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혜순의 「잘 익은 사과」 본문

울림의 글/시 한 편 읽기

김혜순의 「잘 익은 사과」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3:04

잘 익은 사과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을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김혜순 시집,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문학과지성사, 2000)

 

가을을 노래하고 있지만 동시에 신생에 환호하는 시다. 아니 가을을 노래함으로써 신생을 작약하는 시다. 모든 것이 무르익은 계절, 무르익은 모든 것을 풀어 놓는 계절. 가을엔 신경세포들이 유별나게 법석거린다. 여치는 한꺼번에울고, 땡볕 여름에서는 하얗게 돌아가는 모습만 보이던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소리를 낸다. ‘보랏빛 찬바람도 빻여져 분분히 날린다. 세상의 만물에게로 흩어져 날려 모두가 바람나게 한다. 그렇게 가을엔 모든 것이 화통한다. 저마다 익어 독립된 개체로 살아 움직이면서 동시에 서로 따뜻한 기운들을 뿜고 쐰다. 그렇게 보니, 가을날의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은 무수한 이슬방울들의 입자들이다. 새벽의 찬 이슬 한 방울이 새 삶의 명징한 거울이라면, 저 이슬방울들이 뭉친 구름은 신생의 꿈틀거림들로 둥그럽게 부풀어 오른 것이다. 둥그럽게 부풀어 오른 그것은, 둥글게 깎인 사과 껍질처럼 길다란 길을 낸다. 이것이 김혜순의 여성주의이다. 무르익은 것이 풋풋한 새 것이라는 것. 호호할머니에게서 아가의 웃음을 보는 것. 그의 여성주의는 남성적 세계에 저항하는 여성주의가 아니라 남성주의를 위액으로 녹여 새로운 인간을 잉태시키는 여성주의이다. (쓴날: 2002.08.21, 발표: 주간조선1719, 2002.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