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프랑시스 퐁쥬, 혹은 생의 흔적... 본문

울림의 글/언어의 국경 너머에서 만난 이 한 편의 시

프랑시스 퐁쥬, 혹은 생의 흔적...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3:24

프랑시스 퐁쥬, 혹은 생의 흔적얼룩자국오점반점구멍빈틈티눈……으로서의 사물들.

 

LA ROBE DES CHOSES

 

Une fois, si les objets perdent pour vous leur goût, observez alors, de parti pris, les insidieuses modifications apportées à leur surface par les sensationnels événements de ce, continuels frémissements de nappes, ces vibrations, ces buées, ces haleines, ces jeux de souffles, de pets légers.

Aimez ces compagnies de moustiques à l'abri des oiseaux sous des arbres proportionnés à votre taille, et leurs évolutions à votre hauteur.

Soyez émus de ces grandioses quoique délicats, de ces extraordinairement dramatiques quoique ordinairement inaperçus événements sensationnels, et changements à vue.

Mais l'explication par le soleil et par le vent, constamment présente à votre esprit, vous prive de beaucoup de surprises et de merveilles. Sous-bois, aucun de ces événements ne vous fait arrêter votre marche, ne vous plonge dans la stupéfaction de l'attention dramatique, tandis que l'apparition de la plus banale forme aussitôt vous saisit, l'irruption d'un oiseau par exemple.

Apprenez donc à considérer simplement le jour, c'est-à-dire, au-dessus des terres et de leurs objets, ces milliers d'ampoules ou fioles suspendues à un firmament, mais à toutes hauteurs et à toutes places, de sorte qu'au lieu de le montrer, elles le dissimulent. Et suivant les volontés ou caprices de quelque puissant souffleur en scène, ou peut-être les coups de vent, ceux que l'on sent aux joues et ceux que l'on ne sent pas, elles s'éteignent ou se rallument, et revêtent le spectateur en même temps que le spectacle de robes changeant selon l'heure et le lieu.

 

 

사물들의 옷차림

 

문득, 당신이 보기에 사물들이 맛이 갔다면, 그때는 단호히 사물들의 표면에 일어나는 은밀한 변형을 주시하시라. 구름이 흘러가는 데 따라, 대낮의 전구더미들이 꺼졌다 켜졌다 하는 데 따라 햇빛과 바람의 야릇한 사건들이 야기한 변형을, 저 빛자락들의 끊임없는 떨림을, 저 파동들, 저 수증기, 저 입김들, 저 호흡운동들, 은근한 방귀 놀이들을.

당신의 키에 맞춤한 나무들 아래 새들을 피해 날아온 저 모기 친구들을 사랑하시라. 그리고 당신의 키가 커짐에 따라 그들도 진화하는 것을.

이 미묘하지만 엄청난, 통상 보이지 않으나 유별나게 드라마틱한 이 야릇한 사건들에 감동 먹으시라, 불현듯 눈앞에 또렷해진 변화들에.

그러나 햇빛과 바람으로 설명하는 것은 당신의 머리에 늘상 들어 있는 것이라서 당신에게서 많은 놀람들과 경이들을 빼앗는다. 작은 숲 속에서는 이런 사건들은 당신의 산책을 멈추게 하지도 않으며, 당신을 넋 나간 극적 긴장 속으로 빠뜨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장 진부한 형태의 출현이 단박에 당신을 사로잡곤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새가 난데없이 날아드는 경우 말이다.

그러니, 그저 한낮을 관찰하는 법을 배우시라. 다시 말해, 대지들과 그 물상들 위로 하나의 창공에 매달린, 그러나 어느 높이에나 어느 장소에나 달려 있는 수천의 전구들 혹은 플라스크들을. 그래서 그것들이 대낮을 드러내는 대신에 감추는 것을. 그리고 어떤 힘센 입김꾼이 등장해, 혹은 어쩌면 갑자기 불어온 바람일 수도 있겠으나, 힘 좀 쓰거나 변덕을 부릴 때, 뺨에 느껴졌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그 바람들이 꺼졌다 다시 불붙었다 하면서,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화하는 옷자락들의 장관(壯觀)이 되는 동시에 그걸 보는 자가 되기도 하는 것을.

