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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적인 것'이 실재한다는 말의 의미 - 김혜순의 시 본문

바람의 글

'여성적인 것'이 실재한다는 말의 의미 - 김혜순의 시

비평쟁이 괴리 2024. 3. 24. 11:07

※ 김혜순 시인의 날개환상통(문학과지성사, 2019)이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The National Book Critics Circle·NBCC) '시부문'에서 수상했다. 크게 축하하고 기뻐할 일이다. 순수한 시적 성과로 세계시인의 반열에 그는 올랐다. 그의 경사가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의 궤도 안에 진입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아래 글은 김혜순의 시가 가진 변별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올려 본다. 이 글은 필자의 '한국적 서정'이라는 환()을 좇아서 - 내가 사랑한 시인들 세 번째(문학과지성사, 2020)에 수록된 글이다.

김혜순의 시는, 인종․장애와 더불어 오늘날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 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여성성의 첨예한 측면들을 농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가장 흔하고 쉬운 방식으로 차별과 불평등의 관점에서 그것을 드러내는 것을 거부해왔다. 그는 처음부터 여성의 세계를 통상적 세계와 다른 또 하나의 세계로 개별화시키고 그 세계의 고유한 특징을 형상화하는 일에 주력해왔다. 첫 시집, 『또 다른 별에서』에 수록된 시편들은 일상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그 태도는 사실 여성의 방식으로 특성화된 관찰과 반응의 태도들이다. 이로부터 하찮으면서도 파괴적이며 따라서 뜻 없이 마멸되어가는 삶의 양상들에 능청스런 수용, 따뜻한 연민, 섬세한 분별을 통해서 의미와 생기를 붓고 그것들을 되살려내는 특유의 세계가 나타난다. 이 장황한 설명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김혜순이 보여주는 여성성은 눈앞에 빤히 보이고 선연히 감지되는 데도 명료하게 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 자체가 남성적인 방식으로 진화되었기 때문일 터인데, 이 현상 자체는 ‘다른’ 세계의 존재방식에 대한 의미심장한 암시를 준다. 즉 다른 세계의 존재는 언제나 언어 이전의 형상으로 출현해서 기존 언어의 재구성을 촉구하는 양태로 언어화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도 김혜순적인 언어는 지배적 언어가 인식적인 것과 달리 참여적이며, 규정적인 것과 달리 내관(內觀)적이고, 비판적인 것과 달리 형성적이다.
이렇다는 것은 김혜순의 여성적 세계가 문자 그대로의 별도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이 기왕의 여성 시인들의 여성 세계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의 여성 세계에는 지배적 남성 세계가 가새표 쳐진 방식으로(데리다적 의미에서) 비추어져 드러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김혜순의 여성 세계는 지배적인 남성 세계를 구성적으로 반성케 한다. 이러한 특성은 그의 시작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유지되어 온 그만의 특성이다.
시인은 그 특유의 여성 세계를 차츰 확대하여, 자율화시켜 나갔다. 그 과정은 김혜순적 언어를 온통 수용체(受容體)일 뿐인 육체로 진화시키는 한편, 그 수용체로서의 형상 언어를 끝없이 열려나가는 통로의 양태로 구조화하는 과정이었다. 이 이중적 진화 과정은 이중적인 방향에서 상보적이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기존 세계의 대안으로 출현한 새로운 세계가 폐쇄된 고립체로 고착하거나 그 자신 또 하나의 억압적인 실체로 변화하지 않고 다른 세계들과 함께 교류하며 그것들을 함께 살리는 상생적인 삶의 형식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한 대답의 실행으로서 형성된 것이었다. 즉 김혜순적 여성 세계의 자율화는 그것을 차츰 거대한 실체로 만들어갈 수도 있을 터인데, ‘겹이 진 통로의 형식’은 그것의 실체화를 부단한 운동으로 바꾸는 방법론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저 이중적 진화 과정은 동시에 김혜순적 세계의 실질을 보존하려는 절박한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다. 그의 세계가 오로지 방법적으로만 존재한다면 그 삶은 오직 타자에 대해서만 혹은 타자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럴 때 그 삶 자체는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여성적 삶의 오래된 상투형, 즉 바깥 세계의 안식처로서의 안의 세계 혹은 자식과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여인의 세계의 허망함을 투영하는 것이다. 김혜순의 시는 이 예정된 허무에 대응하여 실질을 끊임없이 구축하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으니, 그의 ‘온통 수용체일 뿐인 육체’가 바로 그 내용을 이룬다. 독자는 그 육체의 형상을 “전세계보다 무서운 시체”(『어느 별의 지옥』), “레이스 짜는 여자”(『우리들의 음화』), “내가 모든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불쌍한 사랑기계』), “이다지도 질긴 검은 쓰레기 봉투”(『달력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얼음 아씨”(『한 잔의 붉은 거울』)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형상들은 점차로 가장 자율적인 의지를 내장하게 된 수용체, 다시 말해 가장 능동적인 수동태로 진화해 온 존재들이다. 이 존재들은 삶의 온갖 사건들을 때로는 쉼없이 때로눈 통째로 받아들이면서도 언제나 그 행위를 자신의 결단을 통해서 한다. 

