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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리듬 - 이서수의 『젊은 근희의 행진』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생의 리듬 - 이서수의 『젊은 근희의 행진』

비평쟁이 괴리 2023. 7. 26. 09:26

※ 아래 글은 제 54회 동인문학상 제 7회 독회의 결과로 작성된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싣는다.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은행나무, 2023.05)책 날개에 난 작가 소개에 의하면 이서수는 월급 사실주의 동인이라고 적혀 있다. 간단히 해석하면 생계형 작가라는 뜻이 되겠다. 실제로 이 소설집의 주된 사건들은 빈민의 각박한 삶을 드러내는 것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적 문제를 다룬 한국문학의 역사는 길다. 최서해로부터 조세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러 작가들에 의해 숱한 작품들이 씌어졌다.

이서수의 소설을 돋보이게 하는 건 무엇일까? 오늘날의 소설 네트워크(소셜 네크워크가 아니다)에서 보자면, 그의 소설이 사회적 문제를 사회적 의제 그대로 끌고 가고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 사정으로 환원한 다음, 다시 그것을 사회적 의제로 재환원하든가, 아니면 내면의 사색으로 치환하든가 하는 소설들과는 달리 말이다.

이서수의 인물들은 그들의 형편이나 그들의 행위가 사회 구조(물론 이 구조는 변동성의 구조라는 점을 부기해야 할 것이다)라는 그물망에 긴박(緊縛)되어 있어서, 결코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시시각각으로 체감한다. 개인적 공간의 확보와 그로의 출분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들은 저마다 상이한 문제에 직면하지만, 그것들은 부동산과 연금의 문제로 수렴되거나 사람들을 특정한 프레임 속에 가두어 버리는 인습적 고정관념들에 포박된다. 현실의 문제틀을 적나라하게 마주보게 하는 사실주의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한데, 동시대를 벗어나서 한국현대소설사의 흐름 속에 이 소설을 넣어 보면 어떤가?

가령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적 기능이 두드러진다. 이 현실이 자본과 노동으로 분화되어 있다는 걸 감각적으로 느끼게 한 건 김병익에 의해 스타카토 문체라고 명명된 그의 단절적 단문 묘사이다. 이 단문들은 그 형태 그대로 현실의 파편들이며, 인물들을 찌르는 흉기들이다. ‘난장이의 죽음과 더불어 난장이의 봇짐에서 쏟아져 나온, 가지가지의 공구와 부속들이다.

그러한 현실의 폭력성을 이성적 인식의 길로 끌고 가는 건 지섭이라는 지식인이다. 노동자들은 그를 통해 사회 현실에 대해 각성하고 자신을 재정위하게 된다.(‘지섭문제적 개인이라고 부른 어떤 평론가가 있었는데, 그것은 서양의 소설이론의 억지춘향격의 오용이다.)

그 점에서 조세희의 사실주의는 외재(外在)적이다. 그것은 판단하고 묘사하고 알게끔 한다. 그에 비해서 이서수의 사실주의는 철저히 내발(內發)적이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가 동일한 파도 위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부표도 서핑 보드도 없으며 설혹 있다 하더라도 그들 역시 난파 중이다.

똑같은 내발적 사실주의이지만 최서해와도 다른 면이 있다. 최서해 소설은 토막난 몸뚱아리들의 비명과도 같다. 현실을 적나라하게 전달하지만, 그것은 오직 사실들일 뿐이다. 의미가 덧붙으려 하면, 묘사된 장면들 곳곳에서 헤진 부분이 드러난다.

이서수의 소설들에선 사실과 의미가 하나로 맞붙어서 표류한다. 사실과 감정과 생각이 세 겹의 너울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양상이 단박에 현실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을 주는 건 아니다. 그건 아니지만, 이 겹들은 인물들의 경험에 고르지 않은 두께를 부여하며, 그것이 특별한 리듬을 생산한다. 모든 리듬이 그렇듯이 이 리듬은 흡인력이다. 독자는 딱딱한 사실에 부닥쳐 저항감을 갖는 대신에 이 리듬을 타고 작중 현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동시에 이 리듬은 생성력이다. 가난은 그저 고착된 사실이 아니다. 그걸 고착화하려는 현실의 압력에 저항해서 가난한 자들, 즉 가난의 몸체들은 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그렇게 용쓰다 보면 자본이 없어서 몸 밖에 팔 게 없는 이 사람들의 몸이라는 밑천이 양질의 원기소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요컨대 몸에 대한 사랑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이서수 소설을 읽는 각별한 재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