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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샤르, 서쪽 나라에서 온 고운 스파이

비평쟁이 괴리 2023. 2. 9. 02:44

※ 아래 글은, 프랑스의 시인이자 문학비평가인 클로드 무샤르Claude Mouchrd의 한국문학에 관한 평론집, 다른 생의 피부: 오를레앙, 파리, 서울 그리고 시(문학과지성사, 2023)에 '추천의 글'로 씌어진 것이다. 책이 나왔길래, 이 벽안 학자의 한국 문학에 대한 애정과 참신한 시각을 소개하기 위해, 블로그에 올린다.[1]

1. 세계문학의 지형 안에서의 한국문학의 미미함

클로드 무샤르 선생은 한국 문학을 해외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신 분이다. 이 말이 품은 함의는 크다. 그것은 아주 긴 세월 동안 한국 문학이 세계문학의 변방에서 ‘확철붕어’ 꼴로 쪼그리고 있었다는 사정과 연관되어 있다. 
지리상으로 한국은 ‘극동’에 속해 있다. 세계 지식의 지리정치학을 주도하는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극동에 한국만이 있는 건 아니다. 동아시아의 세 나라는 20세기 후반기부터는 세계 경제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 나라들 중, 중국과 일본은 문화적으로도 강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중국은 옛날의 전통 사상들과 문학들로 세계문학의 중요한 시원적 배경을 이룬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일본 민화가 서양 인상주의 회화에 촌철의 영향을 준 이래, 줄곧 서양과의 교류를 확대하였다. 일본의 시 형식, 하이쿠는 아주 광범위한 수용-생산자 층을 만나서, 현재 하이쿠를 읽고 짓는 세계인은 8백만에 이른다. 
그에 비해서 한국문화와 한국문학은 어땠는가? 그냥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 사정은 오늘날 대중문화를 제외한 한국문화와 문학에도 거의 비슷하게 적용된다. 한국이 OECD의 일원이 될 정도로 경제성장을 이룬 지금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가 1892년 『춘향전』을 『향기로운 봄 Printemps parfumé』이란 제목으로 번역하여 한국문학을 처음 알리긴 했으나, 소수의 한국학 연구자들의 학문적 관심을 제외하면, 한국문화와 문학은 일반 독자의 취향으로부터 ‘에덴의 동쪽’ 너머에 위치하고만 있었다.
한국 문학이 자신을 알리기 시작한 건, 한국 경제가 중진국으로 올라가던 1990년대 초엽이었는데, 불문학자 최윤과 파트릭 모뤼스Patrick Maurus가 이청준, 이문열 등의 소설을 불어로 번역·출판하기 시작한 게 계기가 되었다. 『르 몽드』지 1990년 9월 28일자에 「마법사 이문열Magique Yi Munyol」이라는 서평 기사가 실리며, 한국문학이 프랑스 독자에게 인지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주식회사 ‘교보’가 ‘대산문화재단’을 설립(1992)하고, 문화관광부가 ‘한국문학 번역원’을 설립(1996; 설립 당시 이름: ‘한국문학번역금고’)하면서, 한국문학의 번역과 해외 소개를 조직적으로 알리는 민간·국가 기구가 발족하였으며, 이를 통해 많은 번역자들이 배출되고, 한국문학작품들이 해외에서 출판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문학작품 – 번역 – 해외 출판의 세 고리 연결망은 오로지 작품 생산에만 관여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연결망의 작동을 통해 생산된 작품은 독자와 만남으로써만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생산의 연결망과 짝을 이루며 수용의 세 고리 연결망이 또한 요구되는 것이다. 즉 번역된 작품 – 유통구조 - 독자의 네트워크를 활성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연결망의 핵심 매개인 ‘유통구조’가 ‘한국문학’을 흡인하는 힘이 클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 흡인력에 보태어지는 힘은 아주 다양한 방향에서 들어온다고 할 수 있는데, 아마도 작품의 가독성(도착국 언어와의 호환성), ‘질적 평가’(독자들에 따라서 엄청난 편차를 가지고 있다.), 문학적 취향, 작품 내용의 시사성 또는 고유한 특성, 그리고 인간 일반의 심성에 작용하는 흥취 등이 비교적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이질적 힘들의 대부분은 실제로 오랜 기간의 상호 적응 기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인지도가 낮은 상황에서 그 흡인력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필자가 프랑스에 체류하던 2006 가을-2007년 여름에도 ‘삼성’을 일본 기업으로 알고 있는 프랑스인이 상당수였다.) 게다가 최종적으로 작품의 수명을 결정할 수 있는 ‘질적 평가’는 평가 기준의 스펙트럼이 지나치게 넓다.

