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오늘의 썰렁담 2020.11.17 본문

단장

오늘의 썰렁담 2020.11.17

비평쟁이 괴리 2020. 11. 18. 16:44

어느 모임에서 한 사회학 교수가 최근에 출간한 책을 주셨다.

수필집이었는데 문장이 좋았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문장의 말끔함에 찬사를 보내자 한 분이 덕담을 보탰다. “등단하셔도 되겠어요.” 사회학자가 겸손하게 말을 받는다. “한때 그런 꿈도 꾸었습니다만, 재능이 따르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포기했지요.”

우리는 이런 언급들을 자주 만난다. 이런 주고 받음 속에는 글재주를 아주 특별한 능력이라고 존중하는 마음이 넘실댄다. 한데 생각해보면 이처럼 아이러니컬한 일이 없다. 그 재주를 끝까지 밀고 나간 사람이 간신히 성공해서 문단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를 기다리는 건 가난과 몰이해다. 반면 일찌감치 그쪽 넘보는 짓을 포기한 사람들은 훗날 다른 일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성공을 한 경우가 많다(실은 성공한 사람들만이 재능이 어쩌고하는 발언을 할 기회를 가진다.)

그렇다면 저 찬사는 정말 선망의 표현이고, 저 겸손에는 어떤 회오가 서려 있는 것일까?

아닌 것 같지만, 진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저런 말들을 비웃어도 안 되고, 저런 마음을 가진 분들을 싫어해서는 더욱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분들이 실은 문학 애호의 마당을 키우는 데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큰 분들이기 때문이다. 글쓰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소위 문인들은 그들이 키운 파이를 먹으면서 생계를 꾸린다.

그렇다고 해서, 애호가들에게 굽신거려서도 안 되고 비위를 맞추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해서 글로 사회적 성공을 거둔 문인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들의 문학적 수명이 30년 이상 가는 걸 보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과문하다 하더라도 나는 이걸 철칙이라고 생각한다.(엊그제에도 어떤 수필가가 그 함정 속에 빠진 걸 우리는 빤히 보았다. 보자니 기분이 좋으냐? 아니다 심히 불쾌하다.)

오히려 문인들은 저들이 정말 마음이 허전해서 문학을 여전히 기웃거리고 있다는 걸 직시하고 있어야 한다. 문인이 애호가들의 물질적 기생자라면, 애호가들은 문인들의 정신적 기생자이다. 그렇게 문학을 둘러싼 관계의 원환은 기생적 공생관계로 돌아간다.

다만 이 관계를 지탱하는 문학적 진실이라는 구름덩이는 오로지 모호하다. 모호한 덕에 거기에서 엉성한 환상으로 일탈하는 일도 번다하고 끈질기게 저 얼음 공기들을 손아귀로 움켜잡으려는 필사적인 노력도 잔인하게 벌어진다. 이 참혹한 사업을 모두가 포기한다면 보들레르의 구름은 문득 걷히고 짱짱한 햇빛만이 대지를 내리쬐리라. 어느날 뜨거워진 지구가 폭발해서 산산히 부숴질 때까지.

 

 

“수학에 정통하지 못한 자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Let no one unversed in geometry enter here.[1]”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의 현관에 쓰여 있던 글귀라 한다. 나도 이렇게 쓰고 싶다.

 

“정통하지 않아도 좋은데 여하튼, 수학을 모르는 자는 문학비평에 들어와도 소용없다.”

 

쓰고 싶다는 것은 내 바램일 뿐 실제론 쓰지 못한다. 아무래도 미구에 허위로 판명될 것 같고, 무엇보다 거의 99%에 해당하는 문학비평가들의 원성을 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 장소에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 놓은 건 쓴 건가, 안 쓴 건가?

그건 그렇고 플라톤 학교의 현판을 나는 피터 벤틀리라는 사람의 책에서 읽었는데, 이 사람은 내가 읽은 대중 계몽용 수학 서적으로는 가장 명료하고도 정확하게 기술한 책의 저자이다. 나보다 나이가 무려 열네 살이 적은 데도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이 나보다 뛰어난 경우가 드물다는, 이 역시 주관적인 착각에 빠져 있는 편인데, 그런 까닭은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고, 분명히 나보다 뛰어나서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더랬는데, 십여 년쯤 지나자 그런 생각을 철회하게끔 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 지금 세어보니, 남은 숫자가 충격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시점상으로 나는 나보다 뛰어나다고 감탄하는 나보다 어린 사람들을 많이 보고 있기는 하니, 그런 판단이 영속되는 경우가 많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피터 벤틀리인데, 내가 그 책을 처음 읽은 게, 2008년이니까 12년이 지나서도 이 사람은 여전히 나를 압도하고 내 기를 마구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주유가 하늘이시여, 유를 낳으시고는 왜 양을 또 낳으셨습니까(旣生瑜, 何生亮)”라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죽은 일화(어렸을 때 읽은 기억으로는 피도 토했던 것 같다)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한국에서 문학비평을 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 생각할 수도 없는 게, 시방은 글로벌 시대라서, 가디언지도 한국문학에 토를 달고, A.I도 동양 바둑에서 승승장구하니, 언제 컴퓨터 과학자가 문학비평을 하지 말란 법이 없고, 또 언젠가는 한국문학에도 참견을 할 가능성도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습을 한답시고 꺼내든 수작이 나도 수학책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다. 어저께 어떤 분이 수학의 정석을 거론하며 기본 문제보다 실력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얘기도 들려오는 참이어서 말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내가 뜬금없이 쓰려던 문장엔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 사연을 돌이켜보니, 내가 진짜 써야 할 문구는 이렇다.

 

“공연히 잡념 삼매경에 빠져서, 잡담의 침을 질질 흘려봤자,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1] 피터 벤틀리, 숫자, 세상의 문을 여는 코드, 유세진 옮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8 60; Peter Bentley, The Book of Numbers: The Secret of Numbers and How They Changed the World, Firefly Books, 2008, p.60.

'단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썰렁담 2020.12.02  (0) 2020.12.03
오늘의 썰렁담 2020.11.29  (0) 2020.11.29
오늘의 썰렁담. 2020.11.27  (0) 2020.11.27
오늘의 썰렁담 2020.11.20  (0) 2020.11.20
오늘의 썰렁담 2020.11.15  (0) 2020.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