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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인생의 껍질을 벗고 ... - 서이제의 『0%를 향하여』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부랑인생의 껍질을 벗고 ... - 서이제의 『0%를 향하여』

비평쟁이 괴리 2022. 1. 26. 12:53

※ 아래 글은, 2022년 제 53회 동인문학상 1월 독회의 결과로 발표된 심사평의 원문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싣는다.

부랑인생의 껍질을 벗고 자유인으로 부화하는 연습

10여 년 전에 영국의 경제학자 기 스탠딩Guy Standing부랑인생 새로운 위험계급 The Precariat - The New Dangerous Class(2011)을 출판했을 때 그것은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현실의 전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출현한 사태에 대한 시의적절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부랑인생이란 사회적 영역 안에 확실하게 자리잡지 못하고(또는 않고) 세상을 불안하게(혹은 자유롭게) 떠도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의 존재는 이미 20세기 후반기부터 세계적 현상으로 사방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모습만을 나열한다 해도, 난민, 노숙자, ‘노란 조끼 gilets jaunes’, 비정규직 근로자, 시간강사, 성 소수자들이 있다. 더 나아가 저 옛날의 히피나 집시들도 같은 부류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보보족같은 유한계급도 삶의 양태에서는 그들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사회적 삶의 기본 요건인 의식주에서 비정상적인 결핍을 겪고 있고, 사회적 신원이 불안정한 일시성 속에 처해 있으면서 끊임없이 등록증을 받았다 반납했다 한다. 한데 지금 중요한 것은 이런 삶들의 부정성에 대한 폭로(소위 벌거벗은 인생류의)나 감성적인 연민이 아니라, 그 삶의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삶의 형식을 새로운 생활 유형으로 만들어가면서 기존 세계를 넘어설 대안들을 창출하고 있는 현상이다. 즉 그들이 제출하는 세계의 모형들은 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제도구성적 중앙처리 공동체에 딴죽을 걸면서 새로운 이산(離散)적 공동체를 향한 실험으로서 부상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에 이런 작업들은 계속 여물어 가면서, 급기야 최근에는 모 인류학자가 유동시학(遊動詩學 Precarious Poetics’(마리벨 카자스-코르테스Maribel Casas-Cortés,유동적 글쓰기 - 오늘의 시학/정치학에서 유동성의 주제가 부재한 것을 보며 그 가치를 주장함 Precarious Writhings - Reckoning the Absences and Reclaiming the Legacies in the Current Poetics/Politics of Precarity 」『오늘의 인류학 Current Anthology625, 2021.10)의 가치를 제창하여, 문학·예술의 영역에까지 그 경향을 확대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긴 문학·예술이야말로 저 옛날부터 중앙 권력의 지배에 대항하여 소수자들의 삶을 보듬고 그로부터 새로운 현실의 가능성들을 길어내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실행해 왔으니, 어쩌면 부유성(浮游性)이야말로 문학·예술의 본령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서이제의 0%를 향하여』 (문학과지성사, 2021.09)에 수록된 소설들은 바로 이런 의미심장한 추세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그 추세의 이유와 의미를 톡톡히 맛볼 수 있는 증례들을 박진하게 제공하고 있다. , 그의 소설은 2010년대 이래 한국 소설의 중요한 경향 중의 하나로 자리잡았던 루저 인생들의 문제를 바로 지적 부랑자들의 문제로 집약시킴으로써 한국 소설의 단계를 훌쩍 격상시킨다. 요컨대 사회적 고난의 문제 위에 현실의 모순에 대한 성찰을 덧쌓고, 다시 그 위에 그 모순을 돌파할 수 있는 독자적 삶의 형식을 고안하는 시도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 시도의 끝에서 버려진 자들은 그 내쫒김의 형식을 그대로 안은 채 자유인으로 재탄생하기 위한 몸부림을 필사적으로 전개하고 있으니, 그 행동이야말로 거의 유일한 생존의 기회이자 절묘한 자주독립의 호기이기 때문이다. “현장에 가면 돈은 벌 수 있었지만 글을 쓸 수 없었고, 글을 쓰지 못하면 내 작품을 만들 수 없었다. 내 작품을 만들지 못하면 감독이 될 수 없었다. [, 현장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인용자 부기]”는 진술이 그대로 가리키듯이 말이다.

여하튼 이런 절박한 몸부림이 피워올린 생존목(生存木)의 우듬지에서 독자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그 문제 자체를 해결의 실마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변화해야 하고, 자신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마음과 몸이 동시에 변화해야 한다는 간단하고도 무궁무진한 이치의 첫 단추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변신 의지의 작동을 실감나게 느끼게 해주는 것은 아주 솔직하고도 단순명쾌한 묘사들이다. 인물들의 생김새, 그들의 생각, 대화 모든 것이 마치 길거리나 카페에서 직접 듣는 듯한 착각이 날 정도로 현대인의 일상을 투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대화를 나누다보면 결국은 돈 얘기로 끝나고 마는 현대인들의 이야기 스테레오타입에서부터, 너무나도 사소한 계기로 점화된 예술적 충동에 대한 개인적 기억에 이르기까지 화자의 속살을 비추어 그 움직이는 근골들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살다보면 이런 투명성과 단순성에 깊이 매료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런 단순성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단순성에 투명한 빛이 투영되면, 반듯한 세계에 대한 전망을 최대화하는 듯이 독자의 마음을 해방시킨다.

새로운 재능의 출현을 기꺼이 반길 까닭이 차고 넘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