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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이하고 정확한 거대한 통찰-조르쥬 바타이유의 『저주의 몫』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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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이하고 정확한 거대한 통찰-조르쥬 바타이유의 『저주의 몫』

비평쟁이 괴리 2023. 12. 10. 10:21

나는 책을 읽으며 세 번이나 생각을 바꿔야 했다. 그만큼 바타이유의 『저주의 몫』(조한경 역, 문학동네)은 괴이한 책이다. 괴이하다는 것은 아름답고 맹랑하고 놀랍다는 뜻이다. 우선 아름다운 것은 이 책의 곳곳에 숨어 있는 번득이는 표현들 때문이다. 가령 “우리는 실수를 마약처럼 복용한다.”(p.31)라든가, “사물은 외눈박이의 지배력을 행사할 뿐이며, 새로운 진실이 어둠을 타서 폭풍을 지배한다”(p.176), “자아 의식은 본질적으로 충분한 내밀성의 확보이다. 그러나 내밀성의 확보는 속임수이다.”(p.232)와 같은 비유, 잠언, 반어는 신화와 역사 그리고 삶을 오래 반추해 본 사람의 깊은 사유의 심연에서 솟아난 통찰들이다. 이런 지혜를 얻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수상록이 아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이론, 인류의 물질적 조건에서 정신적 활동까지를, 그리고, 과거에서 미래까지를 하나의 원리로 풀어내려고 하는 야심만만한 학설임을 자처한다. 이 이론이 설득력이 있는가? ‘일반 경제’의 이론임을 내세우는 이 이론은 통상적인 경제 개념을 완전히 뒤집는다. 부의 축적과 확대 재생산이 경제 이론의 핵심이라면 이 책은 부의 소모와 탕진이야말로 참된 경제의 지표가 되어야 함을 역설적으로 역설한다. 이 맹랑함을 두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러나 우스꽝스러워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깜짝 놀랄 일을 이룰 수 없다. 전복해야만 한다. 그것이 전부이다.”(p.52)라고 표명된 저자의 철학적 입장이 인디언의 ‘포틀래취’ 풍습에 홀린 나머지 극단적이고 무분별하게 흘러 넘쳐서 방언(放言)된 상상의 말거품들인가?
그러나 한 번도 가투에 참여해보지 않은 도서관 사서의 골방의 몽상에 불과하다고 일축하고 싶은 마음은 책을 읽어 갈수록 분명 정확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통찰들에 대한 놀라움으로 뒤바뀐다. 이 책의 독특성은 경제를 삶의 하부 구조에 묶어두지 않고 삶 그 자체의 문제틀에 의해 재구성하고 있다는 것, 즉 인류의 생 전체의 통일적 운동의 한 국면으로서 경제를 이해하여 철학적 태도와 정신적 행위와 물적 활동들 사이를 하나의 염주로 뀀으로써 그것들에 생체 에너지의 비등과 배분의 방법론을 부여한 후 자의식의 인수를 대고 풀어내고 있다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기이한 통일장 이론의 역사적 해석들은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볼수록 더욱 수긍될 만한 것이다. 다만, 이 괴이한 이론적 기획은 소모와 탕진이 역설적으로 부의 축적과 집중의 ‘기제’로서 광범위하게 운행되고 있는 오늘의 정보사회적 사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것은 저 음침하고 도발적인 사서의 뒤를 이어 생의 도서관 안으로 잠입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숙제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번역의 문제. 전반적인 뜻은 온당하게 전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세목으로 들어가면 사방에서 오역이 눈에 띈다. 문맥을 명확히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게다가 핵심 개념들의 번역 용어도 일관되지 못하다. 안타까운 것은 내가 잘 알고 있듯이, 역자가 일급의 베테랑 번역자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 문제가 역자의 그것이라기보다 한국의 번역학 전반의 한계라는 것을 뜻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체계적인 번역 제도가 구축되지 못하고 항상 민간 차원에서 구멍가게식으로, 주먹구구식으로, 일회용 깜짝쇼의 연속처럼 움직여 온 한국 번역 문화의 불가피한 한계이다. 그게 안타깝고 안쓰러운 것이다.
󰏔 2001. 2. 15, 시사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