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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와 ‘시기’의 차이에 대하여 -최인훈의 「라울전」분석을 통해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질투’와 ‘시기’의 차이에 대하여 -최인훈의 「라울전」분석을 통해

비평쟁이 괴리 2022. 12. 18. 10:07

어제, 즉 2022년 12월 17일, 아주대학교 박만규 교수가 단장으로 이끌고 있는 초학제 연구 모임인 '감정연구단'의 제2회 정례 세미나가 '고등과학원' 제 8동에서 오후 12-18시 사이에 열렸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오래 전에 출판했던 글에서 뽑아 '시기'와 '질투'의 차이에 대한 발표를 하였다. 반응이 매우 좋았다. 무엇보다도 발표 내용이 오늘날의 한국인들의 심성을 연구하기 위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내가 이 글에서 직접 겨냥한 것은 ‘조국건설’의 사명에 직면한 해방 후 한국 지식인들의 정신적 상황이었으며, 보다 넓게는 조선조 이래의 한국 지식인의 심리적 콤플렉스였다. 현대 한국의 이해에 암시를 줄 수 있다는 의견에 기대어, 썩 길긴 하지만, 블로그에 올려도 괜찮겠다고 판단하였다. 관심있는 분들은 일독을 권한다. 이 글의 원본은 필자의 평론집, 『글숨의 광합성』(문학과지성사, 2009)에 실린  「21세기에 다시 읽는 최인훈 문학의 문제성」이며, 블로그 발표본은 원문의 일부이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최인훈의 데뷔작 중의 하나인 라울전을 통해, ‘질투시기의 차이에 대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그저 감정의 차이에 관한 얘기는 아니다. 필자는 여기에 한국현대문학의 출발점을 이루는 최인훈 문학의 재해석의 실마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최인훈이 감당했던 민족사의 과제라고 막연하게 지칭되어 온 것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민족사의 과제는 간단히 말해 한국인의 주체적 자기 정립을 가리킨다. 그런데 어떻게 어떤 내용으로 그것을 해낼 것인가? 그 맨 앞자리에 최인훈 문학이 놓여 있다.

민족사의 과제가 막연하다는 것은 그것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즉 최인훈의 소설에 관해서 그것은 다양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이 최인훈 소설을 이해하는 다양한 태도를 낳는다. 흥미롭게도 그러한 다양성은, 최인훈 문학에 대한 상이한 독서들이라기보다 최인훈 소설의 성층을 이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작가 스스로가 그 다양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광장의 일본 동수사 판에 대한 서문에서 세상을 살면서 무언가 저마다 짐작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전제하고는, 그러나 그 삶의 짐작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혼자 힘으로 깨닫기는, 혼자서 태어나기가 어려운 만큼이나 어려운 시대에서 사는 끔찍함을 언급하고는, 그런 시대에 있어서의 사람의 사는 양상을 다음 넷으로 나눈다.

 

(1) “초목이나 짐승처럼, 알지 못하는 힘에 밀려서 때와 공간을 차지”하는 삶

(2) 거기에 주저앉아 버려, “산다는 일을 무언가 신비한 도깨비 놀음처럼 알게” 되는 태도.

(3) “철조망이나 시멘트 벽 쪽을 골라 사는 사람들”의 태도 : “어떤 짐작이 들었느라고 스스로 믿는” 삶

(4) “그들의 짐작이라는 것은, 함부로 버리기 어려운 무엇인가를 버리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그런 짐작”으로, “그것을 잃지 말자는 마음을 버리고서야 비로소 얻어지는 그 짐작이 가져다주는 평화에, 선뜻 몸과 마음을 내키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태도

 

작가는 네 번째 태도가 이명준의 것임을 적시하고 있으나 그것은 그의 최종적인 선택의 경우일 뿐, 그의 삶의 굴곡을 몽땅 셈하자면 (2)를 제외한 세 태도가 모두 이명준의 한때의 모습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1]. 그렇다는 것을 그에 대한 독서가 알려주고 있다. 한국 독자들에게 있어서 광장에 대한 독서의 성층은 바로 이 세 가지 태도로 포개져 있다는 것이다.

