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언어의 새벽’ 고별사 본문

바람의 글

‘언어의 새벽’ 고별사

비평쟁이 괴리 2020. 9. 10. 12:09

아래 글은, ‘언어의 새벽 하이퍼텍스트와 문학을 공식행사로서 마감하면서 띄운 고별사였다.

 

안녕하십니까? 정과리입니다.

2001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오늘은 저에게 감회가 남다른 날입니다. ‘새로운 예술의 해’의 사업으로 시작한 이 사이트가 공식적인 마감을 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재작년 12월 경에 문화관광부의 위촉을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기발한 사업을 하게 될 줄이야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저 하이퍼텍스트와 문학을 결합시키는 일에 대한 막연한 암시와 충동만을 간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막상 “풀이 눕는다”라는, 아주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김수영의 한 시구이기 때문에 풍부한 환기력을 가졌을 지도 모른다는 역시 막연한 기대를 갖게 해 준, 한 문장을 화두로 삼아, 시-네트웍의 첫 전파를 쏘아 올렸을 때, 이 작업이 엄청난 잠재력을 품고 있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작업에 관심을 보여준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느낌을 가지셨으리라 믿습니다. 실로, 작년 4월 18일 이 사이트가 정식 오픈하였을 때 네티즌들께서 보여주신 관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동영상을 배제하고 순수한 문자들만으로 하이퍼텍스트 방식의 연결을 시도한 것은 인터넷상에서 거의 최초의 시도인 것 같습니다. 이와 비슷한 작업으로는, 제가 확인할 수 있었던 한계 내에서, Collaborative Sentence( http://math240.lehman.cuny.edu/sentence1.html)가 있습니다만, 이 곳은 문장들을 그냥 죽 이어나가는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Shockwave를 이용한 HERE (http://www.stedelijk.nl/capricorn/anderson)도 흥미로운 ‘시 발생기’ 사이트입니다만, 이곳은 무작위적인 단어 생성과 이어짐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의식적인 시 쓰기와 확산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사이트는 변별성을 갖습니다.

어찌 됐든 처음에 ‘상 이벤트’를 시행한 게 큰 자극의 동인이 되긴 했겠지만, 직접 시 쓰기에 참여한 분들의 숫자도 예상을 훨씬 추월했습니다. 문학 형식의 새로움을 모색하는 분들의 기대도 남달라서 그런 관심을 표명한 글들이 게시판에 자주 올라왔으며 저에게 사적으로 그런 말씀을 해주신 분들도 여럿 계셨습니다. 이렇게 성황을 이루게 된 것은, 우리 작업의 독특성 자체보다도 인터넷을 그저 즐기고 이득을 취하는 곳으로서 여기기보다는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이고 그곳에서 가능할 문학적 모험에 가담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분들의 적극적인 동참과 따뜻한 성원에 힘 입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곳을 방문하여 시 쓰기에 참여하신 수많은 네티즌들이 이 사이트의 실질적인 주인이라 하겠으며, 공식적인 책임자로서 지칭된 저는 그저 판을 차려 놓는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하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이트가 세간에 화제가 되어 저의 이름이 여러 차례 오르내리게 되었으니, 오직 부끄러울 따름이며, 이 자리를 빌어, 이 사이트를 실질적으로 가꾸어 주신 모든 네티즌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이 작업의 발단이 되었고 물리적인 지원을 제공해 준 ‘문화 관광부’ 및 ‘새로운 예술의 해’의 관계자 분들께도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저와 함께 ‘새로운 예술의 해’의 ‘문학분과’에서 활동하신 문학분과위원들의 진지하고 세심한 조언도 우리 사이트가 산뜻하게 출발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작업의 의의에 십분 공감하여, 다른 문제는 전혀 개의치 찮고, 시스템 개발에 선뜻 응해주신 고려대학교 컴퓨터 공학과 김창헌 교수(내 오랜 친구인 김창헌 교수는 터무니없이 적은 개발비용을 순수한 우정으로 기꺼이 받아 주었습니다)의 그래픽스 연구실, 특히 프로그래밍을 주도한 이정 대학원생(현 한림대학 교수- 2020년 부기), 디자인을 담당해준 ‘한빛네트’와 그래픽 디자이너 차명희 선생이 없었더라면 이 사이트는 아예 열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서버를 제공해주신 삼보정보시스템(TG 인포넷)에는 특별한 감사를 표해야 할 것입니다. 마당을 빌려주셨을 뿐 아니라 소중한 물질적 지원을 해주셔서 글을 써주신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원고료를 지불해드릴 수가 있었고 여러 차례 알찬 이벤트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온갖 잡무를 성실히 처리해 준 관리자 정재혁 씨의 수고에도 치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재혁 씨의 부지런하고 기민한 점검과 대응은 이 사이트를 항상 최적의 분위기에 놓이도록 하였습니다.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깊이 고개 숙여 큰 절을 드립니다.

