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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와 시

비평쟁이 괴리 2021. 1. 15. 11:11

※ 이 글은 『포에트리 슬램』 제 7(2020.10)에 발표한 글이다. 잡지가 나온 지 시일이 꽤 흘렀기 때문에 블로그에도 싣는다.

 

1. 쥴리에트 그레코를 추모하며

 

지난 9 23 쥴리에트 그레코Juliette Gréco(1927-2020)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 함께 20세기 프랑스의 대중 음악을 대표했던 여성 가수가 현실이라는 무대에서 퇴장하였습니다. 향년 93세였으니 에디트 피아프(1915-1963) 비하면 () 누리셨다고 있으나 일찍 돌아가신 분은 제가 그이를 알았을 이미 고인이셨던 비해, 지난달 돌아가신 분은 제가 고등학생 시절 처음 이름을 들은 이후 지금까지 저에게는 살아있는 신비였으니, 가수의 사라짐은 요동을 마음 밑바닥에서 일으킬 수밖에 없었지요. 더욱이 2006 고인이 아직도 무대에 서는 놀라움에 더해, 2013년에는 자크 브렐Jacques Brél 추모 공연 소식을 보았던 터라, 이이가 마치 영원히 살아 계실 듯한 착각이 마음 구석에서 꼬무락거리곤 했기 때문에 묵중한 파동을 일으키며 삶의 극미한 구석구석에까지 요동은 전달되었습니다.

쥴리에트 그레코가 마음 속에 자리잡은 고등학교 불어 수업 도중에 신길상 선생님이 사르트르와 쥴리에트 그레코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신 단초가 되었습니다. 처음 프랑스어를 배우는 사람에게 샹송chanson’이라는 것은, 용어와 가락과 가사들이 저마다 이채를 띠고, 외계로부터 우연히 방의 창문 안으로 들어온 기발한 선물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앙큼한 것들에 철학이 들어 있다고 했으니 가사에 숨겨진 헤아리기 위해 머리를 이러저리 굴리곤 했습니다.

신선생님께서는 사르트르 선생이 말하기를 쥴리에트 그레코의 노래는 백편보다 뛰어나다라고 하셨다 저희들에게 말하셨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가서 불문학을 전공하면서 말의 원본을 찾아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찾을 없었지요. 아주 나중에, 이른바 인터넷이 발달하고 인터넷 안에 구축된 집단 지성 활성망인 위키피디어가 활동을 개시하면서 비로소 말의 샘을 찾아갈 있었습니다. ‘그레코항목(https://fr.wikipedia.org/wiki/Juliette_Gr%C3%A9co) 들어가 보면, 사르트르가 자신의 희곡 닫힌 huis clos 공연에서 서창부의 노래를 불러달라고 그레코에게 요청함으로써 인연이 시작되었고, 사르트르는 그레코의 1952 LP 쥴리에트 그레코 승승장구하다 Juliette Gréco chante ses derniers succès (Philips, 33 tours 25 cm N 76.000 R[1]) 자켓에 다음의 글을 썼다고 하는군요.

 

쥴리에트는 수백만개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수백만편의 시를 가진 것이기도 하다. 중에서 편은 언젠가 쓰여지리라. 때로는 배우를 위해서 희곡을 쓰기도 한다. 목소리를 위해서 시를 쓰지 않을 까닭이 어디 있는가? 그녀의 목소리는 산문가들에게 회한을 안기며 가슴치게 한다. 펜을 쓰는 노동자는 종이 위에 시커멓고 밋밋한 기호들을 끄적거리고는 단어들이 감각적인 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고야 만다. 그레코의 목소리는 단어들에게 그것을 회복시켜준다. 감미롭고 따스한 빛이다. 말들을 스치면서 불을 붙인다. 그녀 덕분에, 그리고 말들이 보석이 되는 보기 위해서, 나는 가사들을 썼다. 그녀가 그것들을 노래로 만들지 않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이들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녀는 나로부터 감사를 받는 것만큼이나 모두로부터 감사를 받아 마땅하다.

 

저는 소개말을 읽고 놀랐습니다. 사르트르가 이렇게 과장할 때도 있다니! 찬사는 에디트 피아프가 돌아갔을 콕토Jean Cocteau 썼던 조사[2]에서 그이를 스탕달적 의미에서의 천재 부른 것보다 부풀어진 것입니다. 콕토는 피아프의 유일무이성 강조하고 있지만, 사르트르는 그레코를 마치 모든 시의 시원인 것처럼 여기게 하는 근원성 단어들을 탑처럼 쌓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까닭이 있었겠지요. 사르트르가 허투루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닐 테니까요? 그런 마음으로 유튜브에서 쥴리에트 그레코의 노래를 찾아 들어 보았습니다. 들었더니 얼마간은 이해를 있었습니다. 음악에 문외한인 주제에 감히 말하자면, 그레코의 목소리는 저음이 바탕인데 그것을 고음처럼 듣게끔 합니다. 거기가 그녀의 신비한 목소리의 출발점인 듯합니다. 그로부터 두꺼운 음색과 얇은 음색이, 힘찬 음조와 부드러운 음조가, 익살과 비애가, 환희와 슬픔이 동시에 생성되어 번갈아 출현하거나 때로는 곡조에서 모든 음색과 음조와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아마도 아직 쓰여지지 않은 수백만 편의 시를 가지고 있다 사르트르가 평한 것은 이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레코는 표현 가능한 모든 음을 가지고 자유자재하게 이동합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그것들을 하나로 끌어 모읍니다. 그로부터 저음이 최고의 고음치에 다다르고 모든 탁한 소리들로부터 투명한 맑은 소리 하나가 배어 나옵니다. 아마도 그것은 무음(無音)’ 혹은 외음(外音)’ 해당할 것입니다. 여기에 와서 표현 가능한 모든 음은 이제 표현불가능한 모든 음들까지도 끌어안으면서 자체의 바깥에 위치하기 때문입니다.