우선 중등 과정의 문학교과서 주위를 지배하고 있는 독법은 광장을 바깥으로부터 주어진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와 반성으로서 읽는 것이다. 이러한 독법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것은 그 주어진 것에 대한 인물의 주체적 선택의 차원을 배제하고 있다. 그 차원을 고려한다면 이명준의 실질적인 태도는 (3)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세계에 대한 나름의 짐작을 가자고 거기에 투신하는 모습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명준은 근대인(자유인)으로서의 한국인에 대한 최초의 실험을 보여주었으며, 따라서 광장은 개인주의 사회 이념에 대한 정확한 문학적 상관물을 이룬다.”[2] 그러나 이러한 이명준의 모험은 실패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그 실패가 이명준 자신에게 소설적 아이러니를 야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말해, 이 모험에 대한 확신과 그 확신의 이행 끝에 도달한 허무와 반성과 치유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었다. 르네 지라르에 의하면, 세계를 정복하고자 출분한 소설 속의 인물은 온갖 종류의 허망한 모험 끝에 두 번의 죽음을 맞이하는데, 첫 번째 죽음이 정신의 파멸로서의 죽음이라면, 두 번째 죽음은 그 파멸을 그대로 수락하여 옛날의 환상을 소멸시킴으로써 맞는 신생으로서의 죽음”[3]이다. 그러한 두 번의 죽음을 통한 근원적인 회심을,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을 뛰어넘는 소설적 진실이라고 보고 있거니와, 그러한 회심의 조건은 낭만적 거짓에 대한 확신과 그것의 남김없는 실천이었다. 그런데 이명준의 경우는 바로 그러한 조건을 충족시켰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는 모호한 입장에 놓인다. 같은 서문에서 작가가 소설의 주인공이란, 정말 사람보다는 얼마쯤 분명한 걸음걸이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이명준이 한국인의 열망을 앞서 실천한 문제적 개인임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명준에게 있어서 그러한 실천은 언제나 어떤 거리낌의 감정을 남겨 놓고 있었다. 독자는 그것을 다음의 두 가지 예를 통해 그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예는 명준이 포로로 잡힌 친구 태식에게 가한 폭력의 사건이다. 그는 그 장면에서 기꺼이 악한이 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주체적 선택을 철저히 실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태식을 멱살을 잡고 얼굴을 갈기고 아랫배를 걷어찬다. 그러나 이 몸의 길에는 꼭 제 몸이 허수아비 놀 듯, 자기와 몸 사이에 짜증스런 겉돎이 있었다.” 이 겉돎은 그가 자신이 선택한 길을 실천하기도 전에 이미 회의를 내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 때문에 그는 곧 이어서 남의 아내가 된 윤애를 범하려다가 그것을 포기하고 만다.

또 하나의 예는 낙동강 전선에서의 은혜와의 밀애에 대한 명준의 회상 대목이다. 그 밀회의 시간 동안, 명준은 온통 만남에 몰입했었다. 아니 몰입하려 했었다.

 

이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수컷이면 그만이다. 이 햇빛, 저 여름 풀. 뜨거운 땅. 네 개의 다리와 네 개의 팔이 굳세게 꼬여진, 원시의 작은 광장에, 여름 한낮의 햇빛이 숨가쁘게 헐떡이고 있었다. 바람은 없다.

