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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스 카바피의 「야만인을 기다리며」 본문

울림의 글/언어의 국경 너머에서 만난 이 한 편의 시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의 「야만인을 기다리며」

비평쟁이 괴리 2011. 8. 17. 06:26

문명과 야만의 유착을 기록하다

 

콘스탄티노스 카바피(Κωνσταντίνος Π. Καβάφης)야만인을 기다리며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즈음이면 아테네 올림픽의 함성이 멍멍한 소음이 되어 귓가를 어지럽히고 있을 것이다. 모천으로 회귀한 행사이니만큼 관심이 각별할 게 인지상정이리라. 그러나 내 기억엔 한 공영 TV 방송에서 그리스 영화 한편을 특별 상영하고 몇몇 신문들이 고대 올림픽의 형식에 대해 간단한 정보제공기사를 낸 것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미디어와 한국인들은 그리스에 대해 어떤 것도 알려 하지 않았다. 그곳이 뜀뛰기와 씨름대회가 있었던 자리일 뿐 아니라 서양 문화와 서양 사상의 묘상(苗床)이었는 데도 말이다. 글쎄 한국의 어린이들이 그리스 신화를 워낙 열심히 읽는다니까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하지만 그리스인들의 삶에 대한 어떤 참조도 없이 천진한 호기심과 그것을 구매력으로 만들 줄 아는 문화산업이 절묘하게 만난 자리에서 채워진 이른바 보편적지식이 읽는 사람의 뇌리에서 몇 년의 수명을 가질 수가 있을까? 그것이 읽는 이의 가슴에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치명적인 자국을 남기기는 했을까?

이런 사정이니 이제 올림픽을 열게 되기까지 그리스인들이 겪은 고난의 근현대사를 알아볼 기회를 접하기란 하물며 언감생심이었다. 1453년 동로마제국의 수도이자 비잔틴 문화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이 오토만 제국에게 함락되면서부터 기나긴 피식민지의 역사 속에 들어간 그리스는 오토만 제국과 이집트의 지속적인 탄압과 침탈에 저항하면서 1829년 가까스로 독립을 하였지만, 그 이후에도 강대국들의 부단한 간섭에 의해서 전쟁과 내란과 독재 그리고 1,2차 세계대전, 게다가 좌우익의 갈등과 쿠데타 등 끝없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다가 1975년경에 와서야 비로소 민주정부를 정착시키게 된다. 서양의 모태가 되었던 그리스는 근대 이후, 많은 동구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서양 속의 비-서양으로 전락하였고 그리스인들은 서양인들의 메테크métèque’(고대 그리스에서 시민권을 갖지 못한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로 존재하는 운명에 처해졌던 것이다. 파리로 건너 온 그리스의 음유시인 조르쥬 무스타키(George Moustaki), 메테크의 목청으로, 방황하는 유대인의 목소리로, 그리스 목동의 입으로 / 그리고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날리는 내 머릿결로 / 말끔히 씻긴 내 두 눈으로 꿈꾸는 듯한 분위기를 잣지만 / 나 이제는 자주 꿈꾸지 못하네.”로 시작하는 유명한 샹송 메테크에서 연옥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구원의 기회도 갖지 못한” “영혼이라고 지칭한 것은 근현대사 속의 그리스인 모두의 개개의 영혼들을 통칭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 생각하면 한국과도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역사의 무게를 한국의 미디어는 신들의 나라신화의 도시니 하는 진부한 어휘 두어 개로 간단히 지워버리고 오로지 메달 경쟁에만 관음의 더듬이를 집중시켰다. 신과 신화와 상징들은 금동 메달의 상징적 교환가치를 치장하는 장식재로서 기능할 뿐이었다. 실로 가치는 상징을 소비한다는 현대의 명제는 아테네 올림픽에도 어김없이 관철되었다.

