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명리의 「거울 속의 새」 본문

울림의 글/시 한 편 읽기

김명리의 「거울 속의 새」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3:08

거울 속의 새

  

황사 폭우를 피하려다

새는 기어코 자동차 백미러에 부딪힌다

뇌수의 기어를 중립으로 풀고

아득히 鳴砂山 모래 울음소리에 귀를 파묻으려니

내 안의 새 한 마리

흠뻑 젖은 날개를 파닥이며

거울 속 붉은 새의 부리를 쫀다

누구냐? 너는 누구냐?

거울 속에서도 폭풍에 갇혀 파닥이는 새

거듭 문풍지를 세우는

빗줄기의 덧문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다

캄캄하구나, 그토록 먼 곳에서

더 먼 곳으로 내 생의 差緣을 되비추는 새여

(김명리 시집,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 문학과지성사, 2002)

 

운전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 난데없이 내리 닥쳐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게 하는 장대비를 만나 한동안 꼼짝달싹 못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마침 칠흑 같은 밤이었다면, 납량물의 무대로는 더할 나위 없었으리라. 시인이 폭우를 만난 그 순간엔 더군다나 새 한 마리가 비바람에 뒷날갯짓 당해 차의 앞유리에 부딪쳤다. 당황한 시인은 망연자실(“뇌수의 기어를 중립으로 풀고”) 운전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다. 비 쏟아지는 소리는 마치 모래가 울음을 운다고 해서 붙은 명사(鳴砂)산의 모래가 쓸려 내려가는 소리 같다. 발을 내딛을수록 뒷걸음질만 하게 하는 모래 언덕의 그 소리는 모래가 우는 건지 오르는 내가 우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문득 시인은 폭우같은 인생을 힘겹게 나아가다가 뒤로 밀리기만 하는 자신의 불우 속에 빠져든다.

한데 새가 충돌한 자리가 하필이면 백미러 부근이었다. 그것이 시인에게는 백미러에 부딪힌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순간 차의 앞유리는 거울이 되어 그의 힘겨웠던 생의 근원으로 시인을 귀환시킨다. 뒷걸음질 당해 온 생을 가장 멀리 뒷걸음질시켜 그 삶이 시작되려는 순간으로 그를 데리고 간다. 그리고 묻는다. “너는 누구냐?” 그래 거기까지 밀려가며 시인이 무슨 생각을 할까? 돌아간다면 다른 생을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할까? 아니면 이 어긋난 생을 물려 돌아가는 길도 어긋나기만 하는구나, 라고 탄식을 할까? 그 두 생각이 막막한 메아리처럼 허공 속을 교차한다. ‘내 생의 差緣다른 삶어긋난 삶의 얼키설킨 인연이다. 그런데 실은 그게 삶의 본래 모습 아닌가? 생의 差緣此緣의 생인 것이다. (쓴날:2002.10.01, 발표:주간조선1725, 2002.10.17)

 

* ‘명사산은 잘 아시다시피 돈황(敦煌)에 있는 산의 이름이다. 그 산에서 모래의 울음을 맨 처음 부각시킨 한국문학작품은 윤후명의 돈황의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