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번역, 혹은 원문의 풍경을 재구성하기-정명환 역,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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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혹은 원문의 풍경을 재구성하기-정명환 역,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비평쟁이 괴리 2023. 12. 2. 16:43

정명환 역,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품은 재번역의 의의

 

한국의 번역문학은 지지부진하지만 꾸준히 성장해왔다. 그것이 지지부진했던 것은 ‘재탕’을 폄박(貶薄)하는 한국인 특유의 순수주의와 번역에 대한 정책 부재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런데도 그것이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개화기 이래 전통적 사유틀의 붕괴로 인해 바깥 지식에 대한 욕구가 팽대(膨大)하였고, 또 그 욕구에 힘입어 바깥 나라의 외국어를 체득한 연구자들이 착실히 증가해왔기 때문이다. 이 지지부진과 꾸준함이 미묘하게 얽힌 상태로 한국의 번역문학이 도달한 수준은 외국 문헌의 ‘정확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요 근래의 몇 차례의 번역 논쟁을 통해 여전히 오역과 역서선정기준이 입방아에 오르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제 3국어(일어나 영어)를 통한 중역은 거의 사라졌거나 점차로 개선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전문 연구자의 증가로 오역의 빈도도 신속하게 줄어들고 있고, 세계 네트워크의 단일화로 빠른 정보 교환이 가능해지면서 중요한 문헌들 거개가 속속 번역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이해’는 번역의 기본 덕목이긴 하지만, 그가 도달해야 할 정상은 아니다. 그 정상은 두말할 것도 없이 번역자(의 나라)와 저자(의 나라)의 생산적 대화이다. 이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피(知彼)와 지기(知己)가 동시에 충족되어야 하며, 그 위에서 타자와 자신의 차이를 분명하게 잴 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측정을 통해 타자의 수용이 나의 변화를 유발하고 나의 변화가 타자의 객관화로 돌려져야 하며, 그럼으로써 마침내 번역이 원본에 대한 일종의 비평적 발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재번역은 바로 이 새로운 등정을 위한 첫 시도 중의 하나이다.
이 유명한 고전은 고(故) 김붕구 선생에 의해서 1972년 문고본으로 처음 국역되었다. 정명환 선생의 새 번역은 그로부터 26년만의 일인 셈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오역을 교정한 부분들도 물론 있으나, 그것은 뒤에 작업하는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이다. 진짜 의의는 다른 데에 있다. 이 번역에 매달려 계실 즈음 나는 선생님과 ‘역주가 원문만큼 중요한 번역서의 필요성’에 대해 수 차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선생님은 바로 그 ‘역주’의 뜻을 새 번역서에 완벽하게 쏟아놓았다. 우선, 고유명사 및 당시의 특수한 사회적 정황들, 그리고 숨어 있는 암시와 비유들에 대해 일일이 주석을 달아서 책의 내용뿐 아니라 책의 풍경을 완벽히 재현하였다. 그럼으로써 이 책의 이론적 보편성뿐만 아니라 역사․사회적 필연성, 그리고 이 책이 다른 책들과 맺고 있는 상관 관계를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72년 역에는 빠졌던 제 4장 「1947년 작가의 상황」이 이번에 채워진 것도 단순히 ‘완역’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킨 것일 뿐 아니라, 이 책이 씌어진 맥락을 독자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음, 역자는 각주를 통해 저자가 자신도 모른 채 범한 오문과 착오를 교정하는 시도를 보였다. 그 교정은, 저자가 만일 살았더라면 그도 수긍할 수 있을 만큼 치밀한 논리적 설명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역주는 해설을 담당하면서 더 나아가 원문의 주장들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수행하고 있다. 역서가 그 자체로서 비평서가 될 수는 없겠으나, 역자는 각주라는 비좁은 공간을 통해 반성적 글읽기를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면서, 기간(旣刊)된 사르트르 비평서들(중점적으로는 선생님의 저서, 『문학을 찾아서』)과 연결되는 통로들을 열어놓았다.
그러니, 이 책은 ‘번역(飜譯)’의 바른 뜻을 세운 책이기도 하다. 번역은 단순히 옮기기가 아니다. 번역은 내용을 정확히 옮기고, 풍경을 재현하며, 그 풍경을 살아 있는 인간들의 대화로 생동시킨다. 번역을 통해 책은 다른 시․공간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 책은 원저자의 ‘그때의 책’이 아니라, 저자와 역자가 합동으로 이룬 ‘오늘의 책’이다.
󰏔 1999. 12. 7, 대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