이 말은 현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지만, 그 점에서 시는 광고의 정반대임을 알아채고 그것을 시적 실천의 문제로 끌고 나간 시인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왜냐하면 문화산업적 부가가치가 문화의 등급을 그대로 결정짓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시를 광고와 같은 부류로 생각하는 사람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말에 과장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람은 무척 많을지라도 그들의 무의식은 슬그머니 가치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경우를 볼라치면 그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한 수에 놀랄 수도 있으리라. 그 역시 왜냐하면, 상징을 가치로 바꿔먹지 않는 방식으로 시를 쓰려고 한다면 곧 생산의 레일 위에 얼마간의 휴머니즘을 입히는것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야만 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스스로 가치를 상실한 존재로 추락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희귀한 소수 중에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있다면 내가 방금 읽은 그리스의 시인 카바피이다. 함께 읽어 보기로 하자.

 

 

야만인을 기다리며

 

―― 왜 우리가 이렇게 광장에 모인 거지?

야만인들이 오늘 도착한다나봐.

 

―― 그런데 왜 원로원에선 아무 일도 없는 거지?

원로원들은 법률을 제정하지 않고 뭘 기다리는 거지?

 

그건 야만인들이 오늘 도착할 게 틀림없기 때문이야.

원로원들이 어떤 법을 만들 수 있겠어?

야만인들이 와서 법을 공표하겠지.

 

―― 왜 황제는 이리도 일찍 일어났을까?

게다가 도시의 관문 위에 앉아 있는 건 뭐야?

옥좌까지 차려 놓고, 화려하기도 하군, 왕관도 썼네.

 

그건 야만인들이 오늘 도착할 게 틀림없기 때문이야.

그리고 황제는 그들의 족장을 맞이하려고

기다리는 걸세. 심지어 황제는

그에게 수여할 작위까지 준비했다네. 그것도

작위와 칭호가 여러 개라지?

 

―― 그런데 왜 오늘 두 명의 집정관과 총독들이 온 거지?

번쩍거리는 것 좀 보아, 자주색 토가를 입고 한껏 멋을 냈구나.

자수정들이 빼곡 박힌 팔찌들이며

최상급으로 세공된 에메랄드 반지는 또 뭐야?

황금과 순은을 멋지게 새겨 넣은

예전용 주장도 들었네.

그건 야만인들이 오늘 도착할 게 틀림없기 때문이야.

그런 것들이 야만인들을 홀리게 하거든.

 

―― 그런데 우리의 의젓한 수사학자들은 왜 안 오는 거지?

평소 같으면 어서 와서 덕담을 달고 한 말씀 가르쳐주어야 하는 거 아냐?

 

그건 야만인들이 오늘 도착할 게 틀림없기 때문이야.

그들은 미사여구에는 취미가 없거든.

 

―― 그런데 갑작스럽게도 웬 불안한 기운이지?

이 소란은 뭐고? (저 심각한 표정들 좀 보아!)

거리와 광장이 금세 텅 비어버리네.

모두가 근심스런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그건 해가 떨어졌는데도 야만인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야.

국경으로부터 돌아온 몇몇 사람들은 심지어

야만인이란 이제 없다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야만인 없이 어찌 살아야 할까?

어떤 점에서는 그 자들은 해결책이었는데.

 

번역은 불역판인 Constantin Cavafis, En attendant les barbares et autres poèmes, (traduit par Dominique Grandmont) Poésie/Gallimard, 2003을 원문으로 삼았다. 그리스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중역의 경우까지 포함해 번역과 원문을 함께 싣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나, 이번부터 그 원칙을 파기하기로 한다. 카바피의 영역본과 불역본을 대조하면서 그 분위기가 다른 부분들을 많이 보았고 그 점에서 두 번역본 모두 카바피의 시가 아니라 굴절된 카바피, 정확하게 말해 번역자와 원 시인이 합작해서 쓴 시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내가 읽은 카바피의 시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한국독자인 한 사람인 의 방식으로 굴절된 시이다. 결국 내가 독자에게 선보이는 시는 언어의 국경 너머에서 내가 읽고 느끼는 과정 속에서 내 식으로 재구성한 시일 수밖에 없다. 내가 소개하는 이 시에서 독자 여러분이 맛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원시의 문학적 자기장이 내뿜는 힘에 의한 것이며, 그 반대로 떫든 밋밋하든 별맛이 없었다면 그것은 시를 이루는 데 내가 참여한 성분이 원래부터 조악하거나 아니면 잘못 배합되어서 그리되었을 것임을 독자 여러분이 미리 유념하고 읽어주시기 바란다.

