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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자연의 세상에서 살기-채영주의 『가면 지우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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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자연의 세상에서 살기-채영주의 『가면 지우기』

비평쟁이 괴리 2023. 1. 22. 12:34

오랜만에 새로운 작가들이 나타나고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젊은 작가들의 세계가 조금씩 분명해지고 있다. 문학이 끊임없이 신인들을 배출하는 것은, 산아제한의 시대에도 신생아가 매일 태어나는 것과 같은, 생리현상일 뿐이다. 문학사를 통틀어, 젊은 문학이 없었던 때는 없었다. 더욱이 문학과 생활의 담이 허물어진 이후, 젊은 문학의 차지는 괄목하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80년대의 질풍노도 이후 문득 적막해진 문학의 터전은 이제 ‘문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위에 퍼진 방황과 모색의 체조들로 새까만 듯 보였다. 이제, 그 원형질 운동의 덩어리들이 서서히 제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정찬․김영현․이승우가 그렇고, 이순원․하창수․박상우, 그리고 채영주가 그렇다. 헌데, 젊은 작가들의 글에서 훨씬 더 늙은 표정을 읽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의 작품에서는 화석의 냄새가 난다. 그들이 그려보여주는 세상은 “30년간이나 눈에 익”(『가면 지우기』, 문학과지성사, 1990, p.44)은 변함없는 세월 속에 한없이 가라앉아 있으며, 그 세상 속의 인물들은 “태어날 때부터 단단한 쇠파이프 한 가닥씩을 등에다 꽂고 있”(p.214)는 회전 목마이거나, 마치 쥐며느리처럼 “어둡게 닫힌 나의 울타리 속”(p.35)으로 자신을 가둔다. 그들은 “원충적이고 기계 부속품 같기만 한”(p.22) 삶을 산다. 아니, 그들 자신이 원충이고 기계이며, 먹이이다. 그들은 생산의 재료이고, 생산의 도구이며, 소비 품목이다. “그 속에서 그들은 힘없이 늘어지고 흐물흐물해져”(p.206) 간다. 그들은 낡아빠진 세상 속으로 녹아들어 간다. 세상이 낡았다면, 그들도 낡았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변하지 않는다. 세상도, 그들도 다만 자연일 뿐이다.
그 밑바닥엔, 싸울 대상이 갑자기 불분명해져버린 정치적 상황, 자동 관리 장치 하에서의 규격화되고 획일화된 생활, 거대 소비 사회에서의 가치 폭발(혹은 부재) 등 현대 한국 사회가 새롭게 맞이한 사회․문화적 정황이 놓여 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말할 수 있을까? 정치적 상황의 변모는 무수한 주장의 목소리들과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보증하는 듯하고, 자동 관리 체제는 ‘편리’라는 화사한 의상을 선물하며, 거대 소비 사회는 창조의 신화를 폐기한 대신 향유의 즐거움을 가르친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근대적 명제는 이제 누구나 제자리에서 누릴 만큼 누릴 수 있다는 새로운 명제로 뒤바뀐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분명한 삶을 누린다. 그들은 “사회적인 의미를 띠는 문제에 있어서 자기 입장을 명백히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pp.115~116)임을 알고 있되 그 일 자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며, “소득 없는 미련”(p.179)은 재빨리 버릴 줄 안다. “배낭 하나에 손가방 두 개씩 열두 개의 짐을 모두 내리자 […] 검푸른 가스 한덩이를 선사하고 언덕길을 멀어져가”(p.46)는 버스처럼 그들의 만남은 언제라도 가볍게 헤어질 준비가 돼 있다. 그들에게 익숙한 배경 안에서 그들은 자신 있고, 발랄하다. 개성적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문화가 태어난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너무 작습니다』 류의 좁쌀 같은 단어들의 유희, 태연한 베끼기와 오문, 말하는 자가 생략된 야유와 핏대, 인간의 본능이라곤 성 본능밖에 없다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하는 성 완전정복의 기술들로 뒤범벅이 된 책들이 진열대를 뒤덮고, 철없는 작가들은 그 난잡한 문화적 정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고뇌를 대변해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진지하게 성찰할 줄 아는 작가는, 그러나, 그 화려한 외양 밑에 음습하게 깔려 있는 운명론적 어둠을 꿰뚫고 들어간다. 그는 그들이 한발자국만 자기 세계를 벗어나면, 그들의 자신감과 개성이 형편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본다. 그는 그들 존재의 경쾌함이 낡을 대로 낡아 “당연하고 지리한 것이 된”(p.12) 무거운 사실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감지하며, 그 뒤에 퍼지는 “광장을 울리는 군화 소리, 아버지의 집요한 탐욕, 동생의 신음 소리……”(p.149)를 듣는다. 그는 이 음험하고 요염한 자연, 물컹하고 단단한 인공의 자연에 균열을 내기 위해 몸부림친다. 90년대 작가들의 글쓰기는 그 구멍내기의 몸부림으로부터 시작한다. 
