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승옥의 「무진기행」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김승옥의 「무진기행」

비평쟁이 괴리 2021. 7. 11. 22:30

※ 아래 글은, KBS가 '한국문학평론가협회'와 공동으로 기획하여 매주 일요일 9시 뉴스에 소개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소설' 중 '김승옥편'에 대해서 일종의 '해제' 형식으로 쓴 글의 원본이다. 원본이라 함은 KBS홈페이지 발표본에선 삭제되었던 부분을 되살렸다는 의미다. 삭제한 까닭은 해당 부분이 일반 발표본으로선 독자들의 이해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 블로그에는 주로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시기 때문에 되살려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 대한 KBS 방송은 2021년 7월 11일 오후 9시 뉴스에서 방영되었고,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30483에서 볼 수 있으며, 발표된 축약본은 https://news.kbs.co.kr/mobile/news/list.do?sicd=478#1 에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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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개인으로서 한국인을 그리다

- 김승옥과 무진기행

 

I. 생의 감각

 

김승옥은 1961년 대학생 신분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순간부터 독자들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에는 생생한 감각이 맑은 못의 잉어들처럼 팔딱거리고 있었다. 이런 묘사를 보라.

 

형이 나와 누나에게 그 말을 처음 끄집어냈을 때도 내 발가락 사이로 초가을 햇살이 히히덕거리며 빠져나가고 있었다. 굵은 모래가 펼쳐진 해변에서였다.(「생명연습」)

 

가을은 저물어 가는 계절이다. 그러나 초가을이다. 초가을엔 여름의 왕성한 생명력이 아직 남아서 꿈틀거린다. 그것이 햇살에 투영되었다. 햇살이 아지랑이를 일으키며 고물거리는 모습은 낙조와 안식의 어스름이 깔리는 배경으로부터 탈출하여 삶의 열락을 즐기고자 하는 미세 감각들의 운동을 눈으로 느끼게 해준다. 그 느낌은 굵은 모래의 바탕 위에서 더 진해진다. 색조의 대비로 느낌이 선명해지고, 굵기의 대비로 생 속에 도사린 소멸의 기운마저 느끼게 해준다.

평론가 유종호가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찬사를 보냈던 이 소설가의 감각적 묘사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우리는 두 방향에서 이 질문에 접근할 수가 있다. 첫째, 그가 4.19세대라는 것. 4.19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민주 혁명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18세기 말 이래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슬며시 틈입해 들어온 세상은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현실에 적용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갑신정변, 동학혁명, 갑오경장, 3.1운동, 8.15해방, 6.25전쟁 등 그 이전의 굵직한 사건들은 모두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었다. 4.19를 통해 한국인들은 자신의 주체적 역량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제부터 세상과 물상들은 모두 내 손아귀에서 놀 것들이 되었다. 둘째, 한글 세대라는 것. 해방과 더불어 비로소 국어의 지위를 획득한 한글은 김승옥 세대에게는 유년시절부터 몸에 배인 자연어로서 기능했다. 즉 한글은 생활어이자 사유어이고 동시에 표현어였다. 한글을 통해 김승옥 세대는 삶과 생각과 느낌을, 혹은 육체와 정신과 마음을 하나로 일치시킬 수 있었으니, 한글을 가장 아름답게 쓴다는 것은 그 일치를 최등급까지 끌어올린다는 것이었다.

 

II. 자기세계

김승옥은 바로 그 최대치에 근접한 소설을 펼쳐 보였다. 그가 생래적인 언어를 그냥 즐기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농밀한 언어를 통해서 무언가를 빚어내려 했다. 그 무언가를 그는 자기세계라고 명명하였다. ‘자기세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만이 만들어낼 세상의 다른 말이었다. 왜 그것이 중요했던가? 그 이전까지 한국인들은 지독한 좌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외세의 압박, 일제, 식민, 주어진 해방, 분단, 전쟁 어느 하나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어난 일인데, 그러나 때마다 이보다 지독할 게 없는 고통과 고난을 강요하기만 했던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1950년대의 작가들의 빈번한 화두는 실존’(시시각각의 생존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잉여인간”, “비인(非人)탄생”(장용학), “신의 희작(戲作)”(손창섭), “수난 이대”(하근찬)라는 자조적이고 탄식조의 모멸어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자멸의 늪에서 빠져나와야만 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기세를 몰아 무언가 나만의 세계를 일궈내야 한다. 그 자기세계는 나의 살아있음을 증명할 보증서이자, 내가 창조할 미래 세계의 모형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민주공화국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자유를 구가하며, 성공의 기회를 균둥히 배분받으면서, 자신의 개성을 활짝 피어낼 권리이자 의무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김승옥의 모든 소설은 그러한 개성의 가장 첨예한 표현들로 반짝거린다. 가령, ‘공감각적 비유의 예로 수능시험에 자주 등장했던,

 

언젠가 여름 밤, 멀고 가까운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를, 마치 수많은 비단조개 껍데기를 한꺼번에 맞부빌 때 나는 듯한 소리를 듣고 있을 때 나는 그 개구리 울음소리들이 나의 감각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수없이 많은 별들로 바뀌어져 있는 것을 느끼곤 했었다. (「무진기행」)

 

와 같은 묘사는 공감각적이라는 수사적 기법에 앞서, 김승옥만이 쓸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묘사라는 걸 먼저 눈여겨 볼 때 우리의 감수성 역시 자발적으로 열릴 것이다.