토가’: 로마인들이 입는, 솔기가 없는 길고 자락이 풍성한 예복.

 

콘스탄티노스 카바피(Κωνσταντίνος Π. Καβάφης)(우선 미국식 표기에 따라 카바피로 표기한다. 원어대로 하면, ‘카바피스가 되어야 할 듯한데, 정확한 규칙을 모르겠다. 전문가의 조언을 구한다.)1863429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서 1933년의 같은 날에 타계했다. 영어로는 Constantine P. Cavafy 그리고 불어로는 Constantin Cavafis 혹은 Cavafy로 표기한다. 카바피는 이 난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포루쿠갈의 페소아Pessoa를 비롯해, 알제리의 세낙Jean Sénac, 이탈리아의 산드로 페나Sandro Penna, 영화감독이었던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 등과 더불어 현대시의 지평을 혹은 사막을 가장 앞서서 걸어간 시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 시는 2003년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쿳시John Coetzec야만인을 기다리며(왕은철 역, 들녘, 2003)의 역자 해설에서 그 마지막 부분이 소개된 바가 있다. 쿳시의 소설은 카바피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의 주제는 비교적 명료하면서도 깊이가 있다. 명료하다는 것은 이 시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묘한 상관관계를 특별한 은유로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광경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깊이가 있다는 것은 그 상관관계가 통상적인 이분법의 선상에서 일어나지 않고 역동적인 일련의 형식적 절차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일깨운다는 것을 가리킨다.

시에 의하면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단순히 아와 비아 혹은 적과 동지로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구별하되 요청한다. 구별은 지배의 정당화를 이루기 위한 절차인데 그 구별의 방식이 기묘하다. 문명과 야만의 구별은 세계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자격을 따지는 구별이다. 문명인만이 세계의 이치를 파악하고 세계의 진행에 개입하여 세계의 방향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야만인은 문명인을 따르거나 아니면 박멸되어야 한다. 그것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그에 이어서 전개된 인종주의적 차별에서부터 오늘의 세계 여러 곳에서의 민족 및 종교 분쟁에 이르는 정치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장애인, 천민, 혹은 적대적 이웃에 대해 사람들이 일상적인 차원에서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숨은 원리이다. 그 원리는 이렇게 말한다: 저들을 봐! 어쩌면 같은 종족을 살해할 수가 있지? 시체를 먹기까지 하는군. 저들은 인간이 아냐. 누가 저들을 교화할 수 있겠어? 그러지 못할 바에는 없애는 게 나아. 혹은, 저 집은 안 싸우는 날이 없구먼.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렇고 그런 걸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래. 저렇게 살면 짐승보다 나을 게 뭐 있겠어? 저런 사람들과는 상대를 말아야 해. 장애인시설 건립 결사반대!

이 구별의 목표는 적대자로 규정된 존재들을 미리 정신적으로 살해하는 것이며, 또한 차후의 물리적 살해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별의 돌발적인 제시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초석이자 깃발로 내세우는 현대 세계가 스스로에 반하는 원리를 뒤에 감춤으로써 성립할 수 있었다는 비밀을 독자로 하여금 엿보게 한다. 그러나 이 시가 환기하는 것은 그런 구별의 기초적인 전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에 대한 성찰은 나중에 온다. 이 구별의 원초적 무대scène primaire는 차라리 그 돌발성 때문에 즉물적 사태로서 독자에게 던져지고 독자는 의문부호가 머리 위로 솟아오른 채 의미의 부재로써 꽉 찬 광경만을 목도하게 된다.