2. 한국문학을 읽을 줄 아는 ‘눈’을 가진 외국인

요컨대 이런 물리적 요인들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 그것은 이 동인들을 집중된 힘으로 끌어모으고자, 자발적으로 나선 특정인의 의지와 실천력이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21세기 초엽까지 한국문학을 해외에 소개하는 데 적극적인 노력을 보여 준 외국인들이 있는데, 가령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르 클레지오, 정신분석 문학비평가 고(故) 장 벨멩-노엘, 동아시아 학자이자 엑-상-프로방스에서 한국문학 전문 출판사. ‘드크레센조 출판사’를 운영하는 장-클로드 드크레센조, 그리고 지금 독자가 읽고 있는 책의 저자인 클로드 무샤르이다. 
이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서 한국문학은 1990년대부터 2010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를 거점으로 꾸준히 세계에 자신을 알리는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으니, 그들이 한국문학을 전파하기 위해 들인 발품과 구사한 언어들과 교류한 사람들의 수는 모두 한국문학의 가치를 가리키는 지표가 되었으며,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의 자원으로 전환하기 위한 정보 데이터로서 축적되었다.
이들의 노력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제유적이거나 환유적인 특정한 만남의 계기가 작용하는 것 같다. 클로드 무샤르 선생은 1990년대 후반에 파리 8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던 중에 지도학생으로 받아들인 한국 학생들로부터 한국의 시를 접하기 시작한다. 김희균, 김창겸이 한국시를 불어로 번역해 왔고, 그 시들을 읽은 무샤르 선생은 한국시에서, 프랑스 시에서 소진되었던 활력을 발견하고 놀랐으며, 그 충격은 그로 하여금, 한국인 제자들과 본격적인 번역 작업을 하게끔 한다. 그 작업의 결과를 무샤르 선생은, 프랑스의 시인 고(故) 미셸 드기Michel Deguy와 함께 편집하던 시 계간지 『포&지 Po&sie』(참고로 여기에서 &는 불어이기 때문에 ‘에’로 읽어야 한다)에서 한 두 편씩 게재하다가, 1999년 제 88호에 ‘한국시 특집’을 기획하고 이상, 고은, 황동규, 조정권, 이성복, 기형도, 송찬호 등의 시를 번역 수록하면서, 한국시의 전체적인 모습을 알린다.
이러한 활동이 서서히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대산문화재단 및 언론에서 무샤르 교수를 초청해, 프랑스인이 바라보는 한국시의 모습과 특성과 가치에 대해 발표할 기회가 점점 더 증가한다. 같은 해, 대산문화재단의 후원으로, 당시 프랑스 문학 독서 공간에서 『예언자』와 『당신들의 천국』으로 문학적 가치를 발하고 있었던 소설가 이청준을 오를레앙 집으로 초대하여, 문학과 사회에 대한 대담을 나누었으며, 이어서 이청준 선생이 무샤르 선생을 초대하여 이청준 선생의 고향인 ‘장흥 문화 탐방’을 하기에 이른다. 
21세기 들어, 무샤르 교수의 활동은 더욱 양과 힘을 더해갔다. 2000년 초엽에, 나중에 이상(李箱)과 앙리 미쇼Henri Michaux를 비교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주현진을 지도학생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주현진은 차후 무샤르 선생의 한국 방문이나, 혹은 한국 문인들의 프랑스 방문에서, 통역을 거의 전담하면서 한불문학 교류에 중대한 공헌을 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무샤르 선생으로부터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문학 수업을 받음으로써, 한국문인과 무샤르 선생 사이의 대화를 ‘정확’하면서도 ‘문학적’으로 통역할 수 있는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이다. 또한 무샤르 교수는 주박사를 통해서 시인 김혜순을 알게 되어, 그 후 김혜순은 무샤르 교수의 가장 ‘주목해야 할’ 시인이 된다. 이 만남이 오늘날 김시인의 세계적 위상에 밑거름으로 작용한 게 틀림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와 무샤르 교수와의 만남은 주현진 박사를 매개로 시작되었다. 주현진 박사는 필자가 충남대학교 재직 시절에 불문학을 전공하던 제자였기 때문에, 그가 나에게 연락을 하여 무샤르 선생과 인사를 하게 되었다. 만남 이후, 필자는 무샤르 선생과 함께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들만 고르면 다음과 같다.
첫째. 2008년 무샤르 선생은 부인 엘렌느Hélène와 함께 내한하여, 시인 황지우를 만난다. 이때 철학자 고(故) 박이문 선생, 주현진과 더불어 황지우의 고향 해남을 방문한다. 봉고차를 타고 서울에서 해남까지 내려갔는데, 차 안에서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에 대한 아주 다양하고도 깊은 대화가 있었다. 그때 필자는 무샤르 선생의 문학관과 정치관, 그리고 사람 그 자체에 대해 알게 되었고, 깊은 인상을 받는다. 해남의 한 여관에서 그는 한국식 취침 양식을 체험하였으며, 해남 대흥사의 범종 소리에 엘렌느는 숭고한 영적 분위기에 젖어들기도 했다.
