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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새벽’ 2000년 6월 중간 보고

비평쟁이 괴리 2020. 9. 10. 12:03

아래 글은, ‘언어의 새벽 하이퍼텍스트와 문학6월 활동에 대한 보고 및 공지 글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정과리입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간 점검 및 6월의 작품 선정 소감을 이제야 올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6월의 진행상황

 

6월의 <언어의 새벽>은 전 달과 거의 비슷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진행되었습니다. 대략 2,000분이 방문하셔서 10,000여 쪽을 열어 보셨습니다. (정확한 통계를 잡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자동적으로 통계가 잡히는 알고리즘을 추가할까 합니다.) 그리고 5월 26일부터 6월 25일 사이에, 14분이 18편의 글을 올리셨습니다. 방문과 참여 사이의 격차가 지나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이 사이트는 참여에 비중을 더 크게 두는 곳인데, 그렇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마도 단 하나의 메뉴만으로 끌고 가다보니 의욕을 보이셨던 분들도 차츰 지루함을 느끼고 계신 듯합니다. 또한 글쓰기란 언제나 글읽기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창작과 비평이 같이 움직여야만 생동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즉석 비평>이라는 메뉴를 추가하였습니다만 현재의 <보기>에서는 각 글마다 고립되어 있어서 열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즉석 비평만을 따로 모아놓은 별도의 난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누군가 적극적으로 전담하는 분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자발적으로 그걸 맡아 할 분이 없다면 계획적으로라도 그래야 할 텐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직 넘어야 할 현실적인 한계들이 너무 많이 놓여 있습니다.

메뉴의 전반적인 개선 및 확대는 이미 공고해 드린 대로 지금 천천히 준비중에 있습니다. 생각보다 진행이 더디군요. 당초 예상으로는 6월까지 메뉴 개편안을 짜고 8월중에 새롭게 출발하려고 했습니다만 아직도 구상 단계에서 종종걸음을 치고 있습니다. 이 상상과 현실의 간극을 메워보려고 몇 가지 새로운 시도를 해본 게 그나마 위안을 줍니다. 우선, 하이퍼테스트와 문학의 관계를 우리보다 앞서 탐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해외(미국)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글과 우리의 사이트에 대한 비평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글쓰기에 참여한 문인들 중 일곱 분으로부터 경험담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는 정식으로 등단하지 않았지만 글쓰기에 열성적으로 참여해주신 네티즌들의 글을 받아볼 계획입니다. 곧 이 글들은 별도로 개설되는 비평란으로 옮길 것입니다. 덧붙여, 자발적으로 우리의 언어의 숲을 가로질러 간 경험을 비교적 소상히 적어 올리신 이애진씨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애진씨 뿐만 아니라, 그 동안 게시판에 좋은 의견을 올리신 분들에게도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요즘엔 숲의 가지 붙이기도 뜸하고 게시판도 한적해서 좀 쓸쓸하긴 합니다.

 

전사섭씨의 ‘이것은 문학이 아니다’에 대해

 

아마도 6월중에 새로 시도된 작업 중에 가장 흥미를 끈 것은 이 사이트에 대한 전사섭씨의 실제 비평이리라 짐작됩니다. 비판이 신랄하고 도발적이기 짝이 없어서 저를 포함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아리게 했습니다. 사실 저는 이 비판에 대해 다양한 반응이 나오기를, 그리하여, 그 반응을 통해서 활발한 대화가 오고 가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전사섭씨의 글에 대한 김종호씨의 직설적인 반론이 하나 올라왔을 뿐 그 외의 다른 의견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전사섭씨가, 저의 음험한(?) 의도를 눈치챘는지, 아니면, 생존 경쟁에 매진하고 계셔서인지 통 기척이 없군요.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자리를 통해 제 의견을 드리고자 합니다.

약간 현학적으로 <구분>과 <분류>를 구분하면서 논지를 개진하고 있는 전사섭씨의 비평은 대충, 문학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고도의 창작 능력을 가진 전문 문인들로 참여자를 제한하여 전위적인 실험으로 가던가, 아니면 대중적 참여의 폭을 넓히길 원한다면 현재의 메뉴 구조를 대폭 개방적인 방향으로 바꾸라는 양자택일에 대한 요구로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게시판에서 이미 많은 분들이 산발적으로 지적한 문제들로서 전사섭씨의 글이 그 문제점들을 잘 요약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에 대한 답변들이 또한 게시판에 있었습니다. 그것을 고려해주지 않은 것은 좀 아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사이트가 이제 겨우 태어난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미숙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이 곳은 이와 같은 지적들을 들으면서 계속 커나가야 할 것입니다. 둘째, 앞으로 메뉴가 전반적으로 개편되면, 우리의 실험을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해 볼 것입니다. 전문가들만의 실험, 문학애호가들만의 실험 및 양자를 만나게 하는 장 등 머리 속으로는 아주 다채로운 메뉴가 구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진적인 발전을 통해 우리는 문학과 하이펴텍스트의 관계를 직접 경험하고 탐구함으로써 새로운 문학적 양식의 가능성에까지 도달해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하이퍼텍스트라는 신종 문명 기제에 대한 강박관념이라기보다 오히려 과잉된 신화를 넘어서서 구체적으로 새 문명과 낡은 문화를 만나게 하는 방법에 대한 모색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6월의 작품

 

이미 공고해 드린 대로 6월의 작품으로, 김형정씨의 <풀이 눕는다...>, 불협화음님의 “너무나 가볍기만한...”, 이경아씨의 “손가락에 얹기에는...”, 주희영씨의 “벚꽃이 만개한 가지...”, 한경미씨의 “그 길을 따라...”를 뽑았습니다. 김형정씨의 작품은 풀을 인생살이에 범박하게 직유한 작품입니다. 문장이 단정하고 무리가 없다는 게 장점이자 약점입니다. 불협화음님의 작품은 바다의 어둠을 빛과의 상관관계 속에 재미있게 표현하였습니다. <빗줄기>를 함께 연상케 하는 <빛줄기>라는 표현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다만, 여섯 번째 행의 <그러지 아니하다>는 뜻도 모호하고 감각적인 울림도 없습니다. 무언가 표현하고자 했는데 형식을 못 얻은 건지, 아니면, 오기한 건지...? 이경아씨의 작품은 언뜻 보아 평범한 진술인데, 가만히 되풀이 해 읽어 보면, 여러가지를 한꺼번에 복잡하게 생각케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주희영씨의 글은 그 그로테스크함이 꽤 자극적입니다. 한경미씨의 짧은 문장은 그 자체로서는 단순한 글이지만, <따온 글>인 이제하 선생의 글과 함께 읽으면 꽤 신선한 울림을 가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