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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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산문읽기

『보들레르의 수첩』

비평쟁이 괴리 2011. 11. 13. 15:39

이건수 교수가 편역한 보들레르의 수첩(문학과지성사, 2011)여는 글문학청년들에게 주는 충고이다. 이 글 안에 두고 음미할만한 대목이 있어서 적어둔다.

 

내가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 중 여럿은 외젠 쉬, 폴 페발 등 요즘 활동하는 산문가들이 최근에 얻은 명성에 대해 분노를 터뜨린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비록 경박할지언정 나름대로 재능이 존재한다. 내 친구들의 분노는 우스꽝스럽거나 거의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같이 화내는 것은 시간 낭비이며, 세상사 중에서 가장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심혈을 기울여 완벽한 형태를 갖춘 순수문학이 유행을 타는 대중문학보다 우월한가 어떤가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다. 그 답은 적어도 나에게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하지만 이 답 또한 반쯤만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터인데, 외젠 쉬가 자신의 장르 안에서 보여준 재능을 당신은 스스로 속하기를 원하는 문학 장르 속에서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방법들을 동원하여 그만큼의 흥미진진한 관심을 불러일으켜보라. 정반대의 방향에서 그와 유사하거나 그보다 나은 역량을 소유해보라. 그와 비슷한 집중력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힘을 두 배세 배네 배까지 증가시켜보라. 부르주아들을 욕할 권리가 당신에겐 없다. 왜냐하면 부르주아들은 당신 편을 틀 테니까. 그 정도까지 승리하리라는 희망을 갖자! 왜냐하면 능력이 지고의 정의라는 사실만이 언제나 진리이니까.”(12)

 

이렇게 거침없이 말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보들레르가 썼다니까 용납될 수 있는 뻔뻔함 같은 게 보인다. 아니다, 이런 판단은 시대착오적이다. 당시의 보들레르는 우리가 지금 추앙하는 보들레르가 아니었다. 게다가 역자의 해설을 읽어 보니, 보들레르가 이 글을 쓴 때는 겨우 25, “제대로 된 시 작품이라고는 지난해에 발표한 열대 식민지 태생의 어느 귀부인에게단 한 편만이 있을 뿐”(102)인 시절이었다. 그러니, ‘문학청년들에게 건네는 그의 충고는 실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 있었다고 해야 하리라.

그러니 오로지 저 말의 진심을 읽어야 한다. 시오랑Cioran의 능갈맞은 야유에 비하면, 속을 틔어주는 바람을 몰고오는 보들레르의 이 넌덕스러운 태도가 그 모습 그대로 들려주는 속내를. 허심탄회라는 말로 우리가 흔히 지칭하는 그런 태도의 씩씩함을 즐기며. 또한 이 명백한 단순성 속에 숨어 있는 미묘함은 어떠한가? 외젠 쉬(Eugène Sue) 등을 요즘 활동하는 산문가라는 은근히 경시하는 듯 하는 규정으로 두르는 것이며, “내가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친구들의 분노를 단번에 일축해버리는 일갈, 더 나아가, “부르주아들[] 당신 편을 들” “정도[]까지 승리하자는 저 능청, 그러나 능청에 흔히 수반되는 거짓말이 없이 오직 솔직한 토로로 들리는 말투.

나는 오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요란방정한 문화의 한 복판에서 문학판이 돌아가는 꼴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내가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사람들에게 이 말을 딱 그대로 들려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니, 사실은 차라리, 나 자신에게. 그가 이어서 건네는 다음 충고까지 곁들여서:

 

제아무리 건물이 아름답더라도 그 아름다움을 논하기 이전에 그것의 높이와 폭이 몇 미터인가가 우선이다. 평가가 어려운 분야인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무엇보다도 몇 줄을 채워넣는가가 중요하다. 이렇게 부른다고 해서 혜택받는 것도 없겠지만, 문학의 건축기사는 일단 어떤 가격에라도 팔아야만 하는 것이다.”(13) (2011.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