「내가 모든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 1」은 김혜순적 육체성의 전형적인 모형을 제공한다. 이 시의 기본 주제는 모든 나이의 ‘나’를 한 자리에 모아 놓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시인이 의도하는 것은 바로 그 물음이다. 다시 말해 그 물음이 독자의 내면으로부터 제기되어 그러한 사태를 스스로 겪어보게 하는 것이다. 이 시도는 필경 특정한 과거를 추억하거나 어떤 미래를 꿈꾸는 것과는 다른 체험을 제공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시의 효과는 회환․동경․미련 등의 어떤 감정에 젖어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그러한 감정들을 차단하는 대신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진행들을 상호비교의 방식으로 다시 체험케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통상적으로 갖게 되는 삶의 느낌들을 반성적으로 성찰케 하는 한편, 동시에 어쨌든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삶의 과정들을 내면의 실감과 일치시키는 방향으로 다시 재조정케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타이타닉호」는 환상과 실상의 어긋남이라는 구도 위에서 출범한다. 여성의 결혼 생활에 입혀지는 ‘행복의 유람선’이라는 환상적 이미지와 결혼생활의 실제의 가장 적나라한 표징인 ‘밥솥’을 에이젠슈타인 방식으로 연결시킴으로써 결혼으로 공고화된 사회의 여성적 단면에 대한 충격적인 각성을 제공하는 듯하다. 그러나 독자는 이미 제목을 통해 저 행복의 유람선이 진부한 재앙에 휩싸일 것임을 빤히 알고 있는 터이다. 그러니 독자의 각성 역시 상투화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시가 노리는 것은, 그러니까, 환상과 실상의 어긋남에 대한 반성적 효과가 아니라, 그 반성적 효과의 자동반복이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성찰이다. “과연 이것이 나의 항해인가. 리플레이, 리플레이, 리플레이”라는 시구가 가리키는 것처럼 환상과 실상의 공모는, 끊임없이 환멸을 야기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그리고 그것은 “뱀처럼 밥 먹고 입을 쓰윽 닦지”라는 시구가 날카롭게 암시하는 것처럼, 항상 첨예하게 제기되었다가도 또한 항상 데면데면해지고야 마는 성적 관계상황의 되풀이와 상통하고 있다. 성적 관계상황이라는 것은 이렇게 전혀 문제되지 않는 문제투성이들, 아니 문제들로 들끓는 정상인 것이다. 각성의 방식으로가 아니라 의문의 방식으로 그 관계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환한 걸레」는 가장 비천한 양태를 통해 여성의 존엄을,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사는 것의 위엄을 입증하는 시다.  한편, 「그녀 요나」는 모든 소중한 것들의 영원한 미완성 아니, 운동성을 환기하고 있다. “한번도 제 몸으로 햇빛을 반사해본 적 없는 그 여자가 / 덤불같은 스케치를 뒤집어쓰고 / 젖은 머리칼 흔드나 봐요 / 이파리 하나 없는 숲이 덩달아 울고 / 어디선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함박눈이 메아리쳐와요”라는 구절을 가만히 되풀이해 음미하면, 녹음의 숲이 은은히 미소짓고 함박눈이 환한 햇빛처럼 분산하는 기이한 느낌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이 글은, 2013년 4월 23일 미국 뉴저지의 Rutgers대학에서 열린 ‘한국문학 포럼’에서 발표된 「세계문학과 번역의 맥락 속에서 살펴 본 한국문학의 오늘 Korean Literature Today in the Context of World Literature and Translation」에서 마지막 장, 「‘번역하다’로부터 ‘번역되다’로 가는 한국문학 – 여성시를 중심으로.」에서 발췌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