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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생과 청정한 시- 박이문 시의 진경

비평쟁이 괴리 2023. 12. 27. 11:38

박이문 선생은 가장 혹독한 삶을 치러낸 세대에 속하는 한국인이다. 그들은 축복 속에서 탄생하지 못했으며 안식할 미래가 손짓하지도 않았다. 식민지하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해방과 더불어 공부하는 청년이 되었으니, 바로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전 세대만큼 식민지 제도에 침윤되지 않았다는 점만 달랐을 뿐, 새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어떤 자원도 없는 상태였다. 한반도는 강대국의 관리 하에 들어갔고 곧바로 전쟁에 휘말렸다. 휴전 후 모든 것이 폐허인 상황에서 넝마를 줍듯 희망의 조각들을 힘겹게 줍고 기웠다. 평안은 오직 찬송가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현실은 그냥 비명 그득한 도가니였다. 그 안에서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겐 시시각각이 사생결단의 순간이었다. 실존주의란 말이 유행한 소이였다는 말을 나는 스승 한 분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박이문의 시는 그 구렁에서 피어났다. 아수라에서 철학을 하고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생존만이 유일한 문제였던 자리에서 삶의 근원과 향방에 눈길을 좇는 까닭은 무엇인가? 의미없고 이유없는 삶은 없다는 것을 몸으로 증거하

는 행위라고밖에는 다른 대답이 있을 수가 없다. 인류가 지적 생명으로 진화해 온 유일한 역선이 그것이었다. 시인 박이문은 그 ‘청룡 열차’에 자발적으로 올라탔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남들은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생의 심연을 파는 사람들. 세상의 고뇌를 줄기차게 묻되 고뇌에 대한 고뇌는 애시당초 접은 사람들. 생의 심연이 곧바로 생의 무지개인 사람들. 박이문은 그 부류에 속했다.
그의 시의 특이성은 그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아주 특이하게 나온다. 우선, 그에게는, 삶 따로 시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박이문의 시는 삶에 ‘대한’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삶 그 자신의 움직임이었다. “안달하다가 지치다가” “악을 쓰다가 웃다가” “아프다가 좀 낫다가” 하는 그 삶이 바로 「윤회시(輪廻詩)」다. 시는 그 삶 그대로 엉키고 쥐어뜯고 울부짖고 발버둥친다. “논리는 술병처럼 깨지고 / 부상병 같은 지혜”(「뉴욕 지하철에서」)가 그 안에서 피어난다.
그런데 진정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에 있다. 시가 삶이니 시 역시 잔혹극일 것 같은데, 난장판이어야만 할 것 같은데 그의 시는 투명하다. 그의 시는 “명상하는 변기”(「反詩」)다. 분명 시의 사건은 자주 격렬하고 참혹하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청명한 겨울날의 티끌 하나 없는 풍경처럼 말끔하다. 보라, 

교회당 그림자에 짙은 잔디밭
3백 년 묵은 무덤들
종잇장 같이 얇은 비석들이
문패처럼 총총히 서 있다

그 밑 뼈도 남아 있지 않을
주인들은 풀잎이 되어
꽃이 되어 봄을 맞고
벌레가 되어 기어나온다 (「케임브리지시 공동묘지」)

공동묘지다. 보통사람들의 그것들이다. 삶이 변변치 않았을 것처럼 죽음도 “종잇장 같이 얇은 비석들”로 초라하게 서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어떤 가치판단도 내리질 않는다. 다만 거기에 저렇게 있는 모습을 묘사할 뿐이다. 그것들이 초라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읽는 사람의 짐작일 뿐이다. 왜냐하면 저 무덤들에 어떤 영광의 사연도 제시되지 않았기에. 별 볼 일 없이 살다가 별 볼 일 없이 죽었다. 그런데 그 죽음이 300년이나 되도록 그대로 저기에 있다. 그런 존재를 잉여de trop로 파악하고 구토를 일으킨 것은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이었다. 로캉탱처럼 절실하지 않은 보통 독자, 저 무덤의 주인들처럼 슬그머니 살다가 슬그머니 죽을 보통 독자는 그 모습이 얼마간 안쓰럽다. 그러나 그건 독자의 마음일 뿐이고 화자의 시선은 무심하기만 하다. 그 무심한 시선이 계속 묘사를 이어나간다. 그 묘사 역시 무심하다. 그러나 독자가 무연히 따라가는 동안 순간적으로 아주 놀라운 생의 약동이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닫는다. 저 보통 사람의 육신은 썩어 식물 속으로 흘러가고 식물들은 제 식으로 살아 꿈틀거리는 벌레들을 기를 것이다! 하찮기 짝이 없는 생들이 은근히 만물의 우주적 순환을 가동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열정적인 운동은 한데 열정적으로 기술하려고 하면 어려워진다. 그것은 아(亞)-현실sub-reality의 영역에서 아주 천천히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실감시키려면 타임-랩스 카메라나 초고속 영사 등의 기계적 조작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시는 그런 조작 없이도 할 수 있다. 겨우 풍경을 묘사하는 것만으로 불현듯 독자를 깨닫게 한다. 모든 묘사가 그럴 수는 없다. 박이문식 투명 묘사 같은 데서나 희귀하게 성치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의 시구를 빌려 “윤곽이 없는 하얀 지혜”(「큰 눈이 내리는 길에서」)라고 명명하고 싶은 이 청정 묘사의 비밀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는 일은 연구자들을 고되게 할지도 모른다. 나는 전에 쓴 ‘해설’, 「고향엘 처음 간다고?」(『아침산책』, 민음사, 2006)에서 시인의 타향살이 경험과 시의 담백함을 연결지으려 한 적이 있다. 그도 한 동인일 것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여하튼 순수한 독자로 돌아온 입장에서 보자면, 이 투명성을 음미하는 기쁨은 매우 진기하고도 희한할 것이다. 무덤덤한, 때로는 진부하기조차 한, 인생에서 문득 약동을 느끼는 경험을 맞이할 터이니 말이다. 만인의 독자들이여, 즐거이 맛보시라.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