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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언어의 국경 너머에서 만난 이 한 편의 시

다중 실존자 페소아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3:21

 

Le Gardeur de troupeaux, "Poème 1"

 

Je n'ai jamais gardé de troupeaux,

Mais c'est tout comme si j'en avais gardé.

Mon âme est comme un berger,

Elle connaît le vent et le soleil

Et elle va guidée par la main des Saisons

Toute à suivre et à regarder.

La paix entière de la Nature sans personne

Vient s'asseoir à côté de moi.

Mais moi je demeure triste comme un coucher de soleil

Selon notre imagination,

Quand l'air fraîchit tout au fond de la plaine

Et que l'on sent que la nuit est entrée

Comme un papillon par la fenêtre.

 

Mais ma tristesse est tranquillité

Parce qu'elle est naturelle et juste

Et qu'elle est ce qui doit se tenir dans l'âme

Dès lors qu'elle pense qu'elle existe

Et que les mains cueillent des fleurs à son insu.

 

Comme un bruissement de sonnailles

Par-delà le tournant de la route,

Mes pensées sont contentes.

Il y a que j'ai mal de les savoir contentes,

Parce que, si je ne le savais pas,

Au lieu d'être contentes et tristes,

Elles seraient joyeuses et contentes.

Penser gêne autant que marcher sous la pluie

Lorsque le vent s'accroît et que la pluie semble tomber plus fort.

 

Je n'ai pas plus d'ambitions que de désirs.

Être poète n'est pas une ambition pour moi.

C'est ma façon d'être tout seul.

 

Et si je désire parfois,

Pure imagination, être tendre agnelet

(Ou bien le troupeau tout entier

Afin d'aller éparpillé sur tout le coteau

En étant plus d'une chose heureuse en même temps),

L'unique raison en est que je ressens ce que j'écris au coucher du soleil,

Ou lorsqu'un nuage passe sa main par-dessus la lumière

Et qu'un silence court et fuit à travers les herbes.

 

Quand je m'assois écrivant des vers

Ou que, me promenant par les chemins et les sentiers,

J'écris des vers sur du papier qui se trouve dans ma pensée,

Je me sens une houlette dans les mains

Et je vois quelque silhouette de moi-même

Au sommet d'une colline

Regarder mon troupeau et voir mes idées,

Ou regarder mes idées et voir mon troupeau,

Et sourire vaguement comme qui ne comprend pas ce qu'on dit

Et veut faire mine de comprendre.

 

Je salue tous ceux qui me liront, En leur tirant mon large chapeau

Quand ils me voient sur le pas de ma porte

Dès que la diligence se dresse sur la crête de la colline.

Je les salue et leur souhaite le soleil,

Et la pluie, quand la pluie est nécessaire,

Et que leurs maisons possèdent

Au coin d'une fenêtre ouverte

Une chaise de leur prédilection

Où ils puissent s'asseoir, tout en lisant mes vers.

Et à la lecture de mes vers puissent-ils penser

Que je suis une chose naturelle ——

Par exemple, l'arbre ancien

A l'ombre duquel encore enfants

Ils se laissaient tomber, floc !, fatigués de jouer,

Pour y essuyer la sueur de leur front brûlant

Sur la manche de leur tablier à rayures.

 

* traduit par Maria Antonia Câmara Manuel, Michel Chandeigne et Patrick Quillier

* in Pessoa, OEuvres poétiques, Pléiade/Gallimard, 2001


양떼를 치는 사람, ‘시 제 1

 

나는 한번도 양떼를 친 적이 없다.

그러나 내가 그리 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으리.

내 영혼은 목동과도 같으니,

내 영혼은 바람과 햇빛을 알고

그리고 사계절의 손에 인도되어

갈 데를 가고 볼 것을 본다.

인적 없는 자연의 가득한 평화가

내 곁에 와 앉는다.

그러나 나는 해질녘처럼 서러우니,

우리네 상상에 따르면

소쇄(瀟灑)한 대기가 온 벌판을 적시고

마치 한 마리 나비가 창문으로 날아 들어오듯

밤이 들어오는 게 느껴질 때.

 

하지만 나의 설움은 고즈넉함이라.

