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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회 (2013년) 이한열 문학상 시 부문 심사평 본문

심사평, 추천사 등

제 18회 (2013년) 이한열 문학상 시 부문 심사평

비평쟁이 괴리 2022. 12. 5. 08:33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시적인 감성이 풍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를 만들어내는 능력까지 함께 갖춘 건 아니다. 좋은 시의 수준에 다가가려면 시적 충동을 조직적으로 다스리는 훈련이 필요하다. 언어의 적확한 구사, 감정의 조절, 도식적인 비유를 뛰어넘는 연습, 상투적이지 않은 표현들의 개발, 절제된 수사 등이 그런 훈련의 필수과목들이다. 그 중에서도 감정을 적절히 조절하여 감각적 표현으로 치환하는 건 초입에 놓인 가장 어려운 관문이다. 김규일, 김동현, 김세종, 김현지, 서자헌, 승형수, 최덕천, 최종수, 한재환의 투고작들은 시적 감각의 구비를 증명하고 있다. 다만 그 감각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하려면 오랜 투자가 필요할 것이다. 박민혁, 박연빈, 백지원, 서종욱, 서지혜, 염선호, 우재영, 유기림, 유현성, 허환의 투고작들은 시적 완성의 도달점에까지 다가서고 있다. 하지만 표현 충동이 지나쳐 말이 장황해지고 수사가 어긋나고 있다. ‘절차탁마가 필요하리라. 홍순화의 평상 옆 해바라기와 김도형의 저녁의 종점은 버려진 존재를 통해서 새로 태어난 것이든 치열한 생활이든 결국은 무의미한 죽음의 상태로 서서히 빠져들고 마는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시선이 섬세하고 묘사가 적절했다. 두 시 모두 느낌이 감상적 차원에 머무르고 마무리가 상투적으로 처리된 건 아쉬운 일이다. 김승유의 도시의 냉장고는 밤에 불 밝힌 빌딩들을 냉장고에 비유하여,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폐기되는 회사원들의 잔인한 운명을 형상화했다. 착상이 좋았고 삶에 대한 진지한 인식을 담고 있다. 다만 냉장고 안의 묘사와 빌딩 안의 묘사를 긴밀히 상응시키지는 못했다. 신진용의 도화사는 익살을 떠는 역할을 하는 배우의 연기를 발성되지 못한 진정한 노래와 보이지 않는 진정한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읽어낸 특이한 시이다. 진정성을 추구하는 삶의 근본적인 고독을 선명한 비유로 인상화하고 있다. 다만 그 삶의 실제를 포착하는 대신 그 명명의 뜻풀이에 집중한 건 재기가 지나치게 승하다는 걸 가리킨다. 하성훈의 리히텐슈타인 거리는 자유의 활기로 넘치는 이국의 거리에서 사라진 역사를 되새기면서 현대식 자유의 이면을 성찰하고 있다. 묘사와 생각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고 있다. 더욱이 이 상황을 바라보는 차분하고 정 깊은 눈길이 이 성찰에 진솔함의 두께를 입혀, 자유는 사랑과 이어져야 한다는 인식을 독자에게 일깨운다. 다만 상황 인식을 내면의 다짐으로 감싸는 것은 추상성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 신진용과 하성훈의 두 시를 저울의 양쪽 올려놓고 한참 들여다보다가 하성훈의 시를 당선작으로 결정한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도 성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