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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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의 소설학

비평쟁이 괴리 2023. 1. 21. 07:33

오늘(1995년)의 한국 소설은 여전히 회상의 형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현실의 반성적 문제틀로서의 소설이 문득 과녁을 잃어버렸을 때 과거로의 후퇴는 거의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불가피함이 그렇듯이 그것 또한 충동적인 몸부림에 속한다. 그곳에는 미리 수락된 패배와 제 살을 파먹는 허무와 그리고 그것들을 완강하게 가리우는 자기애가 풀릴 길 없이 잔뜩 뒤엉킨 채로 시커먼 화장독에 썩어가는 것이다. 한동안 넋두리조의 방황과 옹고집류의 자기 옹호의 상투적 도구로 소설이 전락해 온 것은 그런 사정 아래에서였다. 그 상투성은 과거로 미래를 미리 추인한다. 영원히 고착된 그것으로 미래를 체포하고 꽁꽁 가두어버리는 것이다.
지난달의 작품을 뒤돌아보는 이 자리에서 이 신물날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은, 그러나 다시 한번 그 한탄을 한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모든 낡음은 예기치 않은 새로움의 가장된 존재태임을 증명하듯이, 이 과거를 향한 엑소더스 속에는 새로운 문학적 형태가 은밀히 숨어 자신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70년대 분단 소설들에 도입된 ‘회상’이 외면당했던 육친성의 회복을 가능케 하는 주체적 자각의 장치로 기능하였던 것과 같은 그런 무엇이 이 혼돈스런 역류 속에서 재선회의 길을 비추이는 등대처럼 솟아나고 있는 것이다. 왜 송기원(「여자에 대한 명상」, 『문학동네』)은 제가 장돌뱅이 출신임을 되풀이해 까발기고 있는 것이고, 신경숙(「외딴 방」, 『문학동네』)이 감추고 싶은 과거사를 고백하기로 작정을 한 까닭이 무엇일까? 그리고 이 소설들과 평행선을 이루는 궤적 위에서 오정희는 60년대식으로 급격히 회귀한 소설(「새」, 『동서문학』)을 발표하였고 윤대녕(「지나가는 자의 초상」, 『작가세계』)은 평론가들이 ‘시원’이라고 부른 곳을 마치 상처를 덧내듯 또다시 들추고 있다.
송기원․신경숙의 옛날 돌아보기는 단순히 오늘의 위안을 위해서도 옛날의 그리움 때문에도 아니다. 그들은 모두 소설의 존재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기 위해 옛날로 회귀한다. 왜 옛날로 돌아가야 그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걸까? 직접적으로는 그들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그때 그 자리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의 물음은 분석적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실존사적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인데, 그것은 오늘의 소설가에게 닥친 글쓰기의 위기가 추동하여 열어놓은 것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그것에는 글쓰기라는 이름의 삶의 연속성을 복구하려는 의지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끊어진 역사를 다시 잇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이야기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소설(허구)이란 무엇보다도 변화를 뜻하는 것인데, 두 작가의 소설은 바로 그 이름에 값한다. 그들의 소설쓰기의 내력 찾기가 동시에 그것 자체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기원에게 있어서 소설의 출발은 치부와 위악의 숨바꼭질 놀이를 이루고 있으며, 신경숙에게 그것은 감춤과 드러냄, 버림과 얻음의 변증법을 구성한다. 송기원은 그러나 치부를 가리던 위악의 아름다움을 굴착해 치부와 위악이 포개지는 아름다운 추악함의 순간을 찾아내고 있고, 신경숙은 그러나 그 버림과 얻음의 변증법 자체를 가능한 한 ‘정직하게’ 재생시키는 데 온 힘을 바치고 있다. 송기원의 찾아냄은 소설쓰기의 동력은 소설 속에 있지 않고 소설 그 자신이 은폐한 것에 있다는 인식으로 빛을 발하며, 아직 연재 중인 신경숙의 정직성은 소설쓰기의 삶, 그 시공간적 복합의 덩어리를 통째로 전면적 반성의 장 속으로 몰아넣는다. 바로 그 점에서 그들의 실존사의 복구는 동시에 소설적 원리에 대한 발견 혹은 탐색과 맞물린다. 책장을 펼치면 역사가 전개되는데 책장을 덮으면 역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설학의 장기판이 게임에 대한 기대로 들뜬 말들을 도열해놓고 있는 것이다.
