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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씹어야 할 떫은 얘기 -채영주의 『시간 속의 도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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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씹어야 할 떫은 얘기 -채영주의 『시간 속의 도적』

비평쟁이 괴리 2023. 2. 4. 02:07

채영주의 『시간 속의 도적』(열음사, 1993)은 묘한 소설이다. 뒷골목 부랑아들의 기발한 인생 활극을 다루고 있는 그 작품은, 굳이 분류를 하자면, 악동소설의 계열에 속하는데, 그러나, 주제가 너무 거창하고 심각해서, 악동 소설 특유의 재재바름을 민족주의적 주제의 무거움이, 마치 뚱보 마르고Margo가 비용François Villon을 깔아뭉개듯, 짓누르고 있다.
이 불협화적인 희비극의 접목 때문에 소설 읽기의 재미는 배반당한다. 배반당한다고 쓴 것은, 그것이 기대를 촉발시켜놓고는 전혀 기대를 채워줄 아량을 베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악동적인 것에 대한 몰입의 기대로 군침을 삼켰던 독자는 위장을 처지게 만드는 질긴 고기를 만나 불현듯 이빨의 저항을 느끼게 되고 소화불량에 대한 예감으로 신 침이 나오기 십상이다. 조금 더 가면, 기대는 짜증으로 변하고, 요즘처럼 신나는 일이 많은 실제의 현실을 읽기 위해 이 얄궂은 책을 던져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참고 『시간 속의 도적』을, 솔잎을 씹듯이, 주의 깊게 읽어나가면 이 소설이 달짝지근한 재미 대신에 아주 그로테스크한 재미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로테스크하다는 것은, 그 재미가 통증을 유발하고 지속시키는 재미라는 것을 말한다.
우선, 악동소설적 제재와 민족주의적 주제의 부조화한 엉김은 위상적 차원에서의 특이한 시간대의 설정과 이야기 시간의 “길고 안정된” 고전적 진행의 어긋남, 그리고 행동적 차원에서의 “한결같이 끈이 질기”면서도 “엄청나게 급한 성격”이라는 인물들의 성격적 부조화와 상응하고 있다. 이러한 세 차원에서의 부조화의 상응은 그 문제의 부조화가 작품의 결함이기는커녕 작품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구조적 장치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그 통일성이란 부조화한 통일성이어서, 말 그대로 형용모순이고, 모든 것이 혼란과 착각으로 갈갈이 찢겨 있다는 의미에서의 통일성이다. 사방에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이 지각의 정상적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 혼란의 진원은 감추어져 있지만 진앙은 드러나 있으니, 바로 인물들이 그곳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악동소설적 제재가 풍자나 해학으로 나아가지 않고 심각함과 접목된 까닭은 인물들의 삶을 풍자나 해학으로 해석하는 외부의 시선이 배제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우스꽝스러움은 밖에서 바라보는 자의 눈에만 비칠 뿐, 당사자에게는 눈물겹도록 진지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시간 속의 도적』에는 그 외부의 눈이 없다. 달리 말하면, 작품엔 묘사만 있을 뿐, 진술이 없다. 화자의 진술조차도 한 인물의 발언에 불과할 뿐이다. 작가는 인물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함으로써 인물들을 조종하는 끄나풀을 놓아버린다. 이야기의 실이 풀려나가면 나갈수록 작가는 지워져버리고 인물들의 괴상한 행동들만이 소설 공간을 가득 채우게 된다.
외부의 간섭에서 풀려난 인물은 자유인이 아니라 정신병자이다. 오직 정신병자만이 현실을 의식하지 않고 환상을 환상 그 자체로서 체험할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시간 속의 도적』은 부랑아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신병자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들이 벌이는 이상야릇한 행동들은 현실을 구성하는 상징 체계를 버릴 때 비로소 해독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행동들이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현실의 그것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가상의 상징 체계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 권력의 공작과 투입과 길고 안정된 음모가 골 빈 인물들의 테러 전쟁을 통해 그대로 되풀이된다. 내가 벌이는 이 짓이 헛된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실은 현실 한복판에 있다. “미래인”에게 묶인 “빨간 난쟁이들”은 바로 현실적 권력에 매여 사는 일상인들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독자는 내내 떫은 표정을 지울 수가 없다. 소설 속의 ‘저치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빨간 난쟁이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 한복판으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잎이 떫은 것은 오래 씹는 자에게는 그것이 보약이 되기 때문이다. 잘 씹는 것은 물론 작가의 몫이 아니라, 소설을 읽는 나의 몫이다.
󰏔 1993. 4. 28,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