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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실현과 인정투쟁 사이에 끼인 인간들의 요지경 - 김솔의 『말하지 않는 책』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자아실현과 인정투쟁 사이에 끼인 인간들의 요지경 - 김솔의 『말하지 않는 책』

비평쟁이 괴리 2023. 8. 29. 08:55

※ 아래 글은 제 54회 동인문학상 여덟 번 째 독회에 대한 심사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싣는다.

김솔은 정보를 가득 담은 광주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작가이다. 간단히 말해 잡학의 달인이다. 이 점은 소설가의 큰 장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약점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정보 현시에 대한 충동이 자칫 구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소설의 요소가 아닐 수 없다)에 대한 배려를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신작 소설집, 말하지 않는 책(문학동네, 2023.06)은 자신의 생래적 충동을 잘 제어함으로써 단단한 단편들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고 있어서, 반가운 약진이라 할만하다. 물론 갈증 가득한 잡식에 의지하여 있을 법하지 않은 엉뚱한 이야기들을 넝쿨로 엮어 독자들의 눈을 현란하게 설레발이 치는 습관은 여전히 기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소설들은 일정한 건축의 비계를 세워, 그의 언어적 발광(發光)에 인생의 체험적 두께를 입히면서, 작가의 고민이 대중의 충동을 타고 표류하는 모양을 제시하고 있다. 그게 설사 표류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독특한 인류학적 사유의 내장에서 익힌 묵직한 지적 양분이 발효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Little Boy에서 감옥에 갇힌 Q에게 탁구공 스무 개를 넣어달라고 요청한 대목에서 탁구공 스무 개는 어떤 비유나 암시가 아니다. 그건 그냥 그대로 넌센스이고, 이런 넌센스는, 오즈의 마법사의 토네이도 마냥, 작가가 조작해내는 별의별 황당무계한 사건들과 말들을 우당탕 휘몰아간다.

그런데 이 넌센스가 그 형상 그대로 작품의 의미의 통로를 구성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다시 말해 이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의 엉킴 자체가 엉망으로 망가진 인간 사회를 투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점에 유의하고 보면 이 뒤죽박죽 사건들은 마냥 의미가 붕괴된 언어의 잔해를 드러내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간단히 말해 모든 작품은 무언가가 되고 싶어하는 인물들의 소망 속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꽤 일반적인 형태의 이 소망에 모종의 구별을 가함으로써 특정한 의미를 도출한다는 것이다. 인류가 세계의 중심의 자리를 차지한 이래, 가장 빈번히 발화된 인간의 소망은 바로 자아 실현으로 요약될 수 있는 갖가지 성취의 목록들로 표현된다. 그건 현대인의 존재의 이유그 자체이다. 그런데 김솔의 소설은, 자아 실현의 욕구 아래에서 복류하는 또 하나의 욕망, 즉 인정 투쟁을 분리해내면서, 자기 실현의 탐욕적 추구와 사활을 건 인정 투쟁 사이의 얄궂은 운명적 종속 관계를 드러낸다.

방금 자아 실현은 현대인의 존재의 이유그 자체라고 했으나 작가에 의하면 실상 그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성인악마의 차지이다. 반면 인간들은 인정 투쟁의 늪 속에 빠져 있을 뿐이고, 그것을 자아 실현으로 착각하게 되면 파멸의 철퇴를 맞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과 세상사람들의 판단을 끊임없이 좌고우면하면서 허덕허덕 이행하는 인정 투쟁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걸 그렇게 순수하게 제 몫으로 인정하는 순간, 그것이 그대로 자아실현의 양태를 띠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김솔적 사건들의 붕괴와 파탄과 엉뚱한 튐들은 바로 이 두 욕망의 운명적 예속관계에도 불구하고 그 둘이 서로를 거울처럼 반영할 뿐, 소통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온다. 문제는 거울이 아니라 인 것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 만이 길일지라도”(서정주, 사소단장)... 옛 시인의 하소연이 아득히 멀어진다. 그걸 다시 메아리로 끌어당길 것은 작가인가? 독자인가? 작가에 의하면 작가와 독자의 관계 역시, 그 운명 속에 사로잡혀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