 

성황이었다고는 하지만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너무나 명백한 결함들도 많았고 보이지 않는 실수도 많았습니다. 이 점들은 궁극적으로는 문학과 하이퍼텍스트의 만남을 방해하는, 복합적인 장애물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것을 다시 되새기는 것은 앞으로 이곳 뿐만 아니라 ‘문학과 하이퍼텍스트의 관계’를 탐구하는 다른 곳에서의 시도들에도 중요한 참고 사항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선, 아직까지 한국의 문인들이 인터넷에 익숙치 못하다는 점은 이 사이트의 문학적 질을 제고하는 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저의 애초의 의도는 기성 문인과 아마추어들의 글을 공평하게 잇고 꿰어서, 말의 바른 의미에서의 가장 민주적인 문학 교류를 꾀해보자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인들 중에는, 연령이 높을수록 인터넷을 사용할 줄 모르는 분들이 많아서, 이곳에 글을 주시고도 아예 방문조차 하지 못한 분들이 상당수였습니다. 이 문제는 아마도 시일이 지나면서 차츰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둘째, 상호 이질적인 두 문화 양식에 대한 이해의 부족입니다. 대부분의 글들은 ‘연결’의 기능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글들이 ‘문학’의 형식은 충족시켰지만 ‘하이퍼텍스트’의 형식은 실질적으로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사이트의 목적은 그 두개의 형식을 함께 충족시키려는 노력 가운데 새로운 문학 형태의 발생 여부를 탐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아직은 소망의 차원에만 있는 듯 합니다.

셋째, 창작과 독서 사이의 대화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시를 쓰는 분들은 많았지만 각 글에 대한 감상을 피력하는 글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즉석비평’ 란을 마련하여 대화를 부추기고자 하였으나 좋은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이 점은, 구현 절차에서의 문제점도 한 몫 하였으리라 짐작됩니다. 많은 분들이 즉석 비평이 있는지 조차 몰랐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넷 상에서 하는 작업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자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제가 이번에 깨달은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워낙 문학은 펜과 종이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인터넷 상에서는 우선 기획을 해야 하고, 예산을 수립하고 조달해야 하며, 그 한계 내에서 기획을 집행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한계의 문제를 넘어서, 문학 특유의 순발력(‘자유로운 상상력’과 ‘순간의 직관’으로 나타나는)을 발휘하는 데 결정적인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이 문제는 사업가와 문학인의 자질을 동시에 요구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꽤 까다로운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새로운 예술의 해’의 공식 사업으로서의 ‘언어의 새벽 - 하이퍼텍스트와 문학’은 어제로 마감을 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는 솔직히 말씀 드려 저 자신도 잘 모릅니다. 만만치 않은 여러 문제들이 여럿 앞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작업에 기대를 걸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라도 저는 힘이 닿는 한 계속 가 보려 합니다. 어쨌든 제가 첫 돌을 놓은 만큼 제가 스스로 짊어져야 할 책임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이트가 계속 유지될 경우, 형태 상의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에 대해서는 이미 게시판을 통해 간략히 알려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마무리하는 장소이니 만큼 다시 한번 되풀이 해 보겠습니다.

첫째, 앞으로 이 사이트는 회원제로 운영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디지털 공간의 바람직한 윤리학에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한국의 소위 ‘게시판’ 문화는 무분별한 언어 과잉과 폭력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이미 수년 전에 한 여학생의 자살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한국 디지털 공간의 폭력적 익명 문화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아주 괴상한 문화입니다. 이 괴상한 문화를 가능케 한 것은 디지털 공간의 존재론적 특성에 대해 성찰할 능력과 여유를 갖지 못한 기성 세대의 무지와 디지털 공간을 오직 상업적 이윤의 획득의 장소로서만 여기려 한 정보사회의 주도자들의 이기적 욕망, 그리고 유별나게 큰 한국인 특유의 심리적 평등주의와 실제로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한국의 사회질서 사이의 간극이 자아 낸 여러 가지 형태의 원한과 욕망이 위험부담없이 분출될 장소로서 맞춤한 이 익명 공간의 구조적 조건이라는 세 박자가 맞아 떨어진 결과입니다. 저는 이 이러한 폭력적 익명 문화 밑에 도사린 것은 만인이 평등해야 한다는 신념으로서의 익명주의(탈개인주의)가 아니라 개인적 감정을 방해 없이 표출하고자 하는 비틀린 나르시시즘이라고 생각하며, 이 비틀린 나르시시즘의 창궐을 막고 바람직한 대화 공간으로서 디지털 공간을 재정립하고자 한다면, 책임의 윤리를 도입하는 게 긴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회원제는 그 책임의 윤리를 실행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회원제는 단순히 책임을 묻는 기능만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곳은 무엇보다도 문학 작품을 올리고 감상하는 곳입니다. 현재까지의 문화적 환경 내에서는 문학 작품은 개인의 창조물로서 보호되어야 합니다. 회원제는 그 기능을 맡아줄 수 있습니다. 게다가, 회원제는 이곳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실질적인 상호 대화를 가능케 합니다.