한데 시의 시선은 구별의 무대로부터 슬그머니 비켜서서 그 무대를 보는 사람들, 즉 광장에 동원된 시민들을 향한다. 그 사람들도 독자와 마찬가지로 뭔가가 요란한데 의미는 알 수 없는 무대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니까 독자의 시선이 어느새 시의 내적 공간 속에서 상관물을 찾은 것이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의미의 해독에, 아니 생성에 가담할 진입로를 확보한다. 이 시의 일차 형식은 여기에 있다. 시의 화자는 묘사하지도 진술하지도 않는다. 그는 음성적으로 부재한다. 화자의 부재는 시의 내용 속에서 실제로 지시되는데, ‘수사학자들은 오지 않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구절로서 카바피는 자신의 시가 수사학이 아님을 명시하고 있으며 시를 수사학으로 만들지 않는 일은 화자의 전유(專有)로부터 시를 해방시키는 일임을 암시한다(덧붙이자면, 시의 주관성은 시인의 주관성이 아니라 텍스트의 주관성이라는 가다머의 말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한편, 부재하는 화자를 대신해 인물들이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지적한 것처럼 이 인물들은 시의 독자와 같은 지위에 놓여 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우선 시 바깥의 독자의 눈이 확인하는 것은 의미의 부재와 정비례하여 의미 생성 주체의 중성성neutralité이 시의 해독 상황 속에 놓인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의미 해독의 가능성이 현재의 의미의 텅 비어 있음에 상대하여 충만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의 바깥에 위치한 독자의 착시이다. 실제로 잠재태로서 제시된 충만한 말이 중성성에 부응하는 순수한 말이거나 정확한 말 혹은 참된 말이 될 수 없음은 현실태로서의 말, 즉 인물들의 대화가 명료히 가리켜 보여주고 있다. 그 대화들은 이미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오염되어 있으면서 인물들의 사회적 위치를 가늠케 한다. 그 대화들은 야만인에 대한 풍문, 권력자들의 화려한 의상과 장식에 대한 선망과 반감과 인정이 뒤섞인 미묘한 반응, 권력자에 대한 암묵적인 인정, 더 나아가 그들에 대한 기대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한 복합적 반응은 그들이 잠재적 권력자이자 동시에 실제적 백성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또한 권력자에 대한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인물들의 이러한 지위는 야만인에 대한 관계로부터 나올 그것으로 그대로 이어져, 그들을 잠재적 야만인이자 동시에 실제적 시민인 존재로 만든다. 물론 그들은 권력자가 되고 싶어 하며 야만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권력자에 대한 동일시의 욕망과 야만인과의 동일화에 대한 불안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의 이차 형식이 나온다. 그것은 인물들의 입장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중첩적이라는 데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 , 인물들의 시선은 한편으로 권력자의 시선을 경유하여 야만인을 바라보고, 다른 한편으론 야만인의 시선을 경유하여 권력자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 시가 대화의 양식을 취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권력자에 대한 동일시의 욕망은 권력자들이 야만인을 발명하고 자신과 그들을 구별하여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절차를 점진적으로 부상(浮上)시킨다. 인물들이 그들의 외양에 그토록 관심 깊은 것은 바로 그들 자신 저들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망과 반감이 뒤엉킨 권력자들의 외양에 대한 인상 그리고 권력자에 대한 기대 및 그들에 대한 은근한 불신(“원로원들이 어떤 법을 만들 수 있겠어?”) 속에서 권력자는 번쩍이는 권력자로 떠오른다. 그러나 동시에 야만인과의 동일화에 대한 불안은 권력자의 시선을 경유하여, 즉 권력자와 상상적으로 동일시된 시선에 의해서, 야만인에 대한 어떤 관계에 의해서 권력이 재생산되는 사정을 부각시키게 된다. 그 과정은 마치 초점이 흐려져 희미하고 일렁이는 배경으로 있던 뒷무대가 차츰 명료한 윤곽을 띠면서 마침내 본 무대를 뒤로 물리치고 전면에 나서는 양태로 진행된다. 마지막 행, “어떤 점에서는 그 자들은 해결책이었는데는 그렇게 명료해진 윤곽을 가장 명료한 개념으로 축약하고 있다.