 

그 만남의 장소는 살아있음을 다짐하는 마지막 광장이었다. 그 마지막 광장의 경험은 결국 명준으로 하여금 중립국행이 아닌 실종(죽음)을 선택하게끔 하는 원인이 된다. 그는 배를 따라오는 갈매기에게서 은혜을 알아보고 중립국행의 덧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그의 선택의 최종적 완성으로 읽힐 만했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여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 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그가 알아보고 거기에 맞추어 그녀들을 따라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독자는 왜 그것이 죽음으로 귀결되어야만 했을까, 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만일 무덤 속에서 몸을 푼 여자의 용기를 참말로 알아챈 것이라면, 중립국행인들 대수이겠는가 말이다. 왜냐하면 중립국 역시 무덤일 터이니 말이다. 중립국의 덧없음을 깨닫는 이유는 분명하다. 처음에 명준은 그곳을 망각의 장소로 삼았다. “모르는 나라, 아무도 자기를 알 리 없는 먼 나라로 가서, 전혀 새사람이 되기 위해 이 배를 탔던 것이다. 그러나 갈매기들에게서 은혜와 딸을 알아 본 이후, 그것이 덧없음을 깨닫는다. 즉 중립국에 가서도 은혜와 딸의 기억은 끝까지 그를 따라 다닐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중립국행은 뜻없는 것이다. 또한 그러니 중립국행이 아니라, 은혜와 자신의 사랑을 완성할 길을 택한 것이다. 그것이 두 마리 갈매기를 따라 실종되는 길이다. 논리적으로 무리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 효과는?

희한하게도 사랑의 완성의 효과는 망각이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명준의 사건의 완벽한 망각. 실로 망각의 사태 그 자체로 작품은 메지나고 있다.

 

흰 바다새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마스트에도, 그 언저리 바다에도.

아마, 마카오에서, 다른 데로 가버린 모양이다.

 

그러니 사랑의 완성이라는 최종적 선택의 결과는 중립국행의 의도가 노린 그대로이다. 그 대신 사랑의 완성을 증거하는 열정과 행동, 그 네 개의 팔다리는 실종된다. 만일 이 깨달음 다음에 명준이 끝내 중립국행을 택했더라면, 사랑의 완성(의 가능성)은 미완의 양태로 끝끝내 지속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와 딸의 기억이 그를 줄곧 따라 다닐 것이기에.

이 또한 소설적 아이러니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 아이러니는 욕망의 남김없는 실천 끝에 발생하는 아이러니가 아니라 욕망의 실행의 구조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아이러니이다. 의도와 효과가 어긋나게끔 그렇게 구조화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명준의 행동은 내재적으로 간섭되어 있다라는 진술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 번째 예와 첫 번째 예는 바로 그 진술에 의해 하나로 만난다. 악한이 되고자 한 명준은 친구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자신의 욕망의 완성을 확인하고자 하나 바로 그러한 욕망의 의식 자체가, 그 작위성을 강조하여, 그의 행동을 겉돌게 한다.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친구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만큼 악한 되는 길이 단축되지만 그 단축을 위해서 친구가 고의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자의식이 동시에 표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에 충실하려 하면 할수록, 다시 말해 몰입하면 할수록 겉돎도 증대할 수밖에 없다. 한편 그 역시 몰입의 양태로 실천되어야 할 사랑의 욕망은, 그 욕망의 완성이 진행되는 정도만큼 욕망의 표상은 소실된다.

 

이 내재적 간섭에 의해 유발된 아이러니의 결과로서, 이명준의 최종적 태도의 성층은 네 번째로 귀착한다. 세 번째 태도가 세상에 대한 짐작으로 그걸 실천하는 자의 태도라면 네 번째 태도는 그 짐작의 실행이 필경 귀한 무엇을 버리고 마는 것이기에 실행 이전에 미리 실행을 보류하는 자의 태도이다. “초목처럼 살기도 싫고, 그렇다고 계산이 다 되지도 않은 데를 잔인하게 잘라버리고 사는 데도 내키지 않는 사람”, 작가는 그런 사람이 이 얘기의 주인공이라고 말한다.