몇몇 작가들이 제1의 자연과 제2의 자연의 사이, 즉 인공 자연의 고고학에 천착함으로써 현실을 그 불길한 탄생의 지점으로 돌려, 현실의 굳은 거죽을 찢는데 고대적 상상력을 발동시키고 있다면, 채영주의 글쓰기는 비교적 리얼리즘에 충실해 있다. 그는 그의 소재를 신문 기사, 답사, 현장 조사 등을 통해 얻은 아주 현실적인 사건들에서 빌어오며,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언어는 데뷔작인 「노점 사내」를 제외하고는, 냉정한 관찰자의 기록에 가깝다. 그러나 그러한 관찰은 피상적이다. 그것이 피상적이라는 것은 우선, 작중의 화자와 작가를 동일시할 수 없기 때문이며, 다음, 그 화자의 언어를 줄거리만 따라 읽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채영주 소설의 기본 구조는 사실의 묘사에 있지 않고, 묘사하는 인물과 묘사되는 인물 사이의 미묘하게 엇갈린 관계에 있으며, 그 엇갈림의 한복판에서 화자의 객관성을 침윤하는 비틀린 이미지들이 솟아오른다. 작가가 사건 서술의 곳곳에 은밀히 끼워 넣는 그 이미지들의 기능과 효과가 어떠한가는, 가령 고분 발굴을 위해 설치한 컨베이어벨트 위에 놓인 유리컵이 떨어져 깨지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덧붙인 “햇빛 한줌이 돌무덤에 부딪혀 으깨어졌다”(p.83)라는 간명한 예에 잘 드러나 있다. 그 한마디 비유는 그 대목을 앞으로 일어날 예기치 않은 사건에 대한 복선으로 만들어줄 뿐 아니라, 그 작품을 수천 년을 지속해 무거운 사실을 끊임없이 덧쌓는 인간들의 집단적 욕망․운동과 그에 거스르는 인간의 개별적 욕망 사이의 참담한 갈등에 대한 암시체로 만든다. 실로, 작가는 사실을 기록하되, 그 사실 속에서 튀어 오르는 반역의 불꽃들을 정밀하게 추적한다. 작가가 환각을 빈번히 사용하는 것은 바로, 그 사실 속에 갇힌 반역, 즉 리얼리즘과 반리얼리즘의 맞물린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90년대 작가들의 고뇌의 한복판에 인공 자연에 구멍을 내려는 열망이 작동하고 있다고 방금 말했었다. 채영주의 소설은 그 고뇌를 작품 속 한 인물의 몫으로 치환시킨다. 그가 그리는 세계는 사실에 충실한 자와 그에 반역하는 자 사이의 대립과 갈등으로 짜여져 있으며, 반역하는 자의 반역의 행동이 사실의 완강한 울타리에 갇혀 자폭하고 마는 세상이다. 70년대 후반에 한 시인은 “어둠에 갇힌 불빛은 뜨겁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채영주 소설의 한쪽의 인물들이야말로 어둠 속에 갇힌 불꽃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적당한 경제와 밝은 가정에 잠기려 하는 다른 쪽의 인물들에 맞서, 죽음 혹은 광기를 폭발시킴으로써 그들이 애써 파묻어 놓은 낡은 기억의 창고를 열고, 그 데면데면한 일상의 허구를 까뒤집으려 하며, “알량한 직장과 월급에 세뇌당해 미워해야 할 자를 미워하지 못하는 스스로”와 “발등으로 불길이 오르는데도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는 착한 이들”에게 “비웃음의 불”을 던져 “고통당하는 사람 모두가 불길처럼 피워오르도록 만들”(p.203)려고 한다. 그러나, 그 불꽃은 70년대의 그 시구가 환기하는 것처럼 순정한 열정으로 불타오르지 못하고, “두 마리의 벌거벗은 꼼장어가 비릿한 내음을 풍기며 뒤틀”(p.32)리듯이 현실과 엉켜 뒤틀리며 매캐한 연기를 피워 올린다. 그들의 죽음 혹은 광기는 현실에 대한 섬뜩한 충격이 되지 못하고, 「가면 지우기」가 처참하게 보여주고 있듯, 현실의 위선과 기만을 어느새 닮아가며, 그 광기가 떠올린 환상의 유토피아는 실은, “껍질 속으로 웅크려든 거북”(p.164), 스스로 종과 건물이 된 자가 내부에 세운 창백한 모형 세계일 뿐이다. 그들의 가면 지우기는 또 하나의 가면 쓰기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에 채영주 소설의 90년대적 특징이 또한 있다. 80년대까지의 일반적인 문학이 한 일이 현실과의 치열한 대결이라면, 채영주는 그 대결 자체를 해부의 대상으로 변형시킨다. 그것을 위해 그는 현실에 현실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 욕망의 건물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다시 말해 화석처럼 굳어져버린 요지부동의 현실이 인간 행동의 집적물일 뿐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에 맞서 대결을 벌이는 채영주적 인물들의 광기 혹은 죽음을 그 거대한 욕망 속으로 끌어넣고, 그 이질적인 욕망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는 그것들 사이의 당기는 힘과 밀어내는 힘을, 유사성의 원리와 배척의 원칙을 섬세하게 측정한다. 그 측정과 분석의 과정을 통해, 현실의 도도한 외양은 사면의 해진 데를 드러내며, 현실 파괴의 영웅적 행동은 사람 모두의 집단 무의식의 한 첨예한 표현으로 평범화된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사건으로 전이되고, 소설은 그때 그들의 집단적 참여의 광장, 아직 아무것도 시작된 것이 없는, 독자인 그들이 함께 이루어야 할 가능성의 터전으로 변모한다. 그걸 깨달은 한 인물이 말한다. “당신의 길을 가기 위해서 처음부터 전과자라는 표찰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p.211).
아마도, 90년대의 문학은 세상을 허심탄회하게 바라보는 성숙한 자세에 뒷받침되어 새로운 문학사를 일구어갈 모양이다. 채영주는 그 가능성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작가 중의 하나이다. 그런 작가를 만났다는 것은 무척 행복한 일이다.
󰏔 1990. 1, 세계와 나, 인공자연에 구멍내려는 열망

※ 그리고 채영주는 2002년 6월 알 수 없는 병으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