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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만한 광기라는 감정상황을 바라보는 불안의 역할 - 정지돈의 『인생연구』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미만한 광기라는 감정상황을 바라보는 불안의 역할 - 정지돈의 『인생연구』

비평쟁이 괴리 2023. 7. 26. 09:30

※ 아래 글은 제 54회 동인문학상 제 7회 독회의 결과로서 작성된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싣는다.

인생연구(창비, 2023.05)를 읽으면서 정지돈이 제 길을 찾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의 소설의 무대에는 정상적인 독자가 보기에는 어이없는 모습들과 행동들이 빈번히 출현한다.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게 하는데, 그 근거가 불투명했다.

이번 소설집에 와서 소설적 요소들이 정돈되면서 단서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단서를 알아차리면 그의 소설쓰기가 매우 깊은 고뇌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어서 알 수가 있다. 가령,

 

진양의 졸업영화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얘가 드디어 미쳤구나 싶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그랬을 것이다. 진양은 튀는 걸 싫어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그녀가 하는 모든 건 언제나 도드라졌다”(B! D! F! W!)

 

와 같은 대목은, 소설가를 세상에 알린, 내가 싸우듯이(문학과지성사, 2016)의 첫 작품인 눈먼 부엉이의 첫 대목,

 

에리크 호이어스인가 뭔가 하는 자식이 찾아왔을 때, 나는 정상이 아니었다. 내게는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있었고 처리해야 할 고지서도 산더미처럼 있었으며, 처리해야 할 작자들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1년 조금 안 되게 사귄 여자 친구는 이별을 선언하고 다르푸르로 봉사 활동을 떠났으며...”

 

와 거의 동일한 소설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단 그 요소들이 정돈되어 대체로 광기’(‘미쳐버리다’)는 인물 쪽으로 집중되고 화자는 다른 역할을 맡게 된다.

이 정돈을 통해서 독자가 주운 첫 번째 단서는 그의 소설의 중심 인물들은 사회부적응자라는 것이다.

이런 인물 설정은 흔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정지돈의 부적응자들은 대체로 실패한 혁신가들이다. 요컨대 뭔가 해보려다가 망가진 사람들이다. 방금 인용한 첫 번째 대목에서도 보이지만, 외형만 요란한 게 아니라(“튀는 걸 싫어하는 내성적인 성격”) 실질적으로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의욕으로 충만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망가진다면 왜인가?

여기에서 고루한 현실의 방어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한다면 상투적인 광경이 되리라. 정지돈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그게 아니라 순수한 의욕 자체가 광기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현실에 의해 방해받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현실의 풍조를 교묘히 타고 넘은 사람들조차도 똑같은 수순을 밟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단서이다. 간단히 축약하면 ()’광기로 전화하는 사태가 이 소설집의 심층 제재이면서 그 사태는 무차별적이라는 것이다.

선이 광기로 변하는 사태를 이념’(idea)이데올로기(ideology)’로 전화하는 사태로 치환하면, 독자는 작가의 이 설정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전반적 감정 상황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또한 광기로의 드러냄은 이 감정상황의 폭력성을 환기시키기 위해 기능하고 있음도 느낄 수 있다. 요컨대 의 의지가 넓은 의미에서의 ‘PC(political correctness)’의 위세를 입으면서(넓은 의미에서의 PC란 세계를 위해 올바르다고 판단된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신념으로 가진다는 뜻이다), 점차로 억압적 권능으로 화하고, 그것이 마침내 폭력의 무차별적 실행으로서의 광기로 터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단서는 이때 광기는, 통상 연상하는 것처럼, 힘 센 권력의 광기가 아니라 권력과 관계된 모든 위상에서의 광기 혹은 그 위상들에 배치된 만인의 광기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아주 이질적인 양상들과 성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다만 망가짐의 상태로 흘러가고 있다는 방향만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흘러감 속에는 여전히 의 의지가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지키고 싶어 하는 욕망에 의해서 끊임없이 꿈틀대고 있어서, 그것이 진정 괘주를 돌이킬 수 있는 데 기능할 것인지, 아니면 거꾸로 비자각적 멸망을 가속시킬 것인지를 불안하게 지켜보게 한다.

이러한 진단은 결국 한국사회에 대한 은밀하고도 독한 저주가 될 것인가? 작품 내용의 작위성과 판단을 주저하는 화자의 태도를 간단히 짚어 불안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불안에 마지막 단서가 있다 할 것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정신분석학자는 불안을 두고, 특별히 분노라는 감정과 대비시키면서, ‘분노가 강력한 감정émotion이라면 불안동요émoi’임을 지적하고 어원적으로 동요감정의 정반대라고 하였다(세미나 X, 불안). 왜냐하면 감정은 행동을 충동하지만, 동요는 행동의 와해, “행동 에너지의 저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화자의 주요 마음 상태가 불안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바로 선의 이데올로기의 폭주를 멈추고 이성적 운산의 여백을 마련하고자 하는 노력이라 할 것이다.

아마도 작가가 3년 전에 발표한 모든 것은 영원했다(문학과지성사, 2020)가 그의 새로운 진전을 위한 계기가 되었던 게 아닌가 한다. 그 작품에서 이념에 목숨을 걸었던 사회주의자의 운명을 추적하면서, 실제로 내내 확인한 것은 산다는 것의 고단함과 사물들은 각자의 자리를 위해 노력했지만 어느 날 모든 게 엉망이 되는 속수무책으로 진행되는, 모든 의지의 자기배반이라는 아이러니(박영희가 차페크의 R.UR.을 번역했다는 에피소드는 그 아이러니가 실제 사실임을 가슴 아프게 적발하고 있다)였으니, 그 확인을 글로 옮기는 경험이 그의 소설쓰기에 관여적으로 작용했으리라고 짐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