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이 사소한 심각함 - 최은미의 『눈으로 만든 사람』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이 사소한 심각함 - 최은미의 『눈으로 만든 사람』

비평쟁이 괴리 2021. 8. 30. 18:49

※ 아래 글은 제 52회 동인문학상 8월 독회의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가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싣는다.

이 소설집의 작품들은 두 가지 특징으로 모인다. 첫째. 아주 사소한 사생활의 내용들을 매우 심각하게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이 사생활 노출의 전개가 중간이 뚝 잘린 것처럼 제시되어,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첫 번째 양상은 오늘날의 사회적 현상,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을 대신하는 사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듯 하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 소설들에 나타나는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을 대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읽어 보면 실제로 지금 세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는 것은 양적인 분포로 보자면, 사적인 상태에 그냥 머물러 있는 삶의 세목들이 공적인 것을 대신하는 사적 사건들보다 훨신 많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한데 문제는 염소가 힘이 세듯후자(‘공적 사생활이라고 부르자)의 힘이 엄청 세서 한국사회를 매일 요동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공적 사생활들의 잔망(孱妄)스런 소란에 비해, 보통 사람들의 사생활은 얼마나 사소하고 잔망(殘亡)하고 무의미한 것인가? 그리고 그런 무의미한 잡사들에 대해 소설 속 인물들은 왜 저렇게 심각하게 고민하는가?

다름 아니라, 이러한 무의미한 삶들이 실은 저 요란한 공적 사생활들에게 감염되어 있으면서도 후자가 의미를 전유하고 있는 데 비해, 여전히 무의미의 상태로 전락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목청 높은 사적인 것들이 바이러스라면, 이 사소한 사생활들은 확진자이다. 그리고 이 감염병에 사로잡힌 모습에 의해서, 두 번째 특징, 즉 시종이 없는 상태의 무기력한 흐름이라는 형식적 특징이 도출된다.

마치 감염병의 확진자들이 분명히 보이는 듯하면서도 결코 실제의 경로는 알지 못한 채 지옥의 문턱으로 들어가듯이, 소설 속 인물들의 사소한 사생활들은 원인도 결말도 보이지 않고, 시작도 끝도 없는 상태에서 마냥 하염없이, 속절없이 흘러간다. 그리고 그 흘러감은 파국을 향한 지속적인 마멸의 과정이다. 소설의 형식은 이 속절없는 파멸로의 이행과 동형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이 형식의 무기력은 독자를 궁금증 속으로 몰고 가는 장치이다. 여기에 기승전결이 왜 안 보이지? 독자는 그 밑으로 무언가 숨은 세력이 있는가 하는 의혹에 종이를 찢어볼 수도 있다. 작가는 그런 독자의 반응을 인물들에게도 옮겨 놓는다. 인물들도 자신들의 삶이 이렇게 사소하고 무의미한 데 대해 의아해 한다. 처음엔 누군가에게 기대어 원인을 알고 싶어하고, 곧바로 실망을 맛보고, 포기하거나, 대상을 바꾸고, 변하지 않는 상황에 애닳아 하고, 그리고 누군가에게 쫓아가 묻는다.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인가요? 하고.

이 거듭되는 물음은 이 상황을 조성한 진짜 어둠에 대한 주밀한 탐구로 나아가야 하리라. 혹시 엉뚱한 빚쟁이에게 몰려가는 것은 아닌가? 작가도, 인물도, 독자도 다들 조심하면서 캐고 들추고 돋보기를 들이대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평생 비존재의 미로를 헤매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