어쨌든 그 어떤 관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놀랍게도 권력은 야만인에 대한 공포 위에서 수립된다는 것을 가리키는 관계이다. 본 무대에서 권력은 야만인과의 구별을 통해서 수립되었다. 그런데 뒷무대를 보니, 다시 말해 흑막을 보니, 구별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공포이다. 그것은 이중의 공포이다. 권력자는 권력자가 되기 위해 무서운 야만인을 발명하여 국경 너머로 추방하고 권력자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서운 야만인을 끊임없이 우리 삶의 현장 속으로 불러낸다. 그러니까, 그 이중의 공포는 야만인의 존재에 대한 공포와 야만인의 부재에 대한 공포이다. 야만인의 존재에 대한 공포는 지배 혹은 권력의 필연성을 증명하는 데 기여한다. 그것은, 야만인들이 저기 있다; 야만인은 무섭다; 야만인들을 누를 자가 필요하다; 권력은 야만인을 다스리는 힘에서 온다; 야만인을 다스리는 힘은 그들을 탄압하기보다 얼르고 달래는 데서 온다, 라는 논리적 사슬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한편 야만인의 부재에 대한 공포는 권력의 에너지가 반-권력의 상상적 발명뿐만 아니라 그를 권력의 크기만큼 키우는 데서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야만인은 있어야 한다; 그들은 법이 존재할 이유와 법이 엄격하게 집행되어야 할 근거이다; 야만인이 있어야만 군대는 단련되고 군대의 권위가 선다; 야만인이 있어야만 광장이 필요하다; 교육기관도; 야만인이 있어야만 국가가 존재할 수 있다, 는 논리적 사슬이 끊긴 무의식의 돌출적 명제들의 더미로 이루어진다. 그 명제들의 더미가 궁극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야만인은 현재 상태의 해결책이다, 라는 것이다. 야만인들이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실은 바로 그 해결책의 한 원소를 이룬다.

카바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즉 이집트로 쫒겨난 그리스인에 속한다(이들을 포함해 이집트의 기독교도를 콥트Copt라 부른다.) 이것은 그가 고향상실자임을 가리킨다. 그는 피식민자이면서 동시에 추방자이다. 그는 정착의 양식으로써 노예 상태에 처했고, 유랑의 양식으로써 모국으로부터 쫒겨났다. 이러한 경험이 그의 시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는 그리스로의 귀환을 꿈꿀 수도 없었고(식민지 혹은 후기-식민지의 상태를 겪는 그곳은 참된 고국이 아니니까), 또한 그리스의 회복을 꿈꿀 수도 없었다(그는 그리스 바깥에 있으니까.) 그로 인해 그가 꿈꾼 것은 그리스 국가의 복원이 아니라 헬레니즘의 복원이었다. 그러나 그 헬레니즘은 어떤 한 공동체의 고유한 존재 및 존재양식이라기보다 어디에 특정할 수 없는 보편적 존재양식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실존적 경험은 그에게 동일성을 회복하려는 어떤 요구도 궁극적으로 타자의 훼손을 대가로 획득되는 것임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카바피의 시를 번역하고 그에 대한 열정적인 해설(망각된 자들의 일리아드Une Illiade des oubliés)을 쓴 도미니크 그랑몽은 그의 시적 태도를 두 가지로 압축한다. 하나는 정체성에 대한 부인과 이타성(異他性)으로서 살기이다. 즉 타자로서 타자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이타적 존재들의 중첩되고 혼효된 언어들 혹은 생각들의 더미를 자신의 집단적 기억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그랑몽은 무장된 중성성neutralité armée’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우리가 앞에서 나름대로 음미한 것에 따르자면 그 중성성은 결코 투명하거나 순수하거나 객관적인 게 아니라 동일성에의 욕망을 이타성에로의 지향적 운동으로 변질시켜가는 도중에 발생하는 존재의 신생하는 성질, 정확하게 말해 공격하지 않고 뒤섞이려고 애쓰는 도중에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겪는 움직임 특유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쓴 날: 2004.8.24.; 발표: 현대시2004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