둘째, 제가 구상하고 있는 작업으로서 우선 당장은, 시를 이어 붙여 열어 나가는 현재의 메뉴 외에, ‘디지털 허균’이라는 이름의 피카레스크식 하이퍼텍스트 콩트를 추가로 시도하게 될 것입니다. ‘디지털 허균’의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공고를 통해 알려드린 바 있으며, 모태 콩트에 대해서도 공모한 바가 있습니다. 모태 콩트가 될 두 편의 콩트 중 기성문인에 대한 청탁은 박성원 씨로 결정되었으며 이미 원고가 들어 와 대기중인 상태입니다. 공모를 통해 선정할 콩트는 유일하게 응모하신 ‘무차별’님의 작품이 적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모태 콩트로 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디지털 허균’은 현재 시스템 개발 중에 있으며, 조건이 갖추어지는 대로 바로 시작될 것입니다. 아울러, 여건이 허락한다면, 문학 강좌 및 문학 Q&A란을 신설해 기성문인들과 일반 독자들의 만남을 꾀하고 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심화시키는 장소로 만들어 볼까 궁리 중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이트의 문화적 위치(statut)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애초에 이 사이트는 문학과 하이퍼텍스트의 관계를 탐구하는 실험의 장소로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사이트가 순수 문학을 디지털 공간에 올리는 곳도 아니지만, 문학과 하이퍼텍스트의 결합을 미리 상정한 상태에서 도출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적 장르를 실험하는 장소도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순수문학을 디지털 공간에 올리는 것은 기존 문학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되 장소만을 인터넷 공간으로 확대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시도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으나 문학적 형태 및 존재 양식의 변모를 실험코자 하는 이곳의 의도와는 다르다 하겠습니다. 문학과 하이퍼텍스트의 결합을 미리 가정한 상태에서 실험될 새로운 문화적 장르로서는 다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문학과 다른 예술 양식 간의 결합을 꾀하는 경우입니다. 이 시도는 궁극적으로 다매체 예술을 낳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글쓰기의 가능성을 확대해서 하이퍼텍스트의 영역 안으로 그것을 흡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이 아마도 미국의 몇몇 대학들, 그리고 국내에서는 류현주 선생이 작업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하이퍼문학’에 해당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사이트가 하이퍼텍스트와 문학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목적을 두되 두 문화의 결합을 미리 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둘 사이의 만남이 가져올 결과를 가능성이 충만한 공백으로 두고자 하는 의도와, 다른 한편으로, 여전히 중심을 문학에 놓고자 하는, 언뜻 보아 전자와 약간 어긋나 보이는, 의도를 동시에 반영하고 있습니다. 둘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면서도 문학을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기존 문학의 형식 및 존재 양식은 변할 수 있으나 그것의 어떤 본성은 여전히 남을 수 있고 또 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서 입니다. 문학의 본성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얘기하셨습니다만, 대충 상상과 반성 둘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상상의 기능은 디지털 방식의 여러 문화들(가령, 특수 효과의 영화들)이 훨씬 앞지르고 있으며 그 점을 감안한다면 문학에는 이제 ‘반성’의 본성만이 남은 듯 합니다. 그러나 문학이 상상력을 포기한다는 것은 말이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문학의 본성을 상상과 반성 둘로 요약할 때 빠뜨렸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둘 사이의 관계입니다. 어떻게 상상의 무한한 열림이 도저한 내적 침잠(반성)으로 귀의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문학의 상상은 결코 도달점을 찾을 수 없는 상상, 즉 의도와 결과가 영원한 불일치의 상태로 존재하는 상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날의 학자들이 ‘아이러니’ 혹은 ‘숭고성’이라고 불렀던 그 숙명적 불일치의 순간, 혹은 미도달의 지대가 문학을 통해 환기된다는 것, 그것은 궁극적으로 문학이 유한자로서의 인간의 활동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유한자로서의 숙명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수락하고, 고뇌하면서, 유한자의 한계를 넘어서는 모든 가능성을 실험해보고자 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예술적 활동이고, 줄글의 한계에 갇힌 문학의 최종적인 본성이라 하겠습니다.

사설이 길어졌습니다만, 이 사이트가 문학의 본성을 지키면서 문학과 하이퍼텍스트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하는 이면에는 이런 저의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공간의 장벽을 무너뜨리면서 인간의 능력을 무한의 높이로 끌어올리고 있는(혹은 그렇다고 주장되는) 디지털 문명에 대해 문학이 저의 본성에 근거해 무언가를 할 수 있으며, 해야만 한다는 생각과 닿아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바로 그 ‘무언가’를 디지털 문명에 대해 하는 사이트로서 존재할 것입니다. 그것이 문학과 하이퍼텍스트의 결합을 미리 가정한 상태에서의 새로운 장르의 문화를 추구하지 않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벌써 신사년의 첫 날이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쓰기 시작한 것이,다른 일들에 기웃거리면서, 쉬엄쉬엄 하다 보니 이렇게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곧 고요한 침묵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그 침묵의 시간은 언제나 항상 새로운 바뀜과 각오가 잉태하는 시간입니다. 세 번째 밀레니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선 이 사이트의 각오도 남다르다 할 것입니다. 그 동안 소중한 후원과 진지한 관심과 열렬한 동참 그리고 따뜻한 후원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여전한 관심을 보여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