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최종천의 「집」 본문

울림의 글/시 한 편 읽기

최종천의 「집」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2:53

 

나는 왜 고집스럽게 집으로 가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집을 가지려 등이 휘고

그 능선에서 해가 뜨고 진다

집안의 장롱이나 책상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미를 가두어 놓고 있을 것이다

나는 거리를 헤매면서 알았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마저

빛나는 언어를 얻을 수 없는 까닭은

우리가 의미를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행복이라는 상징은 얼마나 춥고 배가 고픈가

나는 오늘도 많은 의미를 소비했다

가엾은 예수와 노자에게

다시는 언어를 구걸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집이 없었다고 한다

눈사람의 집은 그의 몸이다

그의 몸은 그의 전집이다

나도 눈사람처럼 집 없이 살고 싶다

(최종천 시집, 눈물은 푸르다, 시와시학사, 2002)

 

최종천의 시를 읽다가 나는 깜짝 놀란다. 그가 노동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시에 노동자의 세계관이 농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30여년 동안 노동자에 대해 수많은 말을 해왔다. 그러나, 실은 노동자의 역할, 지위, 상황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이다. 이제 처음으로 최종천이 노동자의 존재에 대해 말한다. 시에 의하면 노동은 가치를 생산하고 재화를 축적하는 데 쓰이기 이전에, 그 자체로서 살아있는 움직임이다. 그가 다른 시에서, “우리를 누가/임금 노예라고 하는가 노동의 고통이/피를 휘젓는 동안은/우리는 생명이다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집이며, 장롱이며, 행복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집에, 장롱에, 행복에 먼저 들려서 살아 왔다. 그 결과는 바로 그것들에 짓눌려 등에 휘어지고 만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존재로의 회귀를 촉구한다. 물론 노동자의 세계관은 존재 자체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 존재와 상황의 불일치로부터 나온다. 다만, 존재의 입장에서 그 불일치를 말할 때만 노동자의 세계관이 보일 수 있다. 그 말을 지금까지 어떤 학자도 시인도 한 적이 없었다.(쓴날:2002.04.16, 발표:주간조선1702, 2002.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