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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의 글/시 한 편 읽기

유재영의 「젊은 무덤」

비평쟁이 괴리 2011. 8. 13. 23:09

젊은 무덤

윤동주

 

유 재 영

 

지난해도 무성했던 망초꽃 하얀 들길

 

들불까지 지난 자리 덧없는 그 자리에

 

겨울을 물고 떠나는 쇠기러기 한 떼가......

 

흙집에 누워서 몇 십 년 또 몇 십 년

 

아무도 오지 않는 젊은 무덤 하나 있어

 

오늘도 공짜 달빛만 출렁이고 있구나.

 

조국아! 흙을 다오 큰 삽으로 던져 다오

 

무너지는 봉분이 참으로 부질없다

 

이 밤도 멍이 든 몸이 왠지 더욱 푸르구나.

(유재영 시조집, 햇빛 시간, 태학사, 2001)

 

갑자기 윤동주가 생각난다. 내가 생각하는 윤동주는 순수에 대한 갈구와 시대의 불우 사이를 방황하다가 돌연 일경에게 체포되어 숨져 간 창백한 청년이다. 그의 죽음은, 내게, 역사의 포충망에 붙잡혀 포르말린 처리된 나비를 떠올리게 한다. 피를 다 빼고 바스러질 것만 같은 몸통만 파리하게 한닥거리고 있는 무구(無垢)한 수난자의 모습이다. 해방이 된 이후, 그는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다시 부활하였다. 그러나 정말 부활하기는 한 것인가? 실제, 그는, 채집되어 표본 속에 담긴 곤충이 그러하듯, 아프되 아름답게 전시된 것은 아닌가? 어쨌든 식자들에 의해 그는 저항시인이 되기도 했고 순수성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그를 하나의 상징으로 만든 우리는 지금 기만과 협잡과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지는 않은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을 하루에도 열 세 번씩 복창하면서 말이다. 윤동주의 이름은 다시 살아났지만, 윤동주의 몸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 다시 한번 뭉개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유재영의 시조는 그런 윤동주를 생각게 한다. 이 시는 시조의 기본 규칙을 정확하게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순종 속에서 그는,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라고 노래하는 시조의 세계를 뒤집어 무너지는 봉분”, “공짜 달빛속에 붕괴하는 산천을 허망해 하고 있다. 허망이 야기한 침묵 때문에 겹으로 행갈이가 되었다. 거기에 유재영 시조의 현대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쓴날: 2002.10.12, 발표: 주간조선1727, 2002.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