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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의 「재입원 이틀째」 본문

울림의 글/시 한 편 읽기

황동규의 「재입원 이틀째」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2:39

재입원 이틀째

 

성긴 눈발 속에 바다로 가던 길이

모퉁이를 돌며 주춤주춤 멈춘다

마지막으로 한번 되돌아보듯,

하긴 살다가 나도 모르게 도달한 곳,

돌 성글게 박아 몸 뒤틀며 내려가는 좁은 길,

잎 진 나무 하나

앙상한 팔을 들어 눈을 맞고 있다.

팔꿈치에는 찢어진 그물과

팔등에는 새파랗게 얼어 있는 겨우살이

그 옆에는 마른 우물

들여다보면

가랑잎 얼굴들이 모여 있다.

가장자리가 온통 톱날인 얼굴들.

 

잎 진 나무 하나

마른 우물

모퉁이를 돌며 주춤주춤 멈춘 길.

돌기 전엔 성긴 눈

돌고 나면 밴 눈

하늘과 앞길이 대번 하얗게 질려……

(버클리 풍의 사랑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0)

 

황동규는 주춤거리고 있다. 길은 늘 인생의 은유이다. 시인은 아팠고 그 아픔이 새삼 종착지에 이르고야 마는 길로서의 인생을 돌아보게 한 듯하다. 그런데 길의 종착지는 길이 아니다. 거기는 바다다. 길이 바다로 가는 것은 모든 강이 바다에 이르는 것과 같을 수 없다. 후자에는 이어짐과 합류와 완성이 있으나 전자에는 불현듯 닥치는 단절이 있다. 그래서 바다로 이르는 길에는 모퉁이가 있게 마련이고 그 단절의 모퉁이가 길을 주춤거리게 한다.

실은 시인을 주춤거리게 한다. 길은 사람이 갔을 때만 길인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행적으로서 존재하는 사람인 것이다. 어쨌든 그가 주춤거리는 이유는 그 긴 생을 살았는데도 나도 모르게산 생이었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의 막연함, 그것이 시를 쓰도록 충동한 원인이다. 그래서 시인은 바다로 급격히 내려가면서 지금까지 살아 온 생을 요약적으로 다시 산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급격한 단절의 문턱으로서의 저 바다는 죽음의 바다가 아니라 새 삶으로 열리려고 애쓰는 바다이다(그 점에서 저 주춤거리는 동작은 또한 느린 무도이다.) 그러나 어떤 생도 되풀이 될 수는 없는 법. 그가 다시 산 것은 지나온 생이 남긴 흔적들뿐이다. 그 흔적들은 그러나 지나온 생의 존재를 증거하는 엄숙한 형해(形骸)이고 그것을 되새기게 하는 어두컴컴한 우물이다. 그 우물이 바다와 비스듬히 포개지고 긴장한다. 이 시의 아름다움은 거기에 있다. (쓴날: 2001.10.31 발표: 주간조선1678, 2001.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