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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음악을 모르겠어요

비평쟁이 괴리 2021. 4. 9. 17:47

※  전북대학교 영문과의 이종민 교수가 올해 2월에 정년퇴임하였다. 윌리엄 블레이크 전공자인 이교수는 전주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훌륭한 사회활동을 많이 했는데, 그 폭이 넓었다. '북한 주민에게 식량보내기' 운동도 하고, '내 인생의 음악 편지'라는 수시로 음악을 소개해주는 메일링 봉사도 하였다. 그이가 정년 기념으로 책을 준비했는데, 그 동안 자신과 친분을 쌓아 온 사람들에게 '내 인생의 음악'을 쓰라고 '독촉'한 후, 보내온 글들을 모은 것이다. 나도 그와의 인연으로 한 꼭지 쓸 수밖에 없었는데, 오늘 오후에 출판본이 내게 배달되었다. 책 제목은 우리가 하려고 했던 그 거창한 일들 내 인생의 음악 편지』(이종민 엮음, ,걷는 사람, 2021.04)이다. 거기에 수록된 글을 블로그에 올린다. 

이종민 형이 음악을 잘 모르는 나에게 내 인생의 음악을 쓰라고 권하였다. 쓰려고 보니, 종민 형과의 첫 만남이 내게 일으킨 요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81년 훈련을 마치고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복무하기 시작한 게 7월이다. 환영 회식에서 이종민 중위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이 중위는 대학교 학번도 나보다 1년 선배이고 군대도 한 기 앞이다. 여기까지는 그냥 단순 정보이다. 이제부터는 다르다. 당시에는 회식을 하면 다들 노래 한 곡 씩 뽑기로 되어 있었다. 내가 뭘 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종민 중위가 자리에서 일어설 때 쇠공을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가 뽑은 노래는 판소리였다. 나는 책에서만 본 판소리를 실황중계로 직접 들었다. 그 시절에 TV에서 판소리 창이 간간이 방영되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 온 이후에 공부하고 술 먹느라고 바빠서, 또한 하숙집 주인 방에까지 염치없이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TV 볼 일은 거의 없었다. 청룡기 고교야구라면 모르겠으나 노래를 듣다니 말이 되나? 노래는 부르는 거지 듣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렇게 거드름을 피우던 나이였다.

하지만 판소리직청(直聽)은 엄청난 일이었다. 판소리는 연구서에 등장하는 고전 교양 품목이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의 문화적 불모성을 새삼 떠올리고 이종민 중위의 고향인 전주의 문화 수준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말에 결혼을 하고 신방을 차렸을 때 집사람이 전축을 가져왔으니, 나는 당장 진해 시내로 나가 판소리 LP판을 하나 사서 들어보았다. 나중에 제대를 하고 대학 선생이 되고 나서는, 고등학교 동창 방문판매원의 강청에 밀려, ‘뿌리깊은나무판소리5(LP, 악보 통합)과 함께 같은 출판사의 팔도소리까지 사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판소리에 적응하지 못했다. 여러 번 작심을 하고 들어보았으나 무엇보다 악보를 보지 않는 한 그 가사를 알아듣기 어려웠다는 게 문제였다. 그때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몰랐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말했듯이 모든 예술에 대한 안목은 교육의 산물이다. 부르디외가 무시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예술에 대한 안목이 무조건 계급적 편견에 따라 형성된 일종의 조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교육의 보편적 성격과 예술 본래의 해방 기능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들은 계급적 지반을 통해 형성된 예술에 대한 취향을 창작자/향수자로 하여금 스스로 교정하게 하여, 궁극적으로 인류와 생명의 공동선을 두텁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한다. 그것은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다. 나는 부유하지 않은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으나, 장래가 보장된 대학을 다녔고 다른 한편으론 나보다 가난한 서민들의 삶에 대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나의 예술적 안목도 엄청나게 변하고 넓어졌다. 지금 나는 나의 예술적 취향이 특정 계급에 속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런 판단에 의심을 보내는 분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에 대해서는 기꺼이 논쟁할 의향이 있다.

여하튼 훈련의 결과로 나는 지금 판소리를 꽤 알아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소리는 내 마음을 울리지 못했다. 지금 유일하게 흥얼거리는 건 춘향가사랑가대목일 뿐이다. 그 점에서 나는 이종민 형이 내게 제공한 신 지식을 적절히 내 몸 안으로 동화시키지 못한 것이다. 대신 나는 내 태생이 인도하는 노래들에 더 이끌렸다가 내 공부가 가르쳐준 쪽으로 선회를 하게 되었다.

나는 내 환경에 맞는 가난한 친구들 및 주변 사람들로부터 노래를 배웠다. 중학생 때는 거의 음악을 알지 못했고(음악시간이 있었으나, 충분한 설명도 없이 선생님이 틀고 자신만 홀로 감상하는 클래식을 내가 어떻게 느낄 수 있었겠는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야 노래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축구시합이 끝나고 자장면을 먹으러 가면 어김없이 젓가락으로 밥상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러대곤 하는 풍토였으니까 말이다. 거기서 내가 배운 노래는 나훈아의 고향역, 남진의 찔레꽃, 김추자의 님은 먼곳에, 펄시스터즈의 늦기 전에, 장현의 미련,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장희의 그건 너, 송창식의 왜 불러. 고래사냥, 신중현의 미인등이었다. 그것이 고등학교와 대학 초년생 때 내가 사람 모인 자리에서 부른 노래들이다.