 

III. 「무진기행의 문학적 가치

 

무진기행은 이러한 김승옥의 탐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잉태된 작품이다. 간단히 말해, 이 작품은 자기세계에 대한 욕망을 그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차원으로 선회시킨다. 반성이 왜 필요한가? 자기세계에 대한 욕망은 오로지 자기만을 향하면서 이중의 왜곡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개인들의 허약성으로 인해 강력한 집단적 통제 앞에서 좌절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4.19가 성공한지 1년 후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근대화의 방향을 총체적 민주화에서 경제성장으로 재정향했던 것이 직접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자유의 무한한 개방은 최종적으로 독점과 예속으로 귀결할 수 있다는 시민 사회 자체의 자가당착의 가능성이라는 문제이다. 바로 이 때문에 자기세계는 타자의 세계들과 연대해야 하며, 동시에 상호 이해를 꾀해야 한다. 그런 수준에 도달하기 못한 자기 세계는 음침한 자기만의 동굴에 갇히게 되고, 그 안에서 벌레처럼 제 살을 물어뜯으며 살아가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 무진기행의 인물들은 바로 이 이중적 왜곡을 포괄적으로 은유하면서, 그 너머의 태도들을 독자에게 궁리케 한다.

부인 덕분에 기업의 고급 간부가 된 는 회사 내의 승진을 앞두고 고향에 잠시 쉬러 온다. 안개가 잔뜩 끼곤 해서 무진(霧津)’이란 이름을 가진 그의 고향은 우리가 막연히 동경할 때의 그런 순수한 동심의 세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거기는 서울의 복본이자, 서울이 못 되어서 잔뜩 짓눌린, 일그러진 욕망들의 세계이다. 거기에서도 모두가 자신의 성공을 위한 자신만의 음침한 지하실을 파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소득없는 더듬이를 놀리고 있다. 그 모습은 출세하기 전 낙향했던 의 모습이며, 현재 무진에 갇힌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거기에서 는 나의 전신과도 같은 하인숙을 만났고, 서로 유혹하고, 그리고 는 하인숙을 코 풀듯이 버리고 떠난다. 이제 즐겼으니, 서울에 올라가 승진해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복기하면서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김승옥의 글쓰기는 이 과정의 이행과 복기를 부채처럼 펼쳤다 접었다 하는 동작을 되풀이함으로써 독자에게 참여와 성찰 사이를 부단히 왕복케 한다.

 

IV. 문체의 백미

 

실로 자기세계의 이행과 복기야말로 김승옥 소설의 최대의 형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하나의 묘사를 들어보겠다.

 

무진(霧津)이다. (1) 곧 입술을 태울 듯이 타들어가는 담배 꽁초를 입에 물고 눈으로 들어오는 그 담배연기 때문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이미 정오가 가까운 시각에야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날의 허황한 운수를 점쳐보던 그 화투짝이었다. (2) 또는, 자신을 팽개치듯이 끼어들던 언젠가의 노름판, 그 노름판에서 나의 뜨거워져가는 머리와 손가락만을 제외하곤 내 몸을 전연 느끼지 못하게 만들던 그 화투짝이었다. (「무진기행」, 인용문 속의 번호는 인용자가 임의로 붙인 것이다.)

 

무진의 삶을 노름꾼의 형상으로 은유하고 있다. 이 은유의 방향은 이중적이다. (1)은 방금 말한 짓눌린 자기세계의 전형적인 모습을 압축적으로 전하고 있다. 언젠가 골방에 갇힌 적이 있는 사람들은 이 묘사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 묘사는 오늘날에는 아주 진부한 표현이 되었지만, 1960년대 당시에는 인상적 묘사의 모범으로 꼽힐 만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승옥의 묘사가 이 전형성에서 멈추었다면, 그의 소설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2)는 전형성에서 독창성을 끌어낸다. “자신을 팽개치듯이는 도박꾼들의 전형적 행동에 대한 독특한(형상적인) 의미부여이다. 이 의미 부여는 사회심리학적인 것이다. 그것은 이 주관적인 느낌이 보편적인 해석과 연결선을 두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즉 지금은 김승옥만이 쓴 것이지만, 언젠가는 일반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묘사는 김승옥만의 고유한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의 뜨거워져가는 머리와 손가락만을 제외하곤 내 몸을 전연 느끼지 못하게 만들던 그 화투짝은 차후에 일반적으로 쓰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원본의 주인을 생각하게끔 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 독창성으로의 방향은 더욱 전진하여, 앞에서 본 개구리 울음소리’ = ‘비단조개 맞부비는 소리와 같은 오로지 그만이 쓸 수 있는 표현으로까지 나아간다. 이런 점진적인 절차를 통해, 김승옥적 묘사는 자기세계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을 서서히 뒤집어 성찰의 과정으로 바꾼다. 자기세계의 이행과 복기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궁글려 생각하면, 이 자기세계에 대한 성찰의 과정이 실질적인 개성의 성취라는 점은 독자에게 신기한 득템사항이 된다. 내용적으로는 자기세계에 대한 반성이며 형태적으로 자기세계의 완성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이행과 복기는 실질적으로 김승옥 문장의 모든 면에서 같은 몸의 두 면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의 독창성이 보편성을 끌어안음으로써 최고도의 독창성으로 부상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김승옥의 소설이 오늘날까지도 젊은 독자들에게 생생한 실감으로 읽히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V. 마무리

 

김승옥의 작품들은, 1960년대 한국인이 직면한 자기 갱신이라는 운명과의 결투를 끈질기게 묘파하였다. 그것을 자기 주체성의 확립과 상호 연대에 관한 구상이라고 한다면, 김승옥은 살아 숨쉬는 인간을 빚어내는 걸로 그 결투에 매진하였다. 살아 있는 인간을 증명하는 최고의 지름길은 맥박이 팔딱이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김승옥의 감각적 문체는 바로 독자의 손바닥 혹은 손가락을 인물들의 가슴 또는 손목에 끌어다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가 1960년대 작가군에서 첨단을 달려나간 것은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