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이미지의 붕괴와 새로운 미학의 가능성 - 김유태의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본문

울림의 글/시집 읽기

이미지의 붕괴와 새로운 미학의 가능성 - 김유태의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평쟁이 괴리 2022. 10. 27. 04:19

※ 아래 글은 계간 시와 함께』 2022년 여름호에 발표되었던 글이다. 수록 잡지가 '지난 호'가 되었기에 블로그에 올린다.

작년에 출간된 시집 중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시집은 김유태의 그 일 말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문학동네, 2021.09)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편 중 가장 짧은 시가 아래에 소개하는 낙관(落款)이다. 짧은 시를 택한 건 지면 때문이다.

 

불판 위의 껍질엔 도장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헤프게 해동된 냉동육을 구우며 그는 아름다움에 대해 중얼거렸다 잔혹한 멍으로만 기억은 몸에 고이는 거란다 그것이 차가웠거 나 축축했던 사자들의 구조이다 구부정해지는 짐승의 출구를 그는 느리게 뒤집었다 질식할 듯 울음의 기억이 떠올랐고 나는 수긍할 수 없었다 육체는 비명의 감옥인가요 기원 인가요 아름다웠다던 소문으로 가득한 피부가 전속력으로 두꺼워졌다 주어가 없는 슬픔이 마침내 기거할 육체를 찾아 타들어가는 밤이면 울음도 기억도 검붉은 꽃이 될 거라고, 칼로 저미면 피어나는 검붉은 기억을 나는 혀로 더듬었다 속지주의로도 속인주의로도 명명되지 않을 잿빛 슬픔은 다행히도 불행이 되고 혀가 잘려야 비로소 딱딱해진다던 발음에서 흘러나온 단어만이 환풍구로 빨려들어갔다 파헤쳐지는 형상은 한동안 소식이 끊어졌던 공범이 되어 화로 안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었다 모자를 다시 눌러쓰고 아직은 덜 타버린 살육의 혀를 나는 천천히 씹으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살덩이, 불꽃의 검붉은 눈을 오래 쳐다보았다

 

김유태의 이번 시집에 실린 시편들엔 한결같은 공통성이 하나 있다. 그것은 시가 통상적으로 이미지의 완성을 기도한다면, 그의 시들은 이미지의 붕괴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아름다움의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 사실이 시 안에 있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해 중얼거렸다 잔혹한 멍으로만 기억은 몸에 고이는 거란다

시인은 시방 미와 현실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현실에서 아름다움은 붕괴된 현실에 대한 직시와 그 경험 사실들을 통해야 빚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물론 현실의 조각남과 혼란성에 대해 말한 시들은 이미 20세기 전반기부터 수없이 있어 왔다. 이 파편성을 통해서 파편의 미학을 추구한 시도들도 있었다. 아마도 고트프리드 벤은 한국에 가장 잘 알려진 시인일 것이다.

그러나 김유태의 시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하는 것이 있다. 이전의 파편의 미학들이 은유를 통해서 파편의 현실들을 상징의 차원으로 이동시키면서 파편 자체로부터 미를 추출하려고 했다면, 김유태의 시는 이미지의 붕괴를 현실 안에서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미의 폐기를 적나라한 스펙타클로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속지주의로도 속인주의로도 명명되지 않을 잿빛 슬픔은 다행히도 불행이 되고 혀가 잘려야 비로소 딱딱해진다던 발음에서 흘러나온 단어만이 환풍구로 빨려들어갔다”

 

같은 시구는 잿빛 슬픔이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으며, 오히려 혀를 잘리게 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때문에 김유태의 대부분의 시들은 붕괴된 이미지들이 마치 우주의 잡석들처럼 시의 운동 주위에서 산산히 흩어지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애초에 말했던 미의 가능성을 무산시키는 건 아닌가?

방금 인용된 시구에서 다행히도라는 어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인은 이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무언가에로 환원되는 걸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들은 파편성 그대로 보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에 의해서 경화처리된 다음(“딱딱해진다던”), “환풍구로 빨려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 환풍구는 그러니까 파편들이 모으는 통로인데, 그 파편들은 이때 질료들로 환원된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다. 상징의 원소들이 아니라 날 것 그대로의 질료들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 그 다음은 이 질료들을 원자재로 삼아 새로운 미를 창출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미학의 근본적 재구성의 가능성이 열린다. 문제는 이 질료들이 어떻게 가공처리 되는가에 따라 변동될 질료의 특성화와, 그것들을 조합하는 알고리즘일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환풍구에 빨려들어가는 순간부터 이미 개시된다. 따라서 이제 김유태의 이 전적으로 새로운 시도의 성패 여부가 당장은 붕괴한 이미지들의 재처리 과정에서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