대학 초년까지 포함시킨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대학교에 합격하고 처음 서울에 와서 음악에 관해 내가 받은 충격은 이 대학생이란 자들이 팝송을 밤낮으로 듣는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팝송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였다. 우리 때의 영어 교육은 문법과 독해 교육이었기 때문에 나는 영어를 듣거나 말하는 능력이 없었고 당연히 팝송의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가사를 모르는 음악을 듣는 걸 나는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서울 학생들이 나보다 영어를 월등 잘한다는 사실에 지독한 열등감에 사로잡히곤 했다(나중에 그들도 가사를 모른 채로 팝송을 들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더 경악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 하는 놀람이었다.) 사실 고등학교 동기들 중에도 이미 팝송을 즐겨 듣는 학우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60년대의 미국 청년문화에 일찌감치 동화되어 기타를 치면서 팝송을 부르는 학생들이 있었다(게다가 지금은 돌아가신 이만기 선생님은 음악시간에 기타 연주를 가르쳤던 것이다). 젊은 태양을 작곡한 박광주가 내 고등학교 동창이니, 어쩌면 새로운 서구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나같은 촌놈은 오히려 소수라고 말해야 정확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내 심장에 한국가요만이 흘러가는 세월은 무한정 지속될 듯이 보였다. 대학교 3학년 때인가 산울림이라는 그룹이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라는 아주 이상한 곡조의 음악을 들고 나와 새 바람을 일으켰고 나 또한 꽤 매료되었었는데, 곡조는 뽕짝과 너무나 달라도 가사는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원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면서 프랑스의 샹송에 접할 기회가 자연스럽게 많아졌다. 게다가 프랑스의 가수들은 당대의 문인, 철학자들과 매우 고상한 교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가수들의 노래는 모두 음률에 실린 철학이었다. 쥴리에트 그레코, 에디트 피아프, 이브 몽탕, 자크 브렐, 세르쥬 겡스부르, 조르쥬 브라센스, 조르쥬 무스타키 등의 노래를 그렇게 해서 배웠다. 특히 무스타키의 너무 늦었어요 Il est trop tard는 쉬웠기 때문에, 이브 몽탕의 고엽Les feuiles mortes은 가수의 음색에 끌려 외워서 술자리에서 가끔 부르곤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서적을 통해 로큰롤의 정치성을 읽는 한편, 주변의 몇몇 록큰롤 매니아들의 부추김에 힘입어, 밥 딜런으로부터 시작해 그쪽 가수들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비틀즈, 롤링 스톤즈, 레드 제플린, 재니스 조플린, 캣 스티븐스, 제퍼슨 에어플레인, 프랭크 자파, 핑크 플로이드 등의 노래를 사회 공부를 하는 기분으로 들었다. 이상하게도 로큰롤 이외의 청년 문화, 가령 존 바에즈 같은 포크 가스에게는 거의 끌리지 않았다. 공부하듯이 배웠다고 했지만 나는 의외로 로큰롤 노래에 깊이 빠지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군복무를 하던 진해에서 밤 11시에서 자정까지 하던 도병찬이라는 DJ의 음악방송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물론 클래식도 듣게 되었다. 특히 정명환 선생님 댁에 인사 드리러 갔다가, 선생님께서 늘 클래식을 틀어놓으시는 걸 보고, 모방 충동이 일어나 그때부터 의식적으로 클래식을 듣기 시작했다. 내가 비교적 끌렸던 것은 베토벤과 바흐였다. 그리고 무소로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은 그걸 록음악으로 변주한 에머슨, 레이크 앤 팔머의 노래 때문에,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Carrmina Burana는 그 가사로 인해 마음에 새긴 음악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클래식이 편해졌다. 그래서 지금은 그쪽으로만 듣는 편이다. 그러나 클래식의 문제는 내가 따라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오래 반복해서 듣는 건 거의 없다.

트로트만 알던 시골 촌놈이 음악에 대해 엄청 발전한 것 같지만, 모두 학습을 통해서였다. 그런 사정은 내가 깊이 공감했던 음악이 정말 있었는지 의심을 하게 만든다. 요컨대 이종민 형의 원고 청탁 주제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음악이 아닐까 싶은데, 나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 면구스럽다. 게다가 요즘은 어찌된 영문인지 나이가 들수록 하는 일이 더 많아져 음악은 틀어볼 엄두를 못내는 처지이다.

다만 내가 지금까지 제대로 불러보고 싶었으나 자주 실패한 노래가 하나 있었으니,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 그것으로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노래에 덤비려 하는 내 행동에 비추어, 그걸 내 인생의 음악이라고 할 건가? 아니면 슈바이처 박사가 말년의 병상에서 쉼없이 음악을 들으며 정말 아름다워!”를 외치시며 돌아가셨다고 해서 그걸 무척 부럽게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내 임종의 순간에 듣고 싶은 음악이 있다면 바흐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싶으니, 그이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내 인생의 음악이라고 정해버릴까나? 그도 아니면, 내가 요즘 듣는 게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이니, ‘내 인생의 음악은 무한 변화의 트랙을 돌고 있다고 하고, 그만큼 내 인생도 무한하다고 해야 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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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민 교수는 정년 퇴임하면서, 완주에 멋진 집을 짓고, 그의 대궐에서 형수의 거문고 연주를 벗삼아, 여생을 즐긴다고 한다. 그런 모습이 TV에 방영이 되었다. 마냥 부럽다. 정년을 축하하며 제가 살고 싶은 삶을 온전히 누리시고 계시니, 羨 '不亦樂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