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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세대의 문화 전쟁 - 최유안의 『보통 맛』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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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세대의 문화 전쟁 - 최유안의 『보통 맛』

비평쟁이 괴리 2021. 7. 29. 06:52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52회, 2021년 제7회 독회에서 후보작으로 선정된 작품에 대한 지면 심사평의 원본이다. '원본'이라 함은 면수의 제약으로 줄여야만 했던 내용까지 포함한 글이라는 뜻이다. 공식 발표문은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싣는다.

개입문화와 노터치문화 사이 - 젊은 세대의 문화 전쟁

 

유럽으로부터 유입된 번역어 문화Culture’의 어원이 경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경작땅을 갈아 농사를 짓는 일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경작은 세상에 풍요를 가져오는 일인 동시에 나를 가꾸는 행위이다. 그런 방향에서 문화는 한 개인이나 공동체가 개발한 지적 능력으로 의미가 확장되었으며, 칸트 이래로는 문명과 동일시되기까지 했다(Robert 사전).

자기 개발이나 세상 개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문화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종류는 너무나 다양해, 모두가 같은 문화를 누리는 것은 아니고, 때로는 사람들 간에 문화의 양과 질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래서 문화는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노자)는 말이 있다. 그런데 고급 문화를 더 가진 사람들이 덜 가진 사람들에게 문화를 흘려 주는 것이 마냥 환대받는 것은 아니다. 자크 데리다는 방금 말한 위에서 아래로를 재치있게 변용해 문화는 본래가 식민주의적이다라는 문장을 만들었는데, 이 진술은 문화를 받는 자, 즉 피식민자의 입장에서 문화가 주체성의 박탈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국인들은 정이 많은 민족이라서, 제가 가진 좋은 것을 남에게 주려는 경향이 강하고 그것은 정신적 관습에도 자주 통용되어, 증여의 경향 자체가 스스로 문화를 이루기도 한다. 그것을 개입문화라고 칭해보기로 한다면, 한국에는 별의별 개입문화들이 미만해 있다. 가령 우리는 이웃집 젊은이에서부터 유명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타인들의 사생활에 유별나게 관심을 보이며 시시콜콜한 소문들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가능하다면 직접 무언가 행동을 보태려고 한다. 효심 깊은 가수에게 좋아요버튼을 마구 누르기도 하고, 주변에 부당한 일이 보이면 그걸 폭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청와대 청원 게시판이 늘 불난 화덕 같다. 이웃의 어느 나라에서는 백주에 대로에서 누가 폭행을 당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서, 결국 살인이 났다는 기사가 자주 뜬다. 그러니 이렇게 남의 일에 관심 깊은 한국은 얼마나 살기 좋은가?(하지만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하위권이다.)

정말 좋기만 할까? 결혼한 젊은 처자가 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애를 낳을 계획이 아직 없다. 옆집 쌍둥이 아줌마는 만났다 하면, 아기 가지라고 성화다. 그녀만 보면 피하고 싶다. 한데, 어쩌다가 덜컥 임신을 했다. 마침 회사에서는 해외 출장을 보내려 한다. 바이러스 감염 가능성이 높은 나라다. 못가겠다고 했더니, 인재 양성을 위한 특별 대우라면서, 상무님이 종용을 한다. 할 수 없이 임신 사실을 고백한다. 출장은 취소되었지만, 회사에 소문이 좍 퍼졌다. 보는 사람마다 한마디 한다. 스트레스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자궁 외 임신으로 유산을 해버렸다.

