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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의 「허유(虛有) 선생의 토르소」 본문

울림의 글/시 한 편 읽기

김춘수의 「허유(虛有) 선생의 토르소」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2:37

허유(虛有) 선생의 토르소

 

안다르샤

잡풀들이 키대로 자라고

그들 곁에

머루다람쥐가 와서 엎드리고 드러눕고 한다.

머루다람쥐의 눈이 거짓말 같다고

믿기지 않는다고

장군 후랑코가 불을 놨지만,

천사는 그슬리지 않는다.

안다르샤,

머나먼 서쪽

봄이 가고 여름이 와도 그러나

죽도화는 피지 않는다.

피지 않는다.

 

(거울 속의 천사, 민음사, 2001)

 

시인이 직접 주를 달아 허유 선생은 아나키스트 하기락(河岐洛) 선생의 아호라 하였다. 하기락 선생은 50년대에 대구 매일신보에서 실존철학을 강의하셨다 하니 해방 직후의 지식인으로 보인다. 안다르샤는 스페인령, 1930년대 아나키즘의 본거지라고 또한 주가 달려 있다. 안달루시아(Andalusia)를 가리키는 듯한데 확실치는 않다. ()로 보건대, 이 시는 아나키즘에 관한 시이지만 시의 본문에는 정치적 내용이 흔적도 없다. 시인의 눈으로 보기에 아나키즘은 잡풀들이 키대로 자라고 그들 곁에 다람쥐가 와서 엎드리고 드러눕고 하는자연 그대로의 삶과 동의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나키즘은 정치적 이념이라기보다 모든 체제며 제도며 전략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순수 자연 아니 순수 자연이고자 하는 의지를 가리킨다. 그런 의지가 존재할 수 있을까를 의심하며(왜냐하면 모든 의지는 인공이며 따라서 체제의 단초이기 때문에) 스페인의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이 불을 놓았다.” 그러나 그 의지의 천사는 그슬리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그슬리지 않긴 했지만 그 의지가 꽃을 피울 수는 없었다. 영원히 죽도화는 피지 않는다.” 이 시의 아름다움은 그 불가능한 순수 의지를 우리 마음속에 조용히 불러일으킨다는 데에서 개화한다. 죽도화는 피지 않는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이 시가 피었다. 시란 이런 것이다. 불가능성을 불가능성 자체의 현존으로 제시하는 것. 그에 비하면 테러는 똑같이 자연의 이름을 달고 나오지만, 문명을 파괴한다. 문명의 체제를 거부한다는 명목으로 문명의 체제를 이용하여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또 하나의 문명에 대한 강한 의사를 표현한다. 죽음에 개의치 않는 자연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격렬한 살해의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시는 문명도 테러도 아니다. 불가능성을 불가능성 자체의 현존으로 제시하는 시는 문명을 반성케 하며 동시에 테러도 반성케 한다.(쓴 날: 20011015, 발표: 주간조선1676, 200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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