오정희의 60년대식 소설은 이 맥락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60년대식이란 송기원 소설의 까까머리 고교생이 선택한 삶의 양식, 즉 위악을 바로 가리킨다. 그것을 가장 절실하게 보여준 작가는 김승옥이었었는데, 폐허화한 역사 위에서 더러운 몸밖에는 내세울 게 없던 한국인이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포즈가 바로 그 위악, 즉 스스로를 추악하게 만듦으로써 더 질긴 생명력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 위악의 세계가 오정희의 소설에서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면 그것은 왜일까? 그 역시, 단순히 그때의 기법에서 우월성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의 소설쓰기를 근원적으로 돌아보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60년대식 소설이라고 했지만, 배경은 사촌들이 태권도 도장과 컴퓨터 학원을 다니고 문제 학생에게는 상담 아줌마가 붙는 밝은 복지 사회의 90년대이다. 그 현실을 작가는 멀찍이 떼어놓으면서 작중 화자의 낡고 추저분한 공간을 볼록거울로 확대시킨다. 그러니, 그 볼록거울 속의 낡고 낯선 세상은 오늘의 친숙하고 밝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곳이자 동시에 의도적인 거부를 실천하는 곳이며, 바로 그것이 위악을 이룬다. 그것이 의도적인 거부라는 점에서 그것은 눈멈을 택하는 것인데, 그러나, 현실 세계가 아무리 먼 거리에서든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위악의 포즈는 차라리 오목거울, 즉 근시를 선택하는 것이다. 눈먼 자의 삶이 자기를 지키면서도 세상과의 타협을 이루는 또 하나의 현실적 방식(장 선생)이라면, 근시로서의 삶은 오히려 현실에 대한 신경증적 강박관념을 대가로 그것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공간을 여는 복잡한 고민이 준동하는 삶이다. 무엇이 고민되고 성찰되는 것인가? 바로 오늘의 세상이 보여주는 모든 이야기 방식들, 즉 현실을 치장하는 모든 환상들이 그 대상이다. 가족을 이루며 살기, 상담자가 있는 화해 세상, 우주소년 토토의 활약 등등에 대한 유혹과 거부의 왕복 운동이 일어나는 자리, 그것이 작중 화자가 자리한 공간의 본질적 특성이다. 그의 기법의 회귀는, 그러니, 말 그대로 소설 기법에 대한 근본적 탐구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환상을 이루는 모든 절차, 즉 이야기의 존재론에 대한 회의와 성찰을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점에서, 결말부의 우일의 죽음은 내용상의 죽음이 아니라 소설적인 죽음, 즉 글쓰기에 대한 의도적인 장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윤대녕 또한 회귀의 소설가이다. 그의 돌아가기가 주목을 받고 있다면, 그의 그 회귀가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개인사의 어느 지점으로 돌아가는 자기 확인적 움직임을 훌쩍 건너뛰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원은 역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저편에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의 시원은 김경수가 적절하게 지적(「윤대녕의 소설을 비판한다」, 『소설과 사상』)하고 있듯이 실존적 활력을 상실한 선험적 확정태로서 굳어질 위험을 애초부터 안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비판은 지나친 사랑인 법이다. 그의 뛰어난 소설들, 가령, 「January 9, 1993 미아리 통신」이나 이번의 작품은 그 예고된 위험을 반전의 형식으로 뛰어넘는다. 반전의 형식이라고? 그것은 말 그대로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좋은 소설들은 시원으로의 회귀를 꿈꾸지 않고, 거꾸로 그것의 돌발적이고 무차별적인 내습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시원은 더 이상 선험적 확정태이길 그치고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캄캄한 뒷무대가 되는 것이며, 바로 그 자체로서 밝은 세상의 곳곳에 시커멓게 찍히는 저주의 낙인처럼 기능한다. 그러니 작중 인물이 아무리 현실의 직장을 그만둬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가 어느 곳을 가든 그 저주의 낙인을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가 그 어둠의 저편에 도달하기 위해 어느 곳을 헤매든 그곳은 절대로 그리움에 값할 만한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소설의 윤리학은 그런 것이다. 현실의 이 무료하고도 조직적이고 불가항력적인 흐름에 단절을 개입시키는 것, 그 단절 사이에 단절면 그 자체로부터 나오는 죽음의 입김을, 다시 말해 새 삶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 말이다. 더 나아가 그 숨결들이 이어지는 방식에 대해 탐구하는 것 말이다.
이 외에도 읽을만한 소설들은 무척 많았다. 근대 이후 한국인의 ‘새것 콤플렉스’를 몸의 차원에서 재구성해내고 있는 이윤기의 「나비 넥타이」(『세계의 문학』), 욕망의 용광로 속에서 들끓는 현대 사회의 혼돈과 그 욕망의 불을 끄려는 행동 자체가 소방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의 그 통제 불가능한 뻗침이 그러하듯이 또 하나의 욕망의 불길이 되고 마는 데 대한 위기감을 치밀한 세부묘사를 통해서 이중교직시키고 있는 김훈의 「빗살무늬 토기에 관한 추억」(『문학동네』)은 꼭 다루고 싶었는데 지면 때문에 포기된 작품들이다. 또 최근 들어 괄목할 만하게 진출하면서,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는 이른바 신세대 소설가들의 작품들이 있었다. 열거하면, 김영하, 「거울에 대한 명상」(『리뷰』), 박성원, 「사라세니아」(『세계의 문학』), 「이상(異常), 이상(李箱), 이상(理想)」(『황해문화』), 한강, 「저녁빛」(『문학과사회』), 김환, 「비막(飛膜)을 펼쳐라」(『문학과 사회』), 배수아, 「검은 늑대의 무리」(『현대문학』), 「랩소디 인 블루」(『소설과 사상』)가 그것들이다. 다음 달에는 이들을 포함해 이야기를 꾸며볼 참이다. 
󰏔 1995. 4, 현대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