이 실행 이전의 보류 속에서 뒤척이는 자, 그런 존재에 대해 오생근은 Grey 구락부 전말기에 기대어 “‘창타입의 인간이라고 말한다. 창타입의 인간은 외부와의 소통을 꿈꾸는 존재이며, 지적 관찰을 즐기는 존재이고, “사회적 신분이나 직업적 굴레에 얽매어 있지 않은자유로운 존재이며, 먼 과거의 낙원을 추억하는 몽상적 존재이고, 또 무엇보다도 분열된 존재이지만, 그 분열에 의해 자아를 되돌아 보는 존재이다.[4]

독자는 여기에 하나의 규정을 덧붙여야 하리라. ‘창타입의 인간은 그렇게 사이에 있는 자신의 존재론적 지위를 누리고 활용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렇게 사이에 끼여 있을 까닭에 대해 대답할 책임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 모든 쾌락과 유용성 이전에 왜 그는 거기에 있었던 것인가? 있어야만 했던가? 창 바깥에서 욕망의 남김없는 실행의 끝에도 지혜와 반성과 편안함과 추억이 있을 수 있다고, 그에게 소설의 모형을 제공한 먼 나라의 선편(先篇)들이 예증하고 있는 데 말이다. 왜 최인훈의 인물은 미리 간섭되어 실행과 예고된 좌절 사이에서 오래도록 망설이는가? 이에 대해 대답을 할 수 있을 때, 독자는 최인훈의 네 번째 태도 역시 또 하나의 세계관임을, 달리 말해, 그 역시 특별한 방식으로서의 민족적 과제임을 알게 되리라. 라울전을 통해 그에 대한 암시를 얻기로 한다.

 

라울전은 사울(바울)에게 패배한 친구의 이야기이다. 라울은 누구보다도 공부의 깊이가 깊고 사태에 대한 관찰이 정확하다. 그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이다. 그러나 매사에 팔팔하고 조급한 사울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라울을 앞서 나간다. 그 때문에 그는 사울에 대해 운명적인 열등감을 갖게 되는데, 그러한 열등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야말로 운명적으로 라울의 삶을 지배한다. 급기야는 라울이 면밀히 조사해 예수가 메시아임을 거의 확신으로 굳혀나가고 있는 도중에, 예수의 제자들을 탄압하고 라울의 불경스러움을 경고했던 사울이 먼저 회심하여 예수의 종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라울의 이 운명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산다는 사실 자체의 아이러니를 표현하려 했다고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28년 전의 나의 독법이 그랬다. 그러나 이러한 독법은 마지막 대목에 가서 라울이 괴물처럼 변해버린 까닭을 풀이하지 못한다. 그게 운명이라서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운명으로 만든 라울의 행동에 근본적인 문제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라울의 행동에 특별히 돋보이는 건, 그의 운명이 그대로 가리키듯 사울과의 경쟁의식과 그 경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데서 나온 그의 성실성이며, 그러한 성실을 가능케 한, “무엇이 어찌 되었건, 자기는 삶에 있어서 마지막 것을 쥐고 있다는 자신감이다. “여호와와 더불어 있다는 확신.

이 두 가지 태도를 다시 보기로 하자. 라울의 경쟁의식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1) 어린 시절. 내일로 예정된 시험에서 사울이 찍은 대목을 라울은 일부러 공부하지 않는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서 출제된다.

(2) 예수의 존재를 알았을 때. “바울이 나사렛 사람을 전혀 따져볼 값도 없는 엉터리라고 나오자, 라울은 다르게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더 굳어졌다. [……] (바울이 아니라고 하니까……) 나는 그렇다고 해야지. 그런 심사였다.”

(3) 랍비 안나스가 라울에게 예수를 고발하라는 요청을 하면서 그 요청에 힘을 주고자 바울의 말을 빌렸을 때, 라울은 바울이 자신을 밀고했다는 사실에 전율하다가 곧 바울의 “사람을 짓밟는 무엇인가가” 괘씸해져서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아랑곳 않고 랍비 안나스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한다.

