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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우울의 색 - 조해진의 『완벽한 생애』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판타지, 우울의 색 - 조해진의 『완벽한 생애』

비평쟁이 괴리 2022. 1. 26. 12:47

※ 아래 글은 2022년 53회 동인문학상 1월 독회에 제출된 의견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싣는다.

판타지, 우울의 색

조해진(『완벽한 생애』, 창비, 2021.09)은 꾸준하다. 소수자에 대한 관심, 사건이 아니라 사연인 이야기들, 그리고 사연의 흐름에 내맡겨진 인물들. 여기까지는 아마도 예전에 유사한 사례들이 많이 있을 수도 있다. 조혜진 소설의 특징은 인물들이 이런 흐름에 쓸려 가면서도 실은 맨 앞자리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성소수자는 서둘러 자신을 밝히는 일에 기꺼워하며, 자유로운 만남을 지향하는 사람은 모든 구속의 요소들을 풀어버려, 만남의 실패를 유발한다. 요컨대 조해진의 인물들이 겪는 아픔은 도달하기 어려운 이상을 미리 몸으로 구현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인물들은 대부분 유사한 성격 그리고 행동 유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물들 사이엔 갈등이 없고 어긋남이 있다. 그 어긋남을 발생시키는 건 인물들 자신이 아니라, 인물들을 묶어 놓는 현실적 조건들이다. 그 현실의 제약들은, 떠난 사람이 남겨 놓은 메모를 미쳐 들여다보지 못한 소홀함으로부터, 거주비와 같은 생존비용을 거쳐, 인물들의 국적이 등록된 나라가 세계사에 각인시킨 족적에 이르기까지, 아주 큰 폭의 저인망으로 이루어진 인력으로 작용하면서 인물들을 지상의 한계에 가둔다.

조해진 소설의 판타지는 바로 이런 이상과 현실의 근접성에서 나온다. 생래적인 이상주의로 인해, 인물들은 닫힌 방에서 우주선의 요동을 느낀다. 닫힌 방은 미지를 둘러싼 어둠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반대이다. 그들의 시선과 생각은 투명하게 저 멀리로 날아가는 듯하지만, 실은 과거의 물질들로 이루어진, 주관적 생애라는 이름의 렌즈에 굴절되어 하강한다. 그 판타지의 색조는 블루이다. 청명하고 동시에 우울하다. 아래 세 진술을 겹쳐 놓아보라.

 

버스에 속도가 붙자 비닐봉지의 부스럭거림이 풀잎 소리처럼 변형되는 듯하더니, 이내 버스의 흔들림에 미정의 숨결이 겹쳐졌다.”

 

상상했지만, 그런 기대감은 불완전한 위로로 남을 것이고 시징은 그런 위로라면 이미 전부를 겪은 것만 같았다.”

 

열여덟살 때부터 한번도 쉬지 않고 연애를 해왔다고 밝힌 에디는 시징에게 틈날 때마다 말하곤 했다. 너에게는 더, ,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해.”

 

조해진의 인물들은 현실의 끈끈이에 묶여서 나풀거리는 닫힌 끈들이다. 현실 너머로 일렁이는 이 끈들은 아름답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 지상의 뿌리를 뽑아 하늘로 비상할 때, 열린 끈은 그저 보풀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런 예감은 지상의 덩굴이 그 본래의 모습으로서 하늘로 뻗은 콩나무가 되기가 어려움을 절감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