그것은 자연스럽고 알맞기 때문

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찰나

그것은 영혼 속에 맞춤히 깃들기 때문

그 모르게 두 손은 꽃을 따 모으고 있기 때문.

 

길이 굽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짤랑대는 방울소리처럼

내 생각들은 자족한다.

나는 그것들의 자족함을 알고 있기가 힘들어진다.

왜냐면 만일 내가 그것을 모른다면

그것들은 자족하고 설운 대신에

쾌활히 만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한다는 건, 빗속을 거니는 것만큼이나 거북살스럽다,

바람은 거세지고 빗방울은 굵어질 때.

 

나는 야망도 욕망도 없다.

시인이 된다는 건 내게 야망이 아니다.

그것은 홀로 살아가는 내 방식이다.

 

그리고 이따금 내가 욕망한다면, 가령

순수한 상상을, 부드러운 어린 양이 되기를

(또는 양떼 전체가 되기를,

경사면 위에 가득 흩어져

동시에 여러 행복한 것들이 되기 위해) 욕망한다면,

그 유일한 이유는 내가 해질녘의 글쓰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구름 한 점이 빛살 위로 손을 내밀고

침묵 하나가 숲을 가로질러 달아날 때의 글쓰기를.

 

내가 앉아서 시를 쓸 때나

혹은 길들과 오솔길을 산보하면서

머리 속의 종이 위에 시를 적을 때

나는 양치기의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본다, 나의 실루엣이

언덕 꼭대기에서

나의 양떼를 응시하며 나의 시상(詩想)들을 보거나

나의 시상들을 응시하며 나의 양떼를 보는 것을,

그리고 막연히 미소짓는 것을, 마치 제가 무얼 말하는 지

모르면서 다 안다는 듯 표정하려는 이처럼.

 

나는 나를 읽을 모든 이들에게

내 커다란 모자를 벗어 인사한다,

언덕 능선 위로 역마차가 모습을 드러내는 때에 맞추어

내 집 문간 위로 내가 나오는 걸 그들이 볼 때.

나는 인사하며 그들에게 햇볕이 비추어주기를 빈다.

필요하다면 비가 내리기를.

그리고 그들의 집, 열린 창의 구석에

특별히 좋아하는 의자 하나를 가지고 있어서

앉은 채로 내 시를 읽을 수 있기를.

또한 내 시를 읽다가 그들이

내가 자연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를.

이를테면, 오래된 나무와도 같아서

놀기에 지친 아이들이, 폴록!, 그 그늘 아래 뛰어들어

빗살무늬 앞치마의 소매로

그들의 불타는 이마의 땀을 훔칠 수 있기를.

 

* 포루투갈의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Pessoa, 1887~1935)는 여러 개의 인생을 한 몸으로 산 사람이다. 그가 죽기 직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그는 191438, “그의 내부에서 그의 주인이 솟아났다!”는 것을 안다. 그 이후 그는 세 번의 필명으로 시를 쓴다. , 그는 세 번 태어나고 죽는다. 첫번째는 알베르토 카에이로(Alberto Caeiro)라는 이름으로, 오늘 소개하는 양떼를 치는 사람을 쓴다. “젊어서 죽은이 사람의 두 제자, 리카르도 레이스(Ricardo Reis)와 알바로 드 캄포스(Alvaro de Campos)가 연이어 태어나고 사라진다. 카에이로는 이교도이고 유물론자이다. 그러나 그의 유물론은 오직 정신으로부터만 태어난 것이다. 브라질의 의사 레이스는 카에이로의 유물론적 이교를 더욱 섬세하게 다듬는다. 그는 스토아주의자(금욕주의자: 그가 공들여 다듬었다는 점에서)이며 동시에 쾌락주의자(이교도라는 점에서)이다. 그의 시는 라틴어 문학의 정신과 형태를 포르투갈어로 옮겨 놓는다. 레이스로부터 분수처럼솟아오른 알바로 드 캄포스는 엔지니어이고 감각주의자이며 분명 모던한 시인으로 월터 휘트먼을 흉내낸다. 그는 소란과 격노, 벌판의 대기의 호흡, 도취와 현기증, 극단의 인생, 모든 감각의 착란을 가져온다.