주변의 잡스런 아우성들 때문에 스스로 뭘 결정할 수가 없다. 그 생각을 하기 전에 우선은 주변을 차단하는 생각들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최유안의 인물들은 이런 개입 문화에 대항해서 불간섭문화를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고맙지만 참견은 사양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건 문화 전쟁이다. 지금까지의 뿌리깊은 관습과의 싸움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자신의 생각에 기꺼이 동조한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살다 보면 그들도 어김없이 간섭하고 방해한다. 말과 행동이, 겉과 속이 다른 것이다. 게다가 가만히 보니, 이게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학간 나라의 하숙집에 다국적 기숙생들이 모였다. 방해 금지 협정을 맺고 박수를 쳤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원칙을 가장 철저하게 요구하며 남을 비난하던 친구가 실은 가장 많이 범하고 있다. 내로남불이 절로 남발이다. 또 이런 건 어떤가? 미국의 소년들은 걸핏하면 리브 미 얼론Leave me alone!’하고 외친다. 독립선언이다. 그러나 정말 저 혼자 잘 살까? 그 나라에서 최근 유행하는 용어가 캔슬 컬쳐Cancel Culture’. 뜻풀이로 보면 배제 문화혹은 왕따 현상이다. 무언가 수틀리면 아예 명단에서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옛날에 자기를 안 세고 인원수를 보고 했던 어떤 바보와 정반대다. 캔슬 컬쳐는 바보가 아니라 악마가 하는 짓이다. 이제 보니, 누구보다도 끼리끼리 노는 게 그들이다.

그러니까 불간섭문화는 젊은 세대가 신조로 삼았지만 체화하지 못한 미래의 문화다. 최유안의 소설은 이 문제를, 집단의 폭력과 개인들의 저마다의 수난이라는 상투적인 틀을 넘어서 문화 갈등의 수준에서 제기한다. 전자에 머무르면 우리는 폭력에 대한 분노를 키운다. 그러나 후자로 건너가면, 바람직한 타인 관계를 모색할 길이 열린다. 왜냐하면 개입문화에도 장단점이 있고, 불간섭 문화에도 그것이 있으며, 그 둘 모두에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야짓 살피면서 더욱 질 높은 문화를 찾아야 하는 게 인간이 할 일이다. 그 어느 언저리에서는 상호 존중 문화도 피어날 것이다.

아래 글은 최유안의 『보통 맛』 (민음사. 2021.05)에 대한 동인문학상 제 52회 7회 독회에서 개인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이 소설집은 주제의 무게와 구성의 통일성에 의해 주목을 받을 만하다. 주제에 무게가 있다는 것은, 일상적 생활의 문제들을 공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지난 30년 동안 한국 소설이 등을 돌렸던 태도이다. 그 동안의 소설이 사회적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는 말로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문제를 공적 차원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은 삶의 다양한 제재들을 공공선의, 혹은 공진화의 가능성이라는 시각에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가능성질문에 주목을 해주길 바란다. 미리 답을 정해 놓은 자들의, 그러니까 답정너들의 공공선과 공진화는 그 반대인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 태도들은 비유컨대 일종의 적그리스도적인 것들이다. 그리스도가 두 적 사이에 갇혀 있구나.)

정치적 사건을 소재로 취하거나 공권력에 의해서 희생된 사적 개인들의 수난을 다루는 것만으로 공적 성격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관점이 거꾸로 사적인 것으로 공적인 것을 대체하는 태도를 확산시킨 게 지난 30년이며, 한국의 소설들은 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 호응하는 자세를 취해 왔었다. 그래서 순전히 사적인 것을 고집함으로써 공적인 것과 대립하거나, 아니면 사적 해결의 길을 온갖 아이디어를 동원해 개발하면서 그것이 공적인 것을 대신하기를 꿈꾸기 일쑤였다.

더욱이 후자의 경향은 점점 더 지배적인 경향이 되어 왔는데, 그것은 한국사회가 유별나게 정치 쪽으로 편향되어 온 추세와 맞물린다. 공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부면에 동시에 연관을 맺는 것이다. 최유안의 소설들은 사소한 일상의 문제들 사이에 그 거미줄을 설치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그 노력이 나름의 성과를 얻은 경우 형태적으로 밀도 있는 단편들이 만들어지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그 반대이다. 주제와 형식이 얼마나 긴밀히 통하는지를 이로써 알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