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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를 넘어서야 할 이유가 많다 - 김나현의 『휴먼의 근사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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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를 넘어서야 할 이유가 많다 - 김나현의 『휴먼의 근사치』

비평쟁이 괴리 2022. 8. 31. 09:48

※ 아래 글은 제 53회 동인문학상(2022) 독회 제 8회를 통해 인터넷 용으로 발표된 의견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가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김나현의 휴먼의 근사치(다산북스, 2022.06)는 청소년성 판타지와 과학소설을 뒤섞으면서, 인간의 존재 가치에 대한 물음을 밀고 나간다. 학대 받는 아이, 통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 개인적 취향들에 영적 권능을 부여하는 것, 더 나아가 현재의 사건에 관계하는 공간을 세계 전체와 동일시하는 관점 등은 청소년 판타지에서 온 것이고, 인류의 멸망과 합리성에 근거한 인간관리, A.I의 등장은 과학소설의 외형을 이룬다. 거기에 홍수의 심판이라는 성경적 주제 등이 덧붙어 있다.

과학소설의 외형을 가졌다고 했는데, 과학적 근거에 대한 정밀한 풀이의 희박성은 청소년적 주제와 성경적 주제에 의해서 가무리되고 있다. 장르들의 혼합으로 약한 과학소설로 분류될 이 소설은 그러나 외곽의 지원 덕택에 과학소설이 할 수 있는 물음을 깊이 있게 강화한 인문주의적 성찰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만하다.

과학소설은 단순히 외계인이나 안드로이드가 등장하고 지구를 침공하고 전쟁을 벌이는 그런 공상 소설이 아니다. 과학소설을 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소설이 인간 이후에 대한 물음을 북돋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지구의 지배자로 군림해 온 인간들이 건설해 온 세상, 인류세anthorpocene’를 넘어설 새 세상에 대한 구상이,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개진되어야 만 과학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휴먼의 근사치는 인류세 너머를 전망하기보다는 인류세의 흉한 꼴을, ‘인공지능을 잔혹하게 만드는 것은 잔혹한 계획을 한 인간이다라는 기초 인식에 기반한 눈으로 오감(烏監)’함으로써 이 세상을 넘어야 할 필연성을 짜릿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소설에는 A.I의 진화와 불안(감정)의 동시병행이라는 공각기동대적 성찰과 인간과 안드로이드 사이의 공감능력의 비교라는 리들리 스코트의 블레이드 런너의 예리한 실험, 그리고, 그 원본을 제공한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의 유일성 신화에 대한 물음이 깊이 배어들어 있는데, 이는 해당 참조작품의 팬덤 독자들이나 관객들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심지어 알아차리기조차 할 수 없는, 은근히 그 핵심이 감추어진 주제들이다.

소설의 전개를 주도하고 있는 판타지적 장치들은 이 핵심 주제들을 가리면서 동시에 일종의 뜸처럼 시시때때로 자극하고 있어서, 이 장치의 기능에 대해서는 독자도 좀 더 깊은 관찰을 필요로 하고, 작가 스스로도 좀 더 정교한 세공을 요하는 것 같다. 하긴 한국 문학뿐만 아니라, 요즘은 세계 소설 자체가 판타지적 장치를 교묘하게 활용하는 데에서 문학적 성가를 얻는 걸 항용 보게 된다. 가령 대안 노벨상을 받은 마리즈 콩데의 이반과 이바나의 경이롭고 슬픈 운명 Le fabuleux et triste destin d'Ivan et Ivana(Jean-Claude Lattès, 2017, 한국판: 백선희역, 문학동네, 2021) 역시, 아랍 근본주의의 테러리즘을 둘러싼 세계 정치 현실에 대한 성찰을, 판타지적 설계를 통해 폭발하는 사건들의 불꽃놀이로 만들어서 독자들, 아니 차라리 관객들의 심장을 터져 버리게 만들고 있으니, 판타지가 기법으로서는 대세긴 대세인 모양이다. 아마도 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소위 마술적 리얼리즘의 세계문학권으로의 침공과 데이비드 린치의 트윈 픽스Twin Peaks(1990,1992,2017)를 비롯, 수퍼내추럴Supernatural이나 프린즈Fringe(그리고 최근의 카니빌Carnivàle에 이르기까지)류의 심오한 판타지 영상물들이 오늘날의 독자와 시청자들에게, 그리고 작가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 온 데서 비롯되는 현상으로 보이니, 평소에 판타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해 온 사람들이라도 이 드센 기운을 음미하고 분석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