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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여집합을 주유하며 줄띄우는 산보객 - 박연준의 『여름과 루비』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생의 여집합을 주유하며 줄띄우는 산보객 - 박연준의 『여름과 루비』

비평쟁이 괴리 2022. 9. 21. 17:56

※ 아래 글은 제 53회 동인문학상 독회 제9회(마지막 독회)에서 후보작으로 선정된 작품에 대한 인터넷용 심사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가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박연준의 여름과 루비(은행나무, 2022.07) 는 흔한 사건 위에 새콤달콤한 느낌들을, 샐러드에 드레싱을 하듯이, 뿌려서 이야기의 재미를 더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깨를 치는행위의 심리적 근원은 깨쏟아진다”, “꿀떨어진다등의 비유가 가리키는 행복한 상태를 직접 만끽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조각난 양태로나마 느끼기 위해서 하는 주인공의 마음을 전달하는 데에 있다. 우리의 주인공은 생활능력이 없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가까운 친척에 의해 거두어져 자라면서 비슷한 또래의 인물들과 대화와 경험을 공유하면서, 태생적 가난과 소외의 처지를 견디면서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쌓으며 성숙해 간다.

이때 그를 견디게 하는 건 세상을 접수하는 시선의 기교이다. ‘여백의 방식으로 세상 읽기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그 기교는 세상의 사람들과 물상들을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 외의 온갖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가령 이런 대목은 하나의 사례이다.

 

“뻥튀기 아저씨가 ‘뻥’ 소리를 제조하는 리어카 앞에서. 내 눈에 그가 하는 일은 굉음을 제조하는 일처럼 보였다. 뻥튀기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기보다 제조하는 과정―일련의 시간, 초조와 흥분이 섞인 기다림, 어수선한 가운데 주목받는 일, 발걸음을 불러 세우는 일, 아이를 겁주고 어른을 웃게 하는 일―을 전시하는 게 더 중요한 듯 보였다.”(p.22)

 

이런 여백적 방식으로 주인공은 세상이 장악하고 있는 영역 외의 자리에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넓혀 나간다. 그것은 그의 생존의 비법이자, 정신의 조절 작용을 통한 심미적 이성을 단련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 단련을 통해, 다음과 같은 대상에 대한 섬세한 다중적 정의가 나온다.

 

“미옥은 유연하고 가뿐했다. 무엇이 유연하고 가뿐한지는 말하기 어렵다. 아무튼 유연하고 가뿐하고,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미옥만이 자기의 아름다움에 무심했다. 미옥이 지닌 아름다움은 인생에 도사린 위험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이 가시 박힌 아름다움이란 걸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나는 미옥이 지나갈 때 타박하는 듯한 눈길로 몸을 훑고 지나가는 어른들의 시선을 보았다. 아름다움은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지나칠 때는 더 그렇다. 누군가는 힐난하고, 누군가는 손에 쥐고 싶어 한다. 둘 다 공격적이긴 마찬가지다.”(p.59)

 

섬세한 관찰의 효과는 대상이 된 한 사람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시야를 열어준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라는 말은 대상을 순수하게 그 자체로서 보는 것도 아니며, 또한 세상 속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도 아니라, 그 고유한 모습으로 세상에 놓이는 자리와 방식과 그를 통한 대상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한데, 이 전체적 조감은 엷은 셀로판지처럼 가냘프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상의 표면과 표면의 움직임만을 살피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지, 대상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참여의 작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미옥유연하고 가쁜한 모습이 세상과의 연관 속에서 위태로움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느끼지만, 왜 그것이 유연하고 가쁜한지는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주인공의 이 심미적 시선의 산책 혹은 편력은 그에게 산다는 것의 근본적인 외로움을 깨닫게 해주며 동시에 사람은 외롭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 열려 있을 수밖에 없다는,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흉포하다 하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한 걸음 더 성숙한 인식을 준다. 그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인간의 귀는 접히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펼쳐져 있다.“(p.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