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임영조의 「그대에게 가는 길 6」 본문

울림의 글/시 한 편 읽기

임영조의 「그대에게 가는 길 6」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3:07

그대에게 가는 길 6

 
그대에게 가는 길을 묻지 않는다

지금 내 생각 내 몸을 끌고

홀로 걷는 이 길이 나의 길이다

아무도 밟지 않는 첫 눈길 같은

그 깨끗한 여백 위에 시 쓰듯

밤낮 온몸으로 긴 자국

이 세상 모든 길은 자기가 낸 업보다

내가 언제 어느 길을 택하든

내 그림자가 한평생을 동행하리라

외롬나무 한 주가 내 뒤를 따르고

내 발자국에 음각되는 불립문자가

구천까지 나를 밀고 가리라

그대에게 언제쯤 당도할까

스스로도 묻지 않고 나선 길인데

어느덧 앞길이 뉘엿뉘엿 저문다

물 위를 달리는 배도 정박하려면

진창에 닻을 박아야 한다, 허나

생의 닻은 때때로 제 발등도 찍는다

잠시 마음의 돛 내리고 방파제에 올라

저린 발 주무르며 쉬려니 멀리

줄포 앞바다가 허연 혓바닥을 낼름거린다

저 바다 한 페이지를 넘기면 과연

깊고 푸른 중심으로 드는 길이 보일까

해도, 나 함부로 따라가지 않는다

(임영조 시집,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 민음사, 2000)

 

외로움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외로움은 침묵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 때,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렸다고 생각할 때, 자연조차도 낯설어질 때, 그도 하늘이 낯설고 하늘도 그가 낯설 때, 그것이 외로움이다. 그러니까, 외롭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딘가 그 외로움을 들어줄 만한, 그를 외롭지 않게 해줄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 외로움은 진짜 외로움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외로움을 겪는 사람은 또한 외롭지 않은 상태에 대한 열망으로 못 견뎌한다. 지금-이곳에는 없으나 어디엔가 언젠가 만날 그대에 대한 상정이 없으면 외로움은 생겨날 수가 없다. 그렇게 외로운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대에게 무작정 가는 것이다. 그가 가는 길은 이미 나 있는 길이 아니다. 세상은 그의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갈 길은 세상에 자국을 내며 가는 길이다.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는 그는 역설적이게도 지금 이곳의 현재성 속에서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업보이다. 그 업보 속에서 그는 휴식 불허의 형벌에 처해진다. 생의 쉼터는 그의 발등을 찍는다. 그는 쉼 없이 가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 땅의 바깥에서 낼름거리는 저 바다따라가는것도 할 수 없다. 바다도 그의 편이 아니다. 그는 오직 스스로 갈 뿐이다. 세상에 갇혀, 세상을 타고, 세상을 넘어. 다시 말하지만, 외로움은 표현되지 않는다. 오직 외롭지 않으려는 외로움의 실행만이 언어로 기록될 수 있을 뿐이다. (쓴날: 2002.09.19, 발표: 주간조선1723, 2002.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