 

이 세 가지 보기는 동일한 태도의 다양한 사례들로 볼 수가 있다. 얼핏 보아서는 부당한 운명에 대한 감정적인 항거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면 미묘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라울이 사울에게서 얻고자 하는 것은 사울의 실패라는 것이다. 즉 라울은 사울이 누리는 행복에 더 보태서 더 큰 행복을 누리고자 하기보다는, 사울이 자기가 누리는 것보다 덜한 행복을 취하길 바란다. 그런데 나는 행복을 누릴 기회가 매우 드문 것이니, 그 말은 사실상 사울이 행복해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이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중요한 차이다. 이에 대한 날카로운 규정이 있으니 들어보기로 하자.

 

시기envie와 질투jalousie는 완벽히 반대되는 감정이다. 질투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복락의 독점적인 향유를 보장받기를 욕망한다. 반면 시기하는 자는 타인에게서 그의 복락을 빼앗으려고 갈망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타인이 그 복락을 누리는 걸 방해하고자 한다. 시기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리페lypé, 즉 ‘타인의 행복으로 인하여 받게 되는 고통’과 가깝다.[5]

 

이 진술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타인의 복락보다 더 큰 복락을 누리려는 태도와 타인이 복락을 누리길 바라지 않는 태도는 완벽히 상반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폴록은, 아니 이 글의 원본으로 작용하는 세미나에서 라깡은 후자의 감정을 시기envie’[6]라고 부른다. 그 용어를 수락한다면 라울은 시기하는 자이다. 그런데 이 시기하는 태도는 단지 사울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여종 시바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하기보다는 그것에 대해 짜증을 낸다. 그리고 그녀가 총독의 무관과 몰래 만나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배신감에 젖어 그를 노예상인에게 팔려고 한다. 라울이 시바에게서 갖는 욕망도 시바를 갖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시바가 쾌락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바에 대한 감정 역시 사울에 대한 감정과 마찬가지로 시기다. 그렇다면 사실 라울의 시기는 부당한 운명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기의 근원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시기하는 자는 복락을 누리는 사실 자체에는 무심하려고 하거나 무심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복락에 대한 경계이든, 아니면 무관심이든 사실상 같은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전자라면 그는 복락을 누리는 존재가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되길 원하는 것이고, 후자라면 그는 이미 복락을 누리는 것과는 다른 어떤 존재이다. 소망의 형식으로든 실제의 형식으로든, 그는 복락에 주린 자가 아니다. 다시 말해 모자라고 가난하고 슬프고 굶주린 불쌍한 인간이 아니다. 모자란 인간이 아니라면?

바로 여기에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라울의 또 다른 태도, 여호와와 더불어 있다는 확신으로 넘어간다. 그 확신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다. 그 확신이 어디에서 왔는가? 바로 속임수에 빠지지 않는다는 자신. 그것은 라울의 배움에서 온 것이었다. 즉 그는 쉼없는 공부와 주도면밀한 조사로 절대적 진리에 가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로지 혼자의 노력으로. 혼자 힘으로. 그러니까 라울의 복락 너머의 욕망은, 정신분석의 일반적 용어로 치환해 말하자면, ‘쾌락 원칙 너머의 욕망은 프로이트가 인간에게서 보았던 죽음 충동이 아니라, 무류(無謬)에 대한 욕망, 다시 말해 세상의 인간들의 온갖 오류들에 대한 감시자로서의 욕망이다.

이제 라울의 파탄은 그의 힘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해도 되겠다. 그의 문제는 무엇인가? 오직 혼자 힘으로, 혼자만이, 절대를 포지하겠다는 욕망이다. 다시 말해, 절대자의 은밀한, 즉 배후의 동료가 되길 꿈꾸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은밀히예수를 수색하는 것이다. 이러한 혼자만에 대한 욕망은 바울의 태도와 뚜렷이 구분된다. 바울은 예수의 종이 된 후, 라울에게 찾아와 자신이 예수의 부름을 받은 걸 자랑하기보다는 그렇게 되도록 이끌어 준 라울에게 감사를 하는 것이다. 그 뿐이랴. 라울과 바울을 가르는 또 다른 태도는 라울은 주를 제 눈으로 확인하려고 하는 데 비해, 바울은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주가 하늘로 올라간 이후에야 그의 영광을 똑똑히 본다는 것이다. ‘를 보려 한 것과 주의 영광을 보았던 것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닌 것이다.