 

* 프랑시스 퐁쥬 Francis Ponge(1899-1988)의 플레이야드Pléiade 전집판이 지난 해 말에 완간되었다. 그래서 새삼 그를 추억한다. “사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경구를 남겼으며, 따라서 무엇보다도 사물의 시인으로 알려진 퐁쥬는 그와 거의 비슷한 시대에 문학적 평가를 받은 누보-로망시에들과 유사한 동판 위에서 해석되어 왔다. 누보-로망시에들의 문학적 실천이 근대 부르주아 사회가 만연시킨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부정이고 따라서 그들의 문학적 지향이 스스로에 의해 사물화chosification’라고 명명되었다는 점에 비춰본다면, 사물의 시인 퐁쥬를 20세기 중후반의 중요한 이념적이고 문학적인 변혁 운동에 연관시키는 해석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플레이야드 판을 편집하고 서문을 쓴 베르나르 뵈뇨Bernard Beugnot는 이 사물주의적 해석에 반대하여 퐁쥬의 시 모든 곳에는, 그가 인간의 고유한 개념은 무엇인가? 말과 도덕이다라고 말했듯이, 세상의 실존적 체험과 윤리적 태도가 배어 있다고 말함으로써 퐁쥬 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문을 연다.

이 새 문을 열고 나가 최초로 만나는 이정표에는 현기증이라는 단어가 있다. , 그가 사물들의 묘사에 매달린 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번잡함, 혼란, 무질서, 더러움)을 말로 표현할 때 생기는 불편한 감정이 야기한 현기증의 결과라는 것이다. 왜 볼편한 감정이 생기는 것일까? 왜냐하면, 말하고 나면 필경 후회하고 말게 될 뿐만 아니라 후회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한편으로, 그 말 자체는 일시성 속에 갇혀 고갈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구렁에 빠졌다는 그러한 불편한 감정이 퐁쥬적 글쓰기의 원천이 된다. 퐁쥬의 말을 직접 들어 보면 이렇다. “이러한 지점에 난처하게 섰을 때, 자신의 왼편에 매순간 푹푹 빠지는 일종의 심연이 있을 때, 절벽에 다다라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본능적으로 그는 가장 가까운 주변을 응시하게 된다.”

이 말을 받아서 뵈뇨는 이렇게 적는다: “사물들의 묘사는, 독창성에 대한 관심이 부추긴 진부한 시적 장치 혹은 어떤 시선의 객관성에 대한 탐구[이 표현은 누보-로망시에들에게 붙여진 에피테트의 하나였다-옮긴 이]가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그것은 현기증, 그리고, 퐁쥬가 때때로 상상력의 결핍이라고 명명했던 것에 대한 이중의 대답으로서, 인간과 세계의 화해를 위한 조인이며, 재적응의 작업이다. 이것은 사물이라는 용어가 모호성과 오해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 용어의 외연은 통상적인 의미의 경계를 성큼 뛰어넘는다. 왜냐하면 사물들의 편에 서기 Parti pris des choses[1942, 퐁쥬의 초기 시편 모음. 옮긴 이] 때부터 이미 [……] 사물은 인간존재, 동물들, 풍경들뿐만 아니라, 프랑수아 모리악이 조롱했던 과일바구니에 한정되지 않고, 전화기, 물항아리에 이르는 사회적 물건들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과 꽃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묘사가 상상의 도약판의 역할을 하면서 상상체계를 고갈시키지 않는, 그런 상상체계를 펼치는 데 특별히 유용한 장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이라는 용어를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이해하는 게 좋을 것이다./또한 이로부터, 그가 달팽이들Escargots의 말미에서 기술한, 언어적 실천을 통한 목표는 인간이다라는 휴머니즘의 표명을 새삼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 소개된 시는, 위대한 모음Grand Recueil(1961, Gallimard)의 세번째 권인 단편들Pièces에 수록된 것으로서, 워낙 씌어진 때는 1926년이다. 따라서 사물들의 편에 서기와 같은 의미론적 자장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시의 문자적 의미는, 시의 화자가 숲 속을, 그것도 숲 속의 작은 숲 속을 거닐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있으면, 쉽게 해독될 수 있다. 숲 속에서 나뭇가지들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다가 사라지고 또는 그 틈새로 수직으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들과 그 햇빛이 비추어 밝아진 공간은 말 그대로 대낮의 전구들이고 플라스크이다. 이 시의 묘미는 이 전구들이 구름이 지나가면서 혹은 바람에 따라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꺼졌다 켜졌다 하거나 슬며시 장소를 옮겨 놓는 미묘한 움직임들의 끝없음, 우발성, 늦은 깨달음 등을 음미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전언은 그러한 움직임을 인과론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숲 속의 자발적인 사건으로서 느끼고 동참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2003.01.17.; 발표: 현대시2003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