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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차의 회전 역학-서하진의 『라벤더 향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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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차의 회전 역학-서하진의 『라벤더 향기』

비평쟁이 괴리 2023. 2. 5. 06:54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라벤더 향기』(문학동네, 2000)를 뒤덮고 있는 것은 ‘집’에 대한 집념이다. 그 기승하는, 가짜 냄새, ‘라벤더 향기’가 그 집념의 물질적 상관물이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생각해 보라. 총 10편의 텍스트가 모두 집을 축으로 빙빙 돌고 있기 때문이다. 온갖 향기를 뿌려대는 집(「라벤더 향기」), 남편과 옛 애인을 목격한 ‘모델하우스’(「모델하우스」), 비닐 장판 아래에서 지폐다발이 시꺼멓게 타들어가는 거지의 집(「기차가 지나가는 마을」), 불륜의 장소인 ‘모텔’(「불륜의 방식」), ‘저기, 저 집인가 봐’로 시작하는 「개양귀비」, 퇴직자가 방에 틀어 박혀서 책을 읽고 있는 방(「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남자」), 다락방에 우여곡절의 원초적 장면이 놓인 「회전문」, 신체장애자가 살고 있는 집이 무대인 “문은 흰빛이다”로 시작하는 「무월의 시간」, “그 집에서는 이따끔 맑은 종소리가 울려나왔다”로 시작하는 「종소리」, 그리고 ‘면회실’이라고 하는 철망이 있는 집에서나 사랑을 확인하는, 그래서 “철망 사이로 손을 밀어 넣고 나는 돌아보지 않는 그 사람에게 안타까이 손을 흔들었다”로 끝나는 「저만치 누군가가 보이네」. 그러니, 『라벤더 향기』가 집이야기가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으랴.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자. 『라벤더 향기』를 휩쓸고 있는 것은 ‘차’에 대한 공포이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거의 모든 텍스트가 차에 의해서 이야기의 파열을 개시하기 때문이다. ‘칠층 남자’와의 관계를 끊어 버린 차 사고(「라벤더 향기」), “눈을 뜨면 남편의 여윈 등이 보인다. 남편은 창 너머 손바닥만한 주차장을 내다보는 중이다”로 시작하고, “하얀 차 한 대가 내 옆을 스치듯 바짝 지나”가고, “조수석에서 바바리 코트를 입은 남자가 내렸을 때” 부부의 파탄이 결정된 「모델하우스」, “내가 탔던 기차는 결코 두 번 다시 이곳을 경유하지 않으리라는 느낌”이 그대로 ‘나’의 삶을 징표하는 「기차가 지나는 마을」, 차가 불륜을 들키게 하는 단위로서 존재하는 「불륜의 방식」, 시어머니의 새촘한 식물성의 인생을 조장한 시아버지의 오토바이(「개양귀비」), 차가 파산을 결정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남자」, ‘알’을 신체장애자로 만든 ‘교통사고’(「무월의 시간」), 집이 아내의 불륜을 야기하고, 집이 사라진 자리에 “주말이면 날씬한 차들이 도시 외곽도로를 가득 채”우는 「종소리」, 「회전문」과 「저만치 누군가가 보이네」에서만 차가 특별한 기능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도 차는 빠짐없이 나온다. 「회전문」에서 나의 부부와 친정 부모가 살고 있는 곳은 “주차장 하나를 사이에 둔 거리”이다. 나와 퇴원하는 남편을 두고 나를 환자로 착각한 것은 “택시 운전사”이다. 「저만치…」에서 사건의 동인으로 기능하는 ‘정예리’는 화자 ‘나’에게 전화를 하는데, ‘나’가 내려가 만난 곳은 “어둠이 깔린 아파트 주차장”이다. “전화를 받고 내려갔을 때 그 애는 주차된 차의 뒷유리에 손가락으로 낙서를 하고 있었다. 차 유리는 온통 진흙빛이었다. 황사바람이 부는 계절.” 그리고, 차가 또 한 대 있다. 화자 ‘나’는 “오전 강의를 듣고 학교를 빠져나와 안양행 시외버스를 타고 치미는 멀미에 시달리며 한 시간쯤 지나” 교도소의 면회실로, 그러니까 저 뒤틀린 집으로 갔었다. 조금만 주의 깊게 읽으면, “진흙빛”이라든가 “치미는 멀미” 등 차에 관한 이런 묘사나 하필이면 주차장에서 만난다든가 하는 정황구성들이 텍스트에 의미의 질감을 부여하면서 이야기의 전개에 의미심장한 암시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집이 주제라면, 차는 징조이다. 덧붙이자면, 불륜은 일종의 부대 현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라벤더 향기』 전체 텍스트의 일관된 주제가 아니다(가령, 「개양귀비」의 ‘시아버지’의 ‘가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남자」의 ‘파산’은 불륜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빈번한 제재의 하나일 따름이다. 다른 작품들과 위 두 작품을 통일시키는 주제는 집에 대한 집념이다.
