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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의 구조적 인식... - 이서수의 『헬프 미 시스터』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성차별의 구조적 인식... - 이서수의 『헬프 미 시스터』

비평쟁이 괴리 2022. 5. 26. 08:42

※ 아래 글은 제 53회 동인문학상 6차 독회에서 후보작으로 선정된 장편소설, 이서수의 『헬프 미 시스터』(은행나무, 2022.03)에 대한 독회 소감이다. 조선일보의 양해를 구해, 블로그에도 싣는다. 종이지면용과 인터넷 게시용이 약간 다르기 때문에 연이어 놓았다. 지금 다시 읽어 보니, 두 글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약간의 과언을 담고 있다. 둘을 함께 읽으면 그 점이 상쇄되리라 믿는다.

<종이지면용>

다른 가족들의 무능으로 집안 경제를 떠맡은 여성이 능력을 인정받으며 회사에 안착하는 중에, 회식 자리에서 동료가 졸피뎀을 타서 약취한 후 성폭행을 하려다가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터진다. 가해자는 무릎 끓고 빌지만, 주위의 불편한 시선 때문에 정작 회사를 그만두는 건 피해 여성 자신이다.

그때부터 여성은 횐 비둘기가 날아다니고 아이들이 오색 풍선을 들고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평화가 아니라, 내전이 끝난 후 폐허가 된 마을에 서서 일몰을 바라보는 마음에 가까운 평화를 살게 된다. 그 평화는 몰락과 죽음 근처의 배회이다. 집안 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마침내 다시 일을 해야한다는 결심에 이른다.

그렇게 해서 주인공이 손에 쥔 직업은 플랫폼 노동자이다. 휴대폰을 쥐고 있다가 연락이 오면, ‘택배를 비롯한 각종 심부름을 하는, 상시적 대기 노동자이다. 주인공은 이로써 무기력으로부터 탈출한 게 아니라 그 문턱 바깥으로 겨우 한 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러나 그 한 걸음은 그에게는 새 인생의 기회이다. 무엇보다도 달라진 게 있으니, 그동안 주인공에게 생계를 떠맡겼던 가족들이 함께 그 일에 나선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특별함을 깨닫기 위해서는 작품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 가난한 가족에 초점을 맞춘 이 소설은 은밀하게 한국 여성의 수난사를 비춘다. 성 선택의 진화사 도중에 형성된 구조적 차별이, ‘대물림 트라우마라고 부름직한 몸의 관행과 관성을 통해, 당연한 듯이 수락되고 지속되어 온 사태가 그것이다.

그 트라우마 속에서 여성의 역할은 집안을 지키는 자로서 고정되었으니, 그 지위는 바깥에 나가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사람을 내조하는 역으로 한정된다. 그래서 아들에게 헌신하는 어머니에서부터 부재하는 가부장을 대신해 경제를 떠맡는 억척 어멈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그렇게 한결같은 보조자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 점에서 보자면, 작품 제목 헬프 미 시스터는 꽤 아이러니컬 하다고 할 수 있으며, 첫 대목이 식사 장면인 것 역시 시사적이다. 왜 밥은 꼭 주부가 해야 하나?

한국문학사를 다시 들여다 보면, 이런 대물림 트라우마의 표백은 김동인의 데뷔작 약한 자의 슬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거기에서 여성은 왜 그런지도 모르는 채로 강자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마는데, 오늘의 소설에서는 그로부터의 늦고도 느린 탈주를 감행하는 것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저절로 알리라. 이게 보통 힘들고도 벅찬 일이 아니라는 걸.

<인터넷 게시용>

성차별의 구조적 인식을 위하여

 

이런 인생이 있다. 남자들의 무능으로 집안 경제를 떠맡은 여성이 능력을 인정받으며 회사에 안착하는 중에, 회식 자리에서 동료가 졸피뎀을 타서 약취한 후 성폭행을 하려다가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터진다. 가해자는 무릎 끓고 빌지만, 주위의 불편한 시선 때문에 정작 회사를 그만두는 건 피해 여성 자신이다. 집안 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집안의 여인들은 무능한 남자들을 대신해 플랫폼 노동자로 살아간다.

이 소설에선 무엇 하나 속시원한 해결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포기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의지와 다양한 실행들만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이 구리터분하고 자갈더미가 가슴에 얹힌 것처럼 불편한 이야기가 주목을 받아야 할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세상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에 대한 것이다.

