각한 정신적 위기로 내몰렸다가 마라톤을 통해서 상처를 다스리고 마음을 추스르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나의 마라톤 참관기는 문체가 깔끔하고 마음의 미묘한 결과 굴곡과 변화의 시시각각의 문양을 적절히 표현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언어를 맛갈지게 쓸 줄 아는 사람의 솜씨라 할 만 하였다. 게다가 남편의 불륜의 계기가 된 마라톤이 동시에 아내로 하여금 정신의 위기를 탈출하도록 도와주는 핵심적인 방편이 되어준다는 아이러니칼한 설정이 단순히 흥미를 자극하기 위한 얄팍한 수단으로 쓰였다기보다는 삶에 대한 모종의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로서 기능한다고 보는 게 타당하였다. 즉 이 난해하기 짝이 없는 삶을 인내의 실습장이자 살아있음의 감지기로서 기능하는 장거리 달리기에 대입함으로써, 산다는 것의 수동성과 허무함을 견딘다는 것의 능동성으로 바꾸고 다시 그 견딤의 생리학으로부터 산다는 것의 존엄함과 삶의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장거리 뛰는 요령, 식단 관리, 혼인과 이혼률, 사생아의 인구 등등 핵심이야기와 관련된 세목들에 대한 번다한 정보들이 소설 안으로 통합되지 못한 채 널리고 층을 이루어 마치 소설책 한 권이 폐지 창고 속에 담긴 것처럼 보였다. 이 창고로부터 소설을 구출해내어 쓸 데 없는 생활정보들을 덜어내고 나면 깔끔한 중편 하나가 겨우 남는 꼴이 되었다(지나가는 길에 덧붙이자면, 디테일 묘사가 소설 속에 통합되었는지 측정하려면, 그 부분을 떼내어 비슷한 주제의 다른 소설에 넣어 보면 된다. 다른 소설들에도 쓰일 수 있다면 그것은 소설의 재료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소설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어떤 디테일도 소설 내부로 통합되려면, 오직 그 소설에만 사용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나의 마라톤 참관기가 지나친 사실성으로 소설적 허구를 훼손시키고 있다면, 반면, 조선조의 시인 허난설헌의 기구한 일생을 추적한 사라진 편지는 사실성의 측면에서는 허점이 많은 작품이다. 조선조의 시대를 그렸고 그 시대의 인물들을 역사를 되집었으며 그 시대의 문화와 자연과 물목의 명칭을 그대로 옮겨 왔으나, 그 삶에 대한 느낌과 생각과 표현은 오늘날의 그것들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는 경향은 오늘의 한국 소설의 장에서 꽤 진부해진 감이 없지 않다. 공동체의 울타리가 절대적으로 강력했던 시대에 그 울타리 내부에 속하지 못한 인물이 겪는 고통과 투쟁 그리고 비극은 우리에게 너무나 흔한 주제가 아닌가? 그 주제가 한국소설의 전반적인 경향과 맞물려 있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다만 시간대를 과거로 삼을 때, 거기에 공동체의 억압성을 뚜렷이 부각시킬 수 있고 상대적으로 주인공의 비극을 강조할 수 있다는 이점에 의해 유발된 편의적인 선택이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라는 의혹이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이쯤에서 오늘날 한국 소설계의 항다반사가 된, 역사적 인물을 특별히그려내는 경향에 대해 질문할 때가 된 듯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진 편지는 적어도 세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 소설에는 허난설헌의 생애를 중심으로 다양한 삽화들이 다각적 층위에서 끼어들고 있으며 그 다양한 삽화들이 각각 독자적이면서도 중심 이야기와 긴밀히 연관된 촉매 이야기들로 기능하고 있어서, 말 그대로 장편의 이름에 값하는 삶의 복합성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인물의 비극을 시의 비극으로 옮겨 놓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허난설헌으로 대표되는 시의 언어와 다른 언어들이 겨루는 대목들이다. 직접 인용된 시들 하나하나가 언어의 전사가 되어 시언어의 존재이유를 위해 투쟁한다. 셋째, 이러한 언어들의 겨룸을 통해서 시와 정치의 관계에 관한 다양한 시각을 펼쳐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각들을 통해 독자는 시가 현실과 무관한 도원에서 노닐지도 않고 또한 현실 정치에 매몰되지도 않으면서, 정치의 한복판에서 정치와 싸우는 시의 모습을 실제적 패배와 미완된 기획의 동시적 형상으로 매번 그려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탐색은 문학의 가장 소중한 덕목에 속하는 것이다. 이 작품을 당선적으로 결정하며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이경자, 정과리)

※ 류마리씨는 이후 '류서재'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