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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바람은 불어도 ... 김지연의 『마음에 없는 소리』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실바람은 불어도 ... 김지연의 『마음에 없는 소리』

비평쟁이 괴리 2022. 7. 5. 03:41

※ 아래 글은 제 53회 동인문학상 6차 독회에서 후보작으로 선정된 작품에 대한 독회의견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실바람은 불어도 내 마음의 풍선은 꺼지는구나

김지연의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2022.03)는 특이한 문체를 보여준다. 작가는 일상의 자질구레한 세목들을 시시콜콜히 전달한다. 그래서 마치 삶의 과정 자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듯하다.

한동안 이런 디테일의 촘촘함을 두고 리얼리즘 운운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내 머릿속에서 보는 것은, 내 펜으로 내려와 내가 보았던 것이 된다.”(샹플뢰리,리얼리즘, 1857)는 순진한 실재론은 글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전혀 보고 있지 못하다. 김현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미널리즘을 리얼리즘이라고 착각”(한국 소설의 가능성)하는 꼴이다. 붕어빵이란 글자를 뜯어먹고 배부른 척 게트림을 하는 건 완전코메디가 아닌가(하긴 조선 시대에 이런 희극이 일상적으로 벌어진 게 또 하나의 리얼리티이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 이 소박한 모사론을 넘어선다고 자랑하며, 소위 전형전형적으로보여주는 것이 리얼리즘이라는 그럴듯한 논리를 갖춘 것이 이른바 비판적 사실주의이다. 하지만, 그 역시 리얼리즘론이란 게 결국은 현실조작론에 불과하다는 걸 자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도대체 전형이라는 걸 누가 확신을 갖고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에 대한 모든 이해다소간 의미심장한 하나의가설에 지나지 않을 뿐인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삶의 진행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구체적 묘사들에 매료되고, 그것을 바로 현실 그 자체로 착각한다. 샹플뢰리가 그의 책에서 제사로 쓴 자연스런 문체를 볼 때, 우리는 놀라고 매혹된다는 파스칼의 말처럼 말이다.

김지연의 소설이 파고드는 것은 바로 이런 착각의 심장부이다. 지극히 자연스런 일상적 대화들이 끝없이 지속되는데, 이 말들은 거의 대부분 마음에 없는 소리들이다. 작품집의 제목은 그렇게 정해졌다. 이 속 없는 소리는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완전히 무의미한 말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의미를 감춘 말이다.

무의미한 말이라는 것은 단순히 형식상의 인간관계를 만들거나 유지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가령 우연히 만난 치매할머니가 이름을 묻자 무심중에 틀린 이름을 말한다. 그때 그 이름은 오로지 접촉의 기능만을 가진 무의미한 것이다. 그런데 그 이름은 실제 자신과 대화가 끊긴 동생의 이름이다. 치매할머니와 그 일행에게는 그런 숨은 사연이 아무 의미가 없겠지만, 화자인 나에게는, 그 이름을 자신도 모르게 발설하는 데에 무언가 절실한 감정이 숨어 있다. 이 소설들 속에는 이렇게 속마음을 감추는 말들이 온갖 다양한 양태로 출현한다.

가령 다음 대목은 그런 속마음이 무척 엉뚱하게도 표현되는 사례다.

 

“앗, 제가 잘못 봤나봐요. 눈이 안 옵니다.”

“눈 보고싶다.”

“눈 좋아해?”

“넌 싫어해?”

“응, 민정이가 감기 잘 걸리거든. 찬바람 맞으면 안 되는데 눈 오면 참을 수가 없잖아.”

“그러면 실은 엄청 좋아하는 거네.”

반장은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p.67)

 

이 대화는 고등학교 시절 왕따를 당했던 친구가 동창의 사과에 응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현하고서는 실은 친구를 좋아한다는 심사를 노출하고 있는 대목이다. 속마음에 대한 암시는 이렇게 사방에서 은폐의 아스팔트를 뚫고 솟아오른다. 그 다양성은 어떤 필사적인 감정이 거기에 담겨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 소설들의 인물들은 두 가지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심각한 갈등도 없고 때로 화목하기도 한 교제를 이어가지만 실상 그 교류는 쓸데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삶은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있으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무의미한 관계 속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으려고 때마다 어떤 암시를 보내며 상대방이 알아주길 기대한다는 것이다. 그 기대가 좌절되면 관계가 끝날 정도로 그것은 절박하다.

 

아무것도 안 말해줄 거면 같이 있을 필요가 없잖아. 뭐하러 그러냐니. 이렇게 같이 있다는 기분이 안 들게 할 거면(p.34)

 

그런데 그 진짜 속마음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건 마치 나체로 수영하고 싶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그들에게 진정 의미있는 어떤 것이 현실에 의해서 거부당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며, 그들 자신도 그들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을 뜻하기도 한다.

인물들의 이러한 모습은 현대인의 삶의 부박함을 독자에게 전달하며, 산다는 것에 대한 쓸쓸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 우리는 문명과 선진 사회가 제공하는 자유와 부를 향락하지만, 우리가 죽을 때 그것이 무슨 유산이 되겠는가? 그래 봤자 먼지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우리의 살을 곧 부패하고 더러운 냄새를 풍길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읽으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쨌든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구절을 보자.

 

언덕길을 지나다 경치가 좋은 공터를 발견했을 때에는 미셸에게 잠깐 쉬었다 가자고 말한 후 차를 세우고 내렸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자주 지나던 곳이었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물론 그런 곳들은 아주 많았다. 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곳. 언덕이라 바람이 더 세게 불었지만 공기가 쾌청해 콧속이며 머릿속,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p.54)

 

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바람은 더 세게 불, “공기[] 쾌청해 콧속이며 머릿속,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콧속마저도! 그러나 그걸로 끝이다. 이제 트럭을 타고 공장으로 돌아가면, 충만한 의미로 포장된 무의미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저 대목을 다음 노래에 포개 놓아 보자.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풀은 내마음 나뭇잎 푸르게 강물도 푸르게 아름다운 이곳에 내가 있고 네가 있네 손잡고 가보자 달려보자 저 광야로 (신중현,「아름다운 강산」)

 

한국인의 90%는 이 노래를 알고 있다. 이 노래와 직전의 묘사가 내포한 감정은 거의 동일하다. 그런데 노래는 우리를 춤추게 하는데, 앞의 묘사는 우리를 맥빠지게 한다. 마음에 없는 소리의 막바지에서 독자는 이 좌절과 약동 사이의 아득한 심연에 머리가 하얗게 비워질 것이다. 그리고 암벽 등반가처럼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고 싶다는 충동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이 소설들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