이들만이 아니다. 페르난도 페소아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방대한 시편들을 남겼으며, 또 포르투갈어로뿐만 아니라 영어로도 썼다. 그만큼 다양한 인생을 한꺼번에 산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동시적 다중 인생에 대해서는 복수적 실존이라는 견해와 끊임없이 불안정하고 안으로부터 붕괴하며 탈중심화되는 유일한 실존이라는 견해가 갈라져 있다.

* 오늘 소개하는 시편은 양떼를 치는 사람중 서두에 놓이는 시 제 1이다. 알베르토 카이에로의 이름으로 쓴 시인데, 이교도(반기독교인)이자 휴머니즘(인간중심주의로 번역할 수 있겠다)에 대한 반대자로서 시인은 시에서도 시를 장식하는 일체의 시적 문채(文彩)를 거부한다고, 프랑스어 플레이야드 판에서 서문을 쓴 로베르 브레숑(Robert Bréchon)은 말한다(문채는 인간에 의한 자연의 언어적 전유이다. 문채의 거부는 인간중심주의의 거부이다.) 그 점에서 시인은 이 시를 시의 산문이라고 명명하였다. 어쨌든 이 점에서 그는 시를 재현(mimesis)’의 문학과는 달리 내면의 즉각적 토로(diegesis)로서 이해하는 관점의 한 극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겠다. 브레숑의 설명을 들어보자: “시인이 진술의 단조로움을 선택한 것은, 그러나, 반시적인 것이 아니다. 목자인 시인은 시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는 시가 발가벗기를, 자연스럽기를, 고전적이거나 낭만적인 싸구려장식들을 떼어버리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시인 스스로 발가벗은 상태로, 자연스럽게, ‘포장되지 않은 채로’, 참된 모습으로 있을 수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의 반인간중심주의, 날 것 그대로의 삶에 향한 정신적물질적(언어로서의) 실천, 그리고 그 실천의 역설적 결과로서의 끝없이 변이하는 생이 그의 시를 오늘날 특별히 주목하게 만드는 요인일 것이다.

* 우리가 읽을 때 문채의 완전한 거부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가령, “마치 한 마리 나비가 창문으로 날아 들어오듯/밤이 들어오는 게 느껴질 때의 기발하고도 수일한 이미지는 문채의 효과가 아닌가? 또는 빗살무늬 앞치마의 소매로는 늘어진 나무가지들(혹은 그것들의 그림자)을 비유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시의 어법이 꽤 야릇하다는 것은 알 수가 있다. 생각들을 그대로 나열하는 듯해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진술들의 의미와 그 의미있는 진술들 사이의 관계가 범상치 않다. 특히, “내 영혼은 목동과도 같으니,/내 영혼은 바람과 햇빛을 알고/그리고 사계절의 손에 인도되어/갈 데를 가고 볼 것을 본다와 같은 투명한 진술, “나는 [...] 자족함을 알고 있기가 힘들어진다./왜냐면 만일 내가 그것을 모른다면/그것들은 자족하고 설운 대신에/쾌활히 만족할 것이기 때문이다와 같은 앎의 비애에 대한 깊은 인식, “그것은 자연스럽고 알맞기 때문/[……]/그것은 영혼 속에 맞춤히 깃들기 때문/그 모르게 두 손은 꽃을 따 모으고 있기 때문에서의 주체의 미묘한 뒤바꿈과 조응, “나의 양떼를 응시하며 나의 시상(詩想)들을 보거나/나의 시상들을 응시하며 나의 양떼를 보는 것을에서의 응시와 봄의 섬세한 구별과 그 긴장, 그리고 그러나 나는 해질녘처럼 서러우니이를테면, 오래된 나무와도 같아서/놀기에 지친 아이들이, 폴록!, 그 그늘 아래 뛰어들어같은 맑고 두터운 이미지 등은 깊이 음미해 볼 대목이다.

(* 포루투갈어를 모르기 때문에 프랑스어판으로 읽었다. 원문 소개도 읽은 것으로 한다. 원문 소개는 프랑스 어를 아는 독자들은 더 정확하게 시를 음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당연히 있을 오역에 대한 질정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쓴날: 2002.11.17, 발표: 현대시20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