그런데, 집에 대한 ‘집념’이 맞는가? 왜 불안이나 넌더리가 아니고 집념인가? 모든 인물들이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끝없이, 제어할 의지조차 갖지 못한 채, 욕망하기 때문이다. 가령, 「라벤더 향기」의 ‘여자’가 7층 남자를 어떻게 만났던가? 바로 집으로 찾아가서이다. “거의 언제나 출장중인” ‘남편’ 때문(혹은 덕분)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집념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집념은 집이 인물들을 고뇌와 질식 속에 빠뜨리는 데도 불구하고 떠나지 못하기(혹은 않기) 때문이다. 여자가 뿌린 “엄청난 양의 다양한 향기”는 “이제는 악취로, 숨을 쉬기 어려운, 부글부글 무언가를 끓일 수조차 있을 듯한 가스로 변해버”리지 않았던가? 「모델하우스」의 ‘나’는 집을 남편에게 선물하려다 남편과 옛 애인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또 「기차가 지나는 마을」은 어떤가? ‘나’가 찾아간 집은 거지로 사는 생부의 집이고, 거기에서 ‘나’는 “엎어진 요강에서 흘러나온 배설물과 토사물이 흥건한 바닥 위로 내 안의 모든 것[을] 울컥울컥” 토해냈던 것이다. 「불륜의 방식」에서의 ‘나’는 “쓰레기 매립지에 세운 아파트”에서 산다. 어느 곳에도 제대로 된 집은 오직 부재할 뿐이다. 
집은 모두 뒤틀려 있다. 그것들은 위장되거나(「라벤더 향기」) 위장하고(「개양귀비」), 파탄나거나(「모델하우스」, 「스케이트보드…」), 파탄을 야기하거나(「회전문」, 「종소리」), 파탄의 징후이고(「개양귀비」, 「무월의 시간」), 구멍이 숭숭 뚫려 노출되어 있으며(「불륜의 방식」에서의 모텔), 집 안에 철창이 놓여 있는 방식으로 변형되어 있다(「저만치…」의 면회실).
그런데도 인물들은 집을 버리지 못한다. 가령, 「불륜의 방식」에서 ‘현미 엄마’는 왜 체육실의 그 어두운 지하방에서 잠들었던가? 이야말로 집에 대한 집념이 너무도 허술하게 노출되어 추한 꼴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는(땀냄새로 표징되는) 가상의 집을 지은 것이 아니겠는가? 죽은 아이의 방을 아름답게 가꾸는 남편 선배 부인도 마찬가지다. 
‘차’는 무엇인가? 그것은 선택축에서 집과 대극에 놓이며, 연접축에서 집의 환유이다. 그것은 머무름/떠남의 좌표에서는 집과 정반대에 위치하고, 공간의 차원에서는 집의 축소판이다. 『라벤더 향기』에서는, 그런데, 연접축이 선택축을 포위한다. 서하진의 차는 멀리 떠나는 적이 없다. 그것은 항상 집과 일터 사이를 왕복한다. 이 점을 포착할 때만 왜 「모델하우스」의 앞 대목에, 일견 쓸데없이, 주차장 얘기가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또, 「기차가 지나는 마을」의 제목이 왜 그러한지도, 「불륜의 방식」에서 아파트의 악취가 불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이 인접을 통해 집은 차를 포함하고, 차는 집을 포함한다. 집은 유학간(실은 죽은) 아이의 별 꿈을, 촘촘히 새겨놓은, 혹은, 총총히 현실화해 놓은 공간(「개양귀비」)이며, 차는 끝끝내 버리고 싶지 않은 나만의 공간(「스케이트보드…」)이다. 이 포함 관계를 놓치면 차는 스케이트보드로 날아가 산산조각이 나고 집은 차들에 짓밟혀 흔적도 없이 붕괴된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둘은 서로 바투 붙는다. 집은 차의 일탈의 욕망을 포함해 자신에 대한 집념을 불지피며, 차는 머무름의 집념을 포함해 자신에 대한 욕망을 예각화한다. 짐과 차는 ‘회전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회전문의 날개와 여백이다. 
『라벤더 향기』는 여성주의 소설이 아니다. 이것은 일상성에 관한 소설이다. 바로 ‘쳇바퀴 도는 듯하다’는, 아주 상투적인 속말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현대 일상인의 머무름에 대한 끝없는 집념과 한없이 좌절되며 되풀이되는 떠남에 대한 욕망이 응축된 모습을 가장 물질적으로 치환하고 있다. 집과 차는, 말로 딱 잡아채기 어려운 일상성의 복합적 욕망과 선명한 동형관계를 이룬다.
󰏔 2000 겨울, 문학과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