 

만일 이 나사렛 사람이 메시아라고 밝혀졌다면, 제사장의 옷을 벗고, 땅에 내려온 ‘여호아의 아들’을 따라나서면 그만일 것이지만, 그것을 할 수 없는 라울이었다. 라울은 경전을 통해서 그 나사렛 사람에 대한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나, 기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었다. 라울은 아직 그를 보지 못한 것이다. / [……] [라울은] 오랜 기도를 하였다. [……] 어리석은 자의 믿음을 굳건히하시고자 그대의 큰 조화를 느끼게 하시고자, 인간에게 눈을 주신, 모두 아는 여호와시여. 이 어리석은 눈에 당신의 대답을 보여주시옵소서. 두 눈이 의심할 수 없는 증거를 보여주시옵소서.

 

나[=바울]는 땅에 엎드린 채 머리를 조아려 감히 들지 못하였던 것이오. 간신히 눈을 들어 주를 보았을 때, 주는 하늘로 올라가고 계셨소. 나는 주의 영광을 똑똑히 보았소. 영롱한 구름을 밟고, 천사군의 지킴 속에 높이 하늘로 사라질 때까지,나는 그 자리에 앉아 움직일 줄을 몰랐소.

 

시선의 권능에 대한 라울의 욕망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최인훈의 소설에 관한 한 무엇보다도 해방 이후의 한국인의 민족적 과제에 연결되는 욕망이다. “도둑처럼 닥친” ‘해방과 더불어 한국인은 3.1운동의 좌절 이후 서랍 속에 묵혀 두었던 근대국가와 근대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 혹은 그래야 한다는 당위를 또 한 번의 독립선언문처럼 꺼내게 된다. 스스로 주인이 되어 스스로 주인됨을 선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무슨 근거로? 무슨 원리로? 일군의 집단으로부터 그에 대한 훌륭한 대답으로서 간주되었던 이태준의 해방 전후는 그 문제를 해결할 한 가지 중요한 방법론을 제공한다. 그 방법론은 의외로 간단하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겪었던 말 못할 수모와 또한 그 역시 밝혀선 안 될 창피스럽고도 자질구레한 협력들을 이제 모두 접고 조국건설의 사업에 열심히 참여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 손으로 거두지 못한 해방이기 때문에 당연히 운산되었어야 할 근대인으로서의 능력competence의 여부와 이웃 민족을 그렇게 못살게 굴었으면서도 세계사의 경쟁에서 탈락한 모자란 제국에게 협력한 대가로 그 역시 당연히 검증되었어야 할 자격quality의 문제를 조국건설이라는 대의로 봉합해버린 것이다.[7] 그리곤 김직원이라는 기이한 인물 하나를 내세워 조국건설의 대의와 어울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을 뭉뚱그려 그이에게 몰아붙이고 그것을 낡은 돌머리로 눌러버림으로써 그것들이 다시 고개를 내밀 가능성을 없애버린 것이다. 그러니 조국 건설 역시 거대한 눈동자였던 것이다. 그 눈동자가 쬐는 열 아래서 자격과 능력이라는 자질구레한 문제들은 다 녹아버리고 오로지 그 눈동자 자신의 열기만이 활활 불타올랐던 것이다.