사르트르가 그레코의 목소리는 단어들에게 그것을 회복시켜준다. 감미롭고 따스한 빛이다. 말들을 스치면서 불을 붙인다. 그녀 덕분에, 그리고 말들이 보석이 되는 보기 위해서, 나는 가사들을 썼다.”라고 것은 그레코의 낮은 목소리들이 불꽃으로 승화되어 피어오르는 느꼈기 때문이라고 저는 짐작합니다. 이런 소리는 숭고성 자체를 구현합니다. 우리는 정반대의 목소리도 기억합니다. 가수 문주란이 동숙의 노래에서 저음을 낮게 , 혹은 김현식이 향기 없는 에서 그대 갈라진 목소리로 절박하게 부를 , 메마른 자갈처럼 구르며 최고도로 희박해진 음들은 모든 에너지가 비어버린 듯한 황폐함 느끼게 합니다. 황폐함은 삶의 가차없는 덧없음을 환기시키며 우리의 가슴을 선뜩 베고, 썰물처럼 빠져 나갑니다.

반면 그레코의 숭고한 목소리는 모든 평범한 인생들의 고귀함을 느끼게 하며 생의 약진을 향한 그들의 조용한 준비를 돕습니다. 그것이 사르트르가 쥴리에트 목소리의 시원성의 단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 시의 바탕으로서의 목소리

 

사르트르는 쥴리에트 그레코의 노래 하지 않고 목소리라 했으며, 그의 목소리 두고 수백만 편의 노래 품고 있다고 쓰지 않고 수백만 편의 라고 적었습니다. 사르트르가 시를 염두에 것이 분명합니다. “시적 언어는 사물이라서 자신은 그보다는 기호의 언어 산문에 주의를 집중한다고 표명[3]해서 유명한 사르트르가 시를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1 후에 셍고르Senghor 엮은 아프리카 시인들의 시집, 흑인 마다가스카르인의 새로운 불시 선집 Anthologie de la nouνelle poésie nègre et malgache de langue française 서문에서 흑인시의 정치성을 적극 옹호한 있습니다[4]. 그리고 사르트르의 선회는 /산문에 대한 본래의 자신의 구별을 폐기한 아닙니다. 방금 소개한 글에서 정명환 선생님은 사르트르가 시의 혁명적 성격을 그의 마음의 우물에서 검은 본질 발견하여 “‘반성 차원으로 옮겨 가는 [5]이라고 적기한 데에서, 내면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시의 작업을 보고, 시적 작업은 자신을 선구자이며 계시자이며, 메시아로서 재정립하는 일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6].

요컨대 사르트르는 시의 혁명성을 존재의 근본적 전환, 존재 수행을 통한 자기 본질의 갱신이라고 보았다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7] 했던 유명한 명제의 진정한 뜻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런 시에 대해서 목소리의 시원성이 갖는 관계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레코의 노래에 한정된 것이라 시원적 목소리라 해야 정확하다고 누가 지적할지 모르겠으나, 저는 그레코의 노래를 목소리 환원한 , 그것을 시와 연계시킨 사르트르의 절차에서 시의 바탕에 목소리를 깔고 다시 시의 존재 갱신 작업의 근원을 목소리에 두고자 했던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그레코의 목소리에서 그가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본질을 품은 새로운 존재() 탄생을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목소리 자체가 시원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목소리의 시원성이 시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다음의 질문이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오랫동안 목소리의 의미를 탐구해 시인이자 철학자를 떠올립니다. -루이 크레티엥Jean-Louis Chrétien(1952-2019)입니다.

그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1930-2004)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던 시기(그는 1986년에 미국에 진출하였지요)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 관한 성찰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될 수밖에 없었고, 미국 학계 동향의 직접적인 영향권 내에 들어 있던 한국에는 아예 소개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데리다를 통해서 세계의 식자들의 입에서 말씀Parole’ 권위를 부정하는 목소리들(?!) 난무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러나 꼼꼼히 들여다보면 크레티엥과 데리다 사이에는 오히려 상통하는 바가 많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부분입니다만, 여기에서는 대목은 건너뛰기로 하고, 크레티엥에게 있어서 목소리 존재 양상과 의미를 간단히 일별하겠습니다.

