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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 현상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2:08

실천문학사에서 제정한 제 1회 노동문학상이 노동자 시인 박노해에게 주어졌다. 박노해는 얼굴이 없는 시인이다. 그의 시집 노동의 새벽(1984)에는 1956년 전남 출생, 15세에 상경하여 현재 기능공이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 시와 경제2(1983)을 통해 시를 쓰기 시작한 이래 그는 한 번도 얼굴을 공개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의 시는 꾸준히 발표되었고, 노동운동의 현장에서는 그의 시가 뜨겁게 낭송되고 있다고 한다. 뿐인가. 지난 번 대통령 선거 때는 민중후보 백기완씨에게 출마를 결심하게 한 호소문을 보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노해의 등장은 80년대에 대폭 확산된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층 민중들의 문화적 자기 표현에 기폭제가 되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확대과정 속에서 희생을 강요당해 온, 직접생산자들의 요구가 그들 자신에 의해 언어로 체계화되고 공개화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 문학이 현실과 무관한 것이라는 종래의 고정관념을 결정적으로 파기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게다가 노동자 시인의 시가 생생한 감동을 수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기존 문학인들에게 충격을 몰아왔다. 민중문학을 외쳐온 어떤 시인은 자신의 시가 얼마나 관념적이었는가를 뼈저리게 반성하였고, 어느 평론가는 박노해 시의 성취를 어쨌든 종래의 문학 개념 속에서 이해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박노해의 시를 두고 민중문학의 시대가 도래한 가장 큰 증거물로 삼은 이들이 나온 건 자연스런 현상이었는데, 이 중에서는 박노해 시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도 나왔다. 우리의 심성에 중요한 농민적 정서를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반박이 튀어나온다. 기성 평단은 박노해를 기존의 소시민적 문학의 유통권에 편입시키기 위해 온갖 잔소리를 늘어 놓고 있다고.

이러한 박노해 충격은 그의 얼굴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 때문에 더욱 확대되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약력에도 불구하고 대학생 출신의 노동운동가라는 소문이 떠돌기도 하고, 박노해의 시는 개인의 창작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문학 소그룹에서 공동 창작된다는 애기도 돌았다. 백기완씨에게 보낸 호소문에서 박노해는 자신이 살아 온 길을 꽤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곧바로 그 호소문은 시인 박노해와 관계없이 일군의 노동운동 그룹에서 작성했다는 풍문이 휩쓸고 지나간다. 소문은 시비를 낳기도 했다. 박노해가 얼굴을 내미는 것이 문학가로서의 책임을 투철하게 인식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제안이 나오자, 그것은 전문문인 위주, 문단 위주의 편견이 아니냐는 반론이 꼬리를 물었다.

그가 개인인지 집단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인이 얼굴을 감추는 이유는 나름대로 있을 것이다. 노동자 시인이라는 독특함으로 인하여 자칫 대중매체의 상업성에 이용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일 수도 있으며, 그의 노동자의 세계관으로 볼 때는 얼굴을 밝히는 것은 문학인의 명망성에 대한 집착, 즉 개인주의적 사고에 불과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노동현장에서의 실천적 운동을 방해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배체제에 흡수되지 않으려고 하는 그 의도가 오히려 지배체제가 노리는 문화적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현대사회는 보이지 않는 것을 신비화시키고 그것에 대한 이성적 접근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공개화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의 전체적 과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를테면 노동자들은 상품생산에 공동을 참여하면서도, 분업으로 인하여, 그 생산 과정 전체를 알 수 없는 구조적 위치에 처해 있다. 그러한 단절은 노동자들에게 자신이 세계와 의미있는 연관을 맺고 있지 못하다는 자아 상실감에 시달리게 한다. 그때 그 자아상실감을 해소하기 위한 대리충족물로 등장하는 것이, 다른 종류의 보이지 않는 것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보이긴 하지만 희귀한 것들이다. 골동품, 미술품 등이 그런 것들의 범주에 드는데 그것들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유혹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의 희귀성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에게 그것에 대한 끝없는 짝사랑을 부채질한다. 그리고 그 유혹과 짝사랑의 순환 사이에 사람들이 빠져 있는 동안, 세계 전체는 효과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은폐한다.

나는 박노해 시의 문학성이 지배 이데올로기 체제의 어떠한 논리에도 환원되지 않는 건강한 생활성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적 특성과는 무관하게 그의 얼굴 없음은 그의 시를 신비화시키는 데 기능하는 것인지도 모르며, 그럴 때 그것은 시인이 애초에 의도하지 않았던 명망성을 드높이는 것이 된다. 그것은 곧 지배체제의 문화적 전략 속에 포섭되는 길이다. (쓴날: 1988.01.27, 발표: 한국일보1988.01.30)

 

[부기]

(1) 다 아시다시피 박노해는 그 후 사노맹사건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른 후, 평화운동가로 변신하였다. 얼마 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보상심의위원회는 그를 민주화 운동 인사로 인정하였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 결정은 타당한 결정이라고 나는 믿는다.

(2) 이 글이 발표 된 직후, 몇몇 언론이 비슷한 기사를 흉내내어 썼다. 사전에 양해를 구한 적은 없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3) 후반부의 문화적 진단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는 많이 수정될 필요가 있다. ‘키치의 문화적 생활화 이후, 희귀성은 배후로 물러나고 군서성(群棲性)’이 그것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후에 있는 게 사라진 건 아니다.

(4) 이상의 부기들과 결부하여, 나는 이 글을 한 시대의 증언으로 남긴다는 것을 밝힌다. (2009.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