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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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가을의 결심

비평쟁이 괴리 2011. 11. 19. 10:29

나는 200691일부터 2007831일까지 프랑스에 체류하였다. 7년마다 돌아오게끔 되어 있는 연구년명목이었다. 198412월부터 2000년 여름까지 근무했던 충남대학교에서는 그런 제도가 뒤늦게 생겼기 때문에 그 혜택을 누릴 기회가 없었는데, 그제서야 그 과실을 맛 볼 기회를 만난 참이었다.

프랑스에 가기 직전 나는 한국문학과 매우 소원한 상태였다. 2000년경부터 80년대부터 동고동락했던 친구들이 문학과사회편집에서 물러나고 나만 외톨이로 남은 이후, 나는 대부분의 실무를 후배들에게 넘기고 해외 이론의 소개와 문학 좌담을 이끄는 것으로 내 역할을 한정하였다. 그리고 2004년 겨울호를 끝으로, 문학과사회편집도 그만 두었다. 그때쯤이면 나는 평론 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있던 처지였다.

그 중단의 배경에는 내가 2000년도 초엽에 내게 일어났던 환경의 변화에 매우 당황하고 있었던 사정이 놓여 있었다. 아니 차라리 환경의 아우성이라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소란에 귀 막고 내가 가던 길을 가려 했으나, 그것들은 마치 중성자 폭탄처럼 두터운 손등을 스며들어 귓바퀴에서 미끄럼질을 지쳐 대었다. 이 각다귀들의 환호가 고막을 터뜨릴 지경이었다. 2006년의 출국은 그런 지경의 내게 팔을 벌리고 나의 돌진을 끌어안는 아낙네 같았다.

나는 프랑스에서의 1년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며 백치처럼 보냈다. 아침에는 세느 강변을 한 시간 동안 뛰고 0.75 유로짜리 바게트를 사들고 집에 들어와 하루의 긴장을 위해 크게 하품하는 아내와 철없는 막둥이와 나누어 먹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집사람이 불어 교습소에 나가고 나면, 창문을 쭈볏대는 비둘기들에게 남은 바게트를 뜯어 뿌려주고는, TV를 틀어놓은 채로 멍하니 지냈다. 점심은 스파게티로 떼우고, 르 몽드누벨 옵세르바퇴르를 뒤적이다가 저녁때는 대학 선후배들이나 기타 지인들을 만나서 술을 마셨다. 좁은 도로를 걸을 때면 개똥을 피하기 위해 눈을 아래로 깔았지만, 그래도 여기에서는 똥이 날아다니지는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라는 횡설수설을 곁들이곤 하였다. 바깥에서 술 마실 일이 없으면 큰 주머니가 달린 카트를 끌고 나가 근처의 대형 수퍼 샹피옹에 가서 장을 보았다. 5유로 남짓의 적포도주들의 상표를 병유릴 철()하듯 읽기를 거듭하다가 마치 최후의 결심을 하듯 한 병을 바구니에 집어넣고 집에 돌아와 마누라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내 선택이 맞았는지를 두고 갑론을박하였다.

그리고 때때로 프랑스의 이곳저곳을 작은 차를 몰고 돌아다녔다. 스트라스부르, 렝스, 투르, 낭트, 셍 말로, 루르드, 니스, 리모쥬, 로카마두르, -, 사를라, 콜마르..... ‘미슐렝 지피에스를 달고 유적이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 다녔다. 프랑스 국경도 넘어, 우리 차는, 바르셀로나로, 하이델베르그로, 프라하로, 그곳으로부터 몸 파는 여인들이 맨 몸 위에 외투만 걸친 채 서 있던 고개를 넘어 드레스덴으로, 번쩍거렸다. 돈이 쪼들려 매번 지출을 아끼느라 골머리를 앓고, 빵집에서 싸게 산 먹을거리들을 근처의 놀이터에서 타향살이의 설움을 씹듯이 저작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아폴로 11호의 닐 암스트롱의 심사 같은 게 있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보름 전 쯤, 브르타뉴의 카르낙으로 선돌을 보러 갔다. 나는 그곳에서 내 운명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 때의 심정에 대해서는 네안데르탈인의 귀향서문에서 정리해 놓았다. 여하튼 나는 무위의 1년을 반납하고 귀국할 명분을 얻게 되었다. 반나절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만 피트 상공에서 내가 거듭 되뇌었던 말은 단 한마디였다. “현장으로 복귀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문학의 현장으로 복귀했는가? 그러지 못했다. 마음은 준비가 되었다 할지라도 몸은 준비가 안 되었다. 무슨 몸이? 이 말은 썩 미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말은 내 몸이 움직여주지 않는 방향이 있다는 뜻으로, 그 방향이 한국문학의 현재성 근처였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2000년 전후로 한국문학의 스펙타클적 중심을 이루었던 문학들에 대해서 내 몸은 격렬한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1990년 이래 한국문학의 스펙타클화는 비약적으로 진행되었고 10년 후 쯤에는 그것이 문학의 실체를, 아니 차라리 문학의 원리를 대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요컨대 그 즈음에서부터인가 공공담론의 차원에서 잘 팔리는 문학이 좋은 문학이라는 기이한 등식이 마침내 지배적 공식으로, 아니 차라리 공리로서 자리를 잡고,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1970년대적 구별이 깨갱 소리를 지르며 어느 외진 곳으로 쫓겨나고 만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이 상황을 분석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신체적 반응 속에 사로잡히고 만 까닭이, 앞에서 언급한 내게 일어난 환경의 변화의 간접적인 영향인지, 아니면, 2000년 무렵에 절정에 다른 저 문학적 현상이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파도였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미 현장에서 물러난 자의 속내는 그곳으로 되돌아가기를 꺼려하고 있던 참에, 복귀의 명령을 회피할 좋은 핑계거리를 거기에서 발견했기 때문인지, 나는 그것도 모른 채로, 혹은 모르려 하는 채로, 그저 현장 앞의 바리케이드를 만난 듯이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성이고만 있었다.

문학의 스펙타클이 문학 그 자체를 대체하고 있었다면, 나는 사실상, 한국문학의 몸체의 어느 측면, 어느 부위에서도 즐거움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이런 진술이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사실 이미 느끼고 있는 터이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진지한 문학들 역시, 저 현란한 문학적 광경들 속에 뒤섞인 채로, 그것들과 싸우며 태어나고 있는 중이며, 또한 나는 그런 기미들을 곳곳에서 발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런 문학들에 대해서마저 꼼꼼히 살필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난 어느날, 나는 다시 한 번 2007년 가을의 결심이 나를 꾸짖는 스펙타클에 사로잡힌다.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아니 차라리 견디기 위해, 나는 최근 들어 좀 더 의욕을 부리고 있는 참이다. 아직은 자랑처럼 무성할상태가 아니라서, 내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라는 회의에 사로잡힌 채로, 그저 굼뜨게 꿈틀거리는 꼴이긴 하지만 말이다.(쓴날: 2011.10.13.;발표: 글과 흙의 만남 잔아문학박물관 소식지2, 2011.11)

 

p.s: ‘잔아문학박물관은 소설가 김용만선생이 양평에서 운영하는 문학박물관이다. 그이는 소박하게 생기신 모습 그대로 문학에 대한 순정 하나만으로 세상을 통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