-루이 크레티엥에게서 가장 두드러진 면은 말에서의 목소리의 기능 대한 특별한 시선에 있습니다. 그는 말을 의미를 규정하거나 제시하는 행위로 보기 이전에, 특정한 규정으로 인해 겪는 존재의 균열(왜냐하면 어떤 사건이 벌어졌거나 어떤 말을 통해서 의미부여가 이루어지는 순간, 존재는 기존의 의미망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망으로 건너가게 되기 때문)로부터 의미의 붕괴 혹은 의미의 탄생의 기미가 피어나는 계기로 봅니다[8]. 간단히 말하면, 크건 작건 충격적인 말이나 사건을 접했을 우리의 입술은 살그머니 벌어지면서 신음, 탄식, 놀람, 비명, 감탄 혹은 간단한 생각의 새나옴을 표현하는 내쉼 등의 반응을 하게 되지요. 바로 순간 입술의 벌어짐은 바로 현존재를 가르면서 새로운 의미가 틈입하는 통로가 열리는 순간입니다. 목소리는 바로 통로의 열림 자체를 표현합니다. 그것은 말과 독립되어 있고 이전에 출현하며 새로운 말의 자원이 담길 태반을 제공합니다.

그러니까 목소리는 새로운 언어의 시원, 시의 시원이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목소리는 묘사(이미지)보다도, 진술(개인적 진실의 즉각적인 토로)보다도 앞서 있으며, 후자들은 오로지 목소리로부터 비롯하여 생성된다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모든 시의 출발점은 호흡의 변화, 리듬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호흡의 변화는 존재를 갱신할 자세가 동력을 얻는다는 것을 그대로 가리킵니다.

저는 근래 한국시의 출발점이 대화라는 사실을 차례 지적한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본격적인 연구를 발표할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만, 생각은 한국시의 존재 양식에 하나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한국시는 읽는 존재태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리듬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한국시 리듬에 대한 이해는 1960년대부터 괴이한 민족주의적 발상으로부터 출현해서 확산한 음보주의 의해 크게 왜곡되어 왔습니다. 독점론이 무려 50 이상을 지배해 왔습니다. 결과는 한국시에서 리듬의 다양한 향유를 말소시키고 역설적이게도 한국시를 이미지의 , ‘보는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근본적 차원에서의 반성이 시작된 것은 21세기 들어서입니다. 장철문, 장석원, 장철환 젊은 소장 연구자들이 음보론으로부터 독립한 새로운 리듬 연구를 시도하였고, 저도 한국시의 리듬을 탈옥시키자라는 제목을 특집 구성[9] 통해, 음보론으로부터 해방되어 모든 부면으로부터 발생하는 리듬에 대한 탐구와 감수를 촉구한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 교육의 장에서는 음보론이 압도적인 권위를 행사하고 있으며, 젊은 연구자들의 시도들도 이상의 도약을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목소리 대한 새로운 접근은 그래서 지금 매우 절실한 목소리를 흘려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시 리듬을 해방시키는 일은 목소리의 실존적 움직임을 감각적으로 느끼는 데서부터 시작할 것이니까 말입니다. 모든 시인들과 시를 읽은 사람들의 관심이 한국시의 새로운 비상이라는 비행선의 심지를 점화할 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1] https://fr.wikipedia.org/wiki/Discographie_de_Juliette_Gr%C3%A9co

[2] 이 조사는 이 블로그 안에 번역되어 있다. ‘울림의 글’ → ‘산문읽기’로 찾아갈 수 있다.

[3] 너무나 유명한 얘기라서 굳이 출전을 밝히지 않아도 좋을 것이나, 정확한 번역을 소개하기 위해 다음 문헌을 적어둔다. Jean-Paul Sartre,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옮김, 민음사, 1998 [원본: 1947]

[4] 이에 대해서는 정명환, 「사르트르의 문학참여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in 정명환, 『문학을 찾아서』, 민음사, 1994, 60쪽 이후, 참조.

[5] 정명환, 같은 책, 64쪽에서 재인용

[6] 같은 책, 64~65.

[7] Jean-Paul Sartre, 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Paris: Les Éditions Nagel, 1966{1945}, p.17; 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방곤 옮김, 문예출판사, 1999, 13.

[8] 언젠가 장-루이 크레티엥의 저서들을 통해 그를 본격적으로 소개할 기회를 바라겠으나, 오늘은 그 핵심을 명료히 요약하고 있는 다음 글에서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카미유 리키에 Camille Riquier, 「장-루이 크레티엥 혹은 도타운 말 Jean-Louis Chrétien ou la parole cordiale, 『비평 Critique No 790, 2013.03, pp.196-211.

[9] 『현대시』 235, 2009.07. 이 특집에는 박인기, 조재룡, 장철환 세 평론가가 참여하였다. 필자의 서문, 「한국시의 리듬이 탈옥할 순간이 왔다」는 졸저, 『문신공방 셋 : 몽롱Mon Non주점과 마농Ma Non의 샘』(역락, 2019)에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