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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 세대’ 혹은 ‘모태 인권 세대’의 소설 - 이유리의 『브로콜리 펀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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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 세대’ 혹은 ‘모태 인권 세대’의 소설 - 이유리의 『브로콜리 펀치』

비평쟁이 괴리 2022. 2. 17. 08:25

※ 아래 글은 제 53회 동인문학상 제 2회 독회(2022년 1월)에서 선정된 후보작에 대한 독회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가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포켓몬 세대혹은 모태 인권 세대의 소설

 

이유리의 브로콜리 펀치(문학과지성사, 2021.10)포켓몬 세대혹은 모태 인권세대 소설의 출현을 알린다. ‘모태 인권이란 태어났을 때부터 성인과 똑같은 권리를 부여받은 세대를 가리킨다. 인권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의 인류는 나이를 통한 구분이 거의 없었다. 천부인권의 탄생과 함께 그 구분도 덩달아 출현했는데, 시대가 전개되면서 구분의 적용 영역에 분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즉 관념적 영역에서 인간 모두에게 부과된 사람답게 살 권리라는 원칙이 여러 실제적인 영역들에 파문을 일으키면서 파장의 중첩 양상에 따라 다양한 변이가 일어난 것이다(마루의 겹침으로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하는 장소는 물론 상업적인 곳이다. 유모차의 가격을 보라!)

이 세대의 주요 특징은 상상 육아취향을 즐긴다는 점에서 포켓몬 세대라고 부를 수도 있다. 상상 육아취향의 기원은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이들이 소위 거울 단계라고 불리는 자기 인식단계를 충분히 단련하지 않고 통과했기 때문에, 모유를 먹는 아이가, 젖을 문 입을 해서 자신과 엄마가 한 몸이라고 생각하듯, 자신과 주위의 단절선을 명료하게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몸의 연결망을 무작위적으로 늘려 나가는 운동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 이미 사회적 주체로서 공인되었고 그렇게 존재하게 되었기(한국의 경우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의 사회적 운명이다) 때문에 모태 인권의 개념을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연습을 하는 과정을 한동안 이어간다. 즉 이들은 인권을 획득한 존재이자 동시에 인권을 주는 자로서 태어났으니, 그 혼동을 스스로 적용해 실험함으로써 한편으로 자기를 입증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의 권능을 검증하는 것이다.

이유리의 소설들에는 이런 현상들이 바글거린다. 팔에서 브로콜리가 자란다든지, 캐리어를 끌고 다닌다든가, 반려동물을 기르고, 아이돌 스타를 육성하는 다양한 사물들 및 사람에 대한 애착은 바로 이런 상상 육아와 주체 실험의 조합의 양상들이다.

문제는 이런 무의식적 실험이 언어로 현상하는 모양과 그것이 현실 사회에서 작동하는 기능이다.

우선 말해야 할 것은, 이런 충동을 몸으로 실행하는 것은 거의 자동적으로(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언어로 하는 건(즉 간접화시켜 사유의 대상으로 만드는 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언어는 한편으로 추상적 기호를 가지고 실감나게 몸의 행위와 유사하게 만들어 독자의 심박을 뛰게 해야 한다는 요구(그렇지 않으면 독자가 달아날 것이다)와 또한 그것에 대해 언어 본래의 기능, 즉 성찰하고 의미화하는 과제(그걸 하지 못하면 문학적 수준에 다다르는 데 실패할 것이다)를 동시에 이뤄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유리 소설의 화자들이 생생한 행동을 보여주면서도 빈번히 관조적인 위치로 물러나, 이 유희의 즐김을 보는 즐김으로 바꾸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유리의 소설은 첫 번째 요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을 통해 두 번째 과제마저 이행하려는 운동을 보여준다. , 신체의 사물로의 변이와 대상들의 증식과 까닭도 없이 일어나는 타자들에 대한 애정은 현실 원칙과 어긋남으로써, 새로운 형상들의 예측할 수 없는 출몰로 인해 독자들에게 감각적 즐거움을 제공하면서, 현실 원칙들의 폐쇄성과 폭력성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가령, 권투선수가 상대방을 두들겨 패야 이길 수 있다는 원칙에 절망하듯이 말이다.

 

나는 심지어 그 사람을 미워하지도 않아. 아니 오히려 좋아해. 복싱에 목숨 걸고 나랑 비슷한 삶을 살아왔을 이 사람하고 친구가 되고 싶어. 그런데 그런 사람을 곤죽으로 만드는 상상을 하는 게, 실제로 곤죽으로 만들기 위해 주먹을 내뻗는 게 어느 순간부터 되게 힘들어진 거야. 이건 스포츠다, 직업이다 하고 계속 생각했지만 스포츠건 직업이건 맞으면 아프고 아픈 건 싫거든. 진짜 싫고 기분 나쁘거든. 그런 걸 생각하게 된 날부터였어. 복싱이 하기 싫어진 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휙 그만둘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p.97)

 

한데 이런 반성적 기능은 그 나름으로 소중한 것이긴 하지만, 일방적으로 대립적이다. 즉 사회적 필요에 의해 수립된 엄혹한 현실 원칙과의 상관관계 및 길항을 통한 새로운 현실 원칙의 모색 앞에서는 종종거린다. 따라서 반성적 작업은 감각적 쾌감의 향락으로 침닉하기 십상인데, 그러지 않으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무서운 아해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다 보니, 이런 상상 육아의 놀이, 좀 더 넓혀 말해, ‘존재 확장 유희거울 단계를 강박적으로 반복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놀이 자체가 거울 전 단계와 다음 단계가 한꺼번에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작가를 서서히 그로부터 이탈시킬 것이다. 그때 그는 여하히 변화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재기 넘치는 작가의 후속 작품이 궁금하고 궁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