우선 작가는 이 소설을 원래 부부의 이야기로 쓰려고 했다. 그런데 나이대가 제각기 다른 여성 인물들로 새 중심을 잡고 그녀들을 떠올린 뒤 비로소 이 소설을 끝까지 써야겠다는 결심이 섰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이 소설은 아주 은밀하게도 한국 여인들의 긴 수난사를 복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도 성차별의 문제가 시끄럽지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성차별은 현상적인 더러움에 원인이 있는 게 아니라 아주 오래된 구조적인 문제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즉 성 선택의 진화사 도중에 형성된 구조적 차별이 문제이고, 이것이 사람들의 몸에 각인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일군의 여성주의자들이 대물림 트라우마transgeneratinal trauma’라는 용어로 지칭하는 이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몸에 체화되어서 임기응변식 해결책들을 도로에 그치고 말게 한다. 한국사회에서 그 성차별은 안과 밖의 구별에 근거한 남존여폄의 현상으로 나타났다. 즉 남성은 바깥으로 진출하는 일을 담당하고 여성은 집안을 보존하는 일을 담당하게끔 한 집단적 결정이 남성들에게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여성들에게 보수적이고 주변적인 지위를 요구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성 간에 가능성의 범위가 달라진다. 남성들에게는 무한 출세에서부터 임시직 노동자 사이에서 살아가지만 여자는 집콕 마님에서 임시직 노동자까지가 생의 범위가 된다.

물론 세상은 그동안 꾸준히 발전해서 이런 한계를 뛰어넘어 현실의 무대에서 맹활약을 하는 여성들이 무수히 증가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집단 심리의 차원에서 이 구조적 문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평균적인 수치로 보자면 한국 사회는 여전히 보조자의 지위를 여성들에게 요구하고 있어서, 아들에게 헌신하는 어머니에서부터 부재하는 가부장을 대신해 집안을 떠맡는 억척 어멈의 형상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최초의 실마리는 아마도 가사노동에서 성 분담의 관행을 근본적으로 폐기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최근에 그나마 가사 노동의 역할을 분담하는 단계에까지 발전한 게 그나마 진보라고 하겠으나, 그조차도 구조적 구분을 유지하고 있다면, 즉 가사노동에 있어서 여성이 주도하고 남성이 주변적인 보조역을 맡는다면, 그 반대편에서의 구조적 차등도 그대로 유지하는 분위기를 존속시키는 데 에너지를 보태는 일이 될 수 있다.

그 점에서 이 소설의 제목이 헬프 미 시스터라는 건 심장을 스치는 아이러니를 감추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소설이 밥 먹는 장면에서 시작한다는 것 역시, 작가가 그것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가에 관계없이, 의미심장한 것이다.

문학적으로는 무엇이 중한가? 이 소설이 매우 답답한 분위기에 짓눌려 있다는 점을 앞에서 말했다. 그것은 글의 미숙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상황을 통째로 전달하는 효과를 가진다. 왜냐하면 대물림 트라우마는 당사자들의 몸으로 표현될 뿐 좀처럼 각성의 수준으로 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헬프 미 시스터는 현재의 소설 추세와 대립한다. 오늘의 소설들은 전반적으로 주관적 정서에 감싸여져 있다. 그래서 대체로 사소한 개인적 사건들에 머물러 있는가 하면 사회적 차원으로 넓혀질 때에도 주관에 의해 해석된 것을 사회적 사실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단편적인 사실을 제시하고 그에 대해서 모종의 판단을 내리는데, 그 판단에 대해서, 작중의 중심인물이나 화자는 논리적 추론이라고 생각하지만 대체로 감성적 반응을 그렇게 간주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경향이 강한 작품일수록, 그 역시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인 독자들의 호응을 받는다. 대중 소설의 성공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다. 문제는 그런 방향의 작품이 사회적 문제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길을 만들지도 못하고, 거기에서 제시된 판단의 유통기한이 그리 길지도 않다는 것이다.

헬프 미 시스터는 그렇게 사실과 판단을 구별하고, 추출된 사실들을 판단으로 덮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현상한다. 그럼으로써 상황의 복잡성과 더불어 인물들과 화자 역시 그 상황 속에 전이해의 상태로, 즉 체험적으로 섞여 있게 되는 사정을 보여준다. 독자 또한 그런 상황을 깨닫고 동참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가 아니라 호기심과 궁금함을 먹고 사는 무지의 주체로서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점에서 본다면 이 소설은 일종의 상황참여주의 문학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한국문학사를 다시 들여다 보면, 이런 대물림 트라우마의 표백은 김동인의 데뷔작 약한 자의 슬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거기에서 여성은 왜 그런지도 모르는 채로 강자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마는데, 오늘의 소설에서는 그로부터의 절박한 탈주를 감행하는 것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저절로 알리라. 이게 보통 힘들고도 벅찬 일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작품 속 가족의 플랫 폼 노동이 이전의 직장노동과 평화로부터 얼마만큼 진화한 단계인지를, 그리고 이 단계가 인물들의 시무룩하고도 느릿느릿한, 그러면서도 결코 멈추지 않는, 세상 개편과 자기 극복을 위한 노력의 결과임을 실감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