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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머선머신’이구? - 정한아의 『술과 바닐라』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나는 ‘머선머신’이구? - 정한아의 『술과 바닐라』

비평쟁이 괴리 2021. 7. 23. 08:46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2회 2021년 7월 독회의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정한아의 주인공들은 전형적인 보통사람들이다. 예전에 전형의 창조를 소설의 핵심과제로 역설했던 평론가가 있었는데, 그 양반이 살아 있다면 증거물로 내놓고 싶을 정도이다. 물론 평론가와 작가가 내놓는 전형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평론가가 요구한 것처럼 영웅적 전형들이 아니라, 현실에서 좌절하고 소심하게 숨어드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다. 오늘날에도 영웅적인 사람들, 즉 널 뛰듯 날뛰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하지만 보통사람들은 대체로 그 광분(狂奔)들을 보고 넘긴다. 내 생계가 더 급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랄 때 그저 세상을 조용히 따라가는 방식으로 삶을 익혀왔기 때문이다. 광분자들을 떼어 놓고 보아도, 정한아의 주인공들은 특별히평범하다. 시부모의 낭만을 바라보는 며느리의 반응을 보자.

 

“두 사람은 기분이 내킬 때마다 블루스를 추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건 너무 과시적이지 않나 생각했지만 정작 그들은 평온해 보이기만 했다. 나로서는 어머니가 있을 때는 물론 할머니의 집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분위기였다”(p.80)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의 삶은 아무런 멋도 장식도 없는 밋밋한 삶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삶이 그대로 느낌의 영도(零度)에 갇힌 채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무표정한 외면적 삶 밑으로는 사적인 욕망들이 들끓는다. 그것들은 이른바 난 사람들이 바깥으로 화려하고 요란한 만큼이나 속으로 뼈마디를 쑤시고 가슴을 짓누른다. 무엇보다도 저 외면의 지질함을 견디기가 어려운 것이다. 저것은 내가 아니야! 하는 외침이 용암처럼 안에서 지글거린다. 그래서 그들은 등산하고 가출하고 운동하고 폭식하고 단식하고 부동산 투기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고 하는 일에 빠져든다. 이 모든 일탈들은 한순간 그들을 권태의 늪으로부터 구원해주는 듯 하지만 영원히 그들을 파멸의 늪으로 밀어넣는다. 작건 크건, 급격하든 지리멸렬하든, 파멸은 파멸이다.

정한아의 작품들이 묘한 흡인력으로 독자를 끌어당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들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 인물들이 겪는 지겹게도 천편일률적으로 보이는 막장극들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기가 어렵다. 바깥에서는 정치라는 이름의, 소설보다 더한 활극들이 우당탕탕 벌어지고 있어도 말이다(총소리가 사방에서 교향악을 공연하는구나.)

 

어떤 시구절이 떠오른다.

 

제일 흉하고 악랄하고 추잡한 놈 있으니 !

놈은 야단스런 몸짓도 큰 소리도 없지만

지구를 거뜬히 박살내고

하품 한 번으로 온 세계인들 집어삼키리 ;

 

그놈은 바로「권태」! ——눈에는 무심코 흘린 눈물 고인 채

담뱃대 빨아대며 단두대를 꿈꾼다.

그대는 안다, 독자여, 이 까다로운 괴물을,

—— 위선자 독자여,—— 내 동류, —— 내 형제여!

(샤를르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독자에게, 악의 꽃 Les fleurs du Mal, 윤영애역, 문학과지성사, 2003[원본출간년도: 1857])

 

그리고 어떤 시집의 머리말.

 

내가 집으로 들어왔을 때 아들이 말했다. “엄마, 화성으로부터 무언가 날아와 지구로 떨어졌대요. 그리고 세상엔 종말이 오고 있어요.” 나는 말했다. “실없는 소리 하지마.”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그거 사실이야.”

 

깊이 파묻고

돌무더기를 쌓아 올려도

나는 여전히 뼈다귀들을

파내는 일을 이어갈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What am I?

(로라 카지쓰키Laura Kasischke, 사슬 우주 Space in Chains, Copper Canyon Press, 2011) (시인 이름의 발음은 과 동료, 유 시어도어 준 교수에게 자문을 받았다. 사소한 일이래도 도움을 받았으면 감사를 표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무엇인가?”이다. 나는 머선머신이구? 덧붙이자면, 이 소설집에서 가장 밀도 있는 작품은, 느린 파멸과 급격한 파멸을 대표하는 두 친구 부부의 삶을 대비시킨 첫 소설, 잉글리쉬 하운드 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