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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익의 「한 번 만의 꽃」 본문

울림의 글/시 한 편 읽기

이수익의 「한 번 만의 꽃」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2:43

한 번 만의 꽃


대나무는 평생

좀체로 꽃을 피우는 법 없지만

만에 하나

동지 섣달 꽃 본 듯, 꽃을 한 번

피우기라도 할 양이면

 

온 대밭의 대나무마다 일제히

희대(稀代)의 소문처럼 꽃들 피어나지만,

그 줄기와 잎은 차츰 마르고 시들어

결국

죽고 만다고 한다.

 

꿈같은 개화의 한 순간을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대나무, 오오

눈부신

자멸(自滅)의 꽃

(이수익 시집,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 시와시학사, 2000)

 

새해에는 어떻든 소망의 시를 읽고 싶다. 그러나 소망은 얼마나 자주 배반당하는가. 삶은 늘 기대 저편에서 처연히 자빠져 있거나 보기 흉하게 아득바득거리고 있다. 헛산 인생의 잡동사니들로 가득찬 넝마 자루의 꼴이거나, 증오와 분노로 투닥투닥대는 티검불 더버기의 형상이거나.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게 소망 탓도 아니고 현실 탓도 아니다. 소망과 낙담 사이에 무언가가 빠져있는 탓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결핍된 그 무엇이 대나무에게 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꿈같은 개화의 한 순간을 위하여/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태도라 이른다. 그렇다. 삶을 꽃 피우기 위해서는 죽을 각오로 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인사(盡人事)’라 하는 게 아닌가. 삶의 완성은 철저한 삶의 소진을 요구하지 않는가.

한 번 만의 꽃이 한 번 만이라도 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희대의 소문이 세상을 감동시켰으면 좋겠다. 요즘처럼 모든 잘못을 남에게 미루는 세상에서 이 시만큼 절실한 소망의 시도 없다 하겠다.(쓴날: 2001.12.29, 발표:주간조선1686, 200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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