라울전이 바로 이 눈동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다루고 있다는 것, 그것이 운명의 양태로 나타났지만 실은 자기 구성의 절차를 따라 형성되었다는 것을 세밀화로 그려놓고 있다는 것은 이 작품이 앞에서 짐작의 실행이라는 이름으로 제출된 민족사의 과제를 반성적으로 재검토할 시간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이태준의 해방 전후가 용맹하게 그 과제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 이래, 아마도 북의 인민들은 말 그대로 용맹하게 그 주문을 따랐는지 모르겠으나 남의 국민들은 용맹하게라기보다는 저도 모르게 그저 살아야 한다는 한 가지 일념으로 제가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르고 실행하고 더 나아가 키워 온 것이기도 하다. 그 실행의 과정은 북에서는 지상낙원의 신화로부터 일상이 지옥인 나라”[8]로의 추락 쪽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었고 남에서는 국민소득 60달러로부터 한강의 기적을 거쳐 OECD가입국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의 방향이든 오늘의 결과를 향해 남북의 한국인들을 끌고 간 에너지는, 똑같이 민족주의라는 열정이었다. “사회주의의 최고의 학습장”[9]이라고 일컬어진 마스게임에서거나 도심의 교통을 마비시키며 들끓은 대형전광판 응원문화에서거나 그것의 상징화 형식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여하튼 민족주의의 용광로는 세계가 홀연히 변화해 나가는 도중에도 식을 줄을 몰랐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근대국민으로서의 한국인이 아니라 세계시민으로서의 한국인의 존재론적 지위와 형상을 성찰할 단계에 와 있다. 라울전은 작가 최인훈이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주체적인 개인의 한국적 존재 여부를 맹렬히 실험하던 그 한켠에서 매우 암시적인 방식으로 실행된 그 실험에 대한 반성적 돌이킴의 최초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역시 또 하나의 실험, 즉 독립적 자유인이라는 의미에서의 근대국민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분석적으로 해체해 세계시민으로서 나아갈 통로를 열어놓기 위한 최초의 실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돌이킴의 과정이 주체됨의 거대한 실험장으로서의 최인훈 전집의 지하 얼마쯤에서 복류해 왔으며, 그 굽이는 어떠한지 독자는 아직 살피지 않았다. 아니 이제 겨우, 그 물줄기의 시원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 복류천은 어쨌든 1980년간 전집화두를 이을 가장 명랑한 물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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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이것은 최인훈의 소설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2)의 태도는 최인훈 희곡의 인물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만남은 언제나 신비하고 예측도 계획도 할 수 없다. 예측하고 계획해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 희곡의 인물들도 이 근원적인 신비에 눈을 뜬 사람들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생, ‘만남헤어짐의 모자이크, 길에 관한 명상, 청하, 1980, p.118)

2) 졸고, 광장에서 다시 시작하기, 문신공방하나, 역락, 2005, p.15.

3) René Girard, Mensonge romantique et vérité romanesque, Grasset, 1961, p.290.

4) 오생근, 창을 넘어 삶의 광장으로, 문학의 숲에서 느리게 걷기, 문학과지성사, 2003, pp.321-23.

5) Jonathan Pollock, "L'apocalypse selon D.H. Lawrence", Critique No 671, 2003.04. p.279. 폴록의 이 진술은 라깡의 1964311일의 세미나(in Séminaire 11-Les quatres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Seuil, 1973)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6) 이 번역어는 정확치 않다. 이해의 편의상 써 본 것이다. 실제로는 이 용어가 상식적인 관점을 뒤집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역어를 찾으려면 좀 더 시간을 두고 숙고해야 할 것이다.

7) 이 자격과 능력의 문제를 정직하게 캐물었던 작가는 채만식과 손창섭이다. 그들의 계보를 살피는 일은 한국문학의 또 하나의 시간줄기를 찾는 일이 될 것이다.

8) 이 표현은, 프랑스의 언론인 도미니크 엔느켕Dominique Hennequin이 잠입취재한 북한의 실상을 베르나르 들 라 빌라디에르Bernard de la Villardière가 제작하여, 2007123일 프랑스 TV 방송 M6에서 방영한 기록물, 북한, 나날의 지옥Corée du Nord, l'enfer au quotidien에서 빌려왔다.

9) 이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말이다. 영국과 북한의 합작으로 다니엘 고돈Daniel Gordon이 제작한, 두 어린 여학생 마스게이머를 주인공으로 한 TV기록물 어떤 정서A State of Mind(2004)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