둘째. 같은 해,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BK 사업의 일환으로 무샤르 선생을 초대하여, 그로부터 「다른 생을 살갗으로 접하며Avec la peau d’une autre vie 」라는 제목의 강연을 듣는다. 이때 그는 “시는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번역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는가”라는 말을 함으로써, ‘번역’의 인류사적 의미를 날카롭게 짚어낸다. 
셋째.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만남은, 2012년 무샤르, 필자, 주현진의 공동 편집으로 『포&지』139-140호에서 ‘한국시 특집’이라는 축제를 아주 풍성하게 치른 일이다. 이때 27명의 한국 시인을 비롯, 6명의 한국 평론가와 5명의 프랑스 비평가, 그리고 소설가 이인성, 영화 감독 이창동이 특집에 참여하여, ‘해방’, ‘투쟁’, ‘생존’, ‘분화’, ‘만남’이라는 다섯 가지 화두를 중심으로 아주 다양한 한국시와 한국문학의 목소리를 발함으로써, 말 그대로 한국시의 현황을 총체적으로 선보이는 작업을 하였다. 또한 정현종 시인의 손글씨 ‘시’가 잡지의 표지를 장식함으로써 한글의 아름다움의 구경(究竟)을 보여주었다. 무샤르 교수는 이 특집을 통하여, 강정과 심보선의 시에 주목을 하게 되었는데, 이 두 사람은 그 이후, 무샤르 교수의 집을 오가며 깊은 교류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넷째. 『포&지』의 ‘한국시’ 특집을 기념하여, 프랑스 ‘르와르Loire’ 지역의 성, ‘샹보르Château de Chambord’에서 한국시와 프랑스 대중의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무샤르, 황지우, 김혜순, 주현진, 강정 그리고 필자가 참여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설계에 깊숙이 관여했다고 알려져서, 프랑스에서 최고의 성으로 꼽히는 이 유서깊은 성의 한 방에서, 르네쌍스 시기에 제작된 옛의자들에 앉아서 시를 낭송하고 한국시에 대해 말하며 대중들과 대화하였으니, 이는 실로 한국시인들이 프랑스의 역사를 비행선 삼아 황금 문화의 낙원 위를 비행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청중이 2백인 이상 몰려 온 것으로 기억나는데, 일부러 동원한 것도 아니고, 그저 성의 소개 팜플렛을 보고 왔다고 하니, 프랑스 사람들의 문학 사랑에 감동받은 건 물론이고, 한국시에 대한 그들의 큰 관심을 목격하고 자부심이 솟기도 하였다.
덧붙이자면, 샹보르성의 행사 다음에 무샤르 선생의 오를레앙 댁에서 동네 지인들을 초대하여, 얘기를 나누면서, 곽효환 시인이 자신의 시를 낭독하였는데, 그걸 들은 프랑스 분들이 내용은 알 수 없어도 한국어의 리듬이 매우 인상적이라는 의견을 주셨으니, 특기할 만한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여러 다양한 일들이 있었는데, 이 모든 일들이 무샤르 선생의 ‘신심’과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한국시의 특별한 면모에 대한 무샤르 선생의 발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발견을 보편적 동의로 만들고 그 이해를 심화,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의 실천으로 이어짐으로써 값진 결과들을 얻게 된 것이라 할 것이다. 그의 헌신은 결국, 변방의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의 독자적인 한 단위로 등록시키고자 하는 오래된 염원에 중요한 초석을 놓은 일로 문학사에 기록될 것이다.

3. 무샤르의 문학관과 사람 모습

무샤르 선생과의 만남을 이어 가면서 필자는 여러 부분에서 그에게 감동을 받은 적이 많다. 그 감동이 필자의 무샤르 이해에 고스란히 옮겨졌다. 무샤르 교수가 한국시를 발견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문학적 감수성에 의한 것이다. 그 문학적 감수성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의 문학관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까다로운 질문에 미숙하게나마 답을 해야 할 의무감을 나는 느낀다. 문학인으로서 한 사람의 외국인을 만난다는 것은 또 하나의 문학관을 내 몸 속에 들인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그의 문학관을 ‘범인류애적 전위주의’라고 정의해 본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급진주의자이며 문학으로서는 최첨단의 언어실험을 동반하는 전위적인 글들(장르에 개의치 않는)을 써 왔다. 그의 정치적 급진주의는 두 가지 원천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그가 메를로-퐁티의 제자였던 철학자,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의 제자라는 것이다. 클로드 르포르는 현상학적 급진주의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현상학적’이라는 어사가 그를 통상적인 마르크스주의로부터 구별해준다. 한데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마르크스적 지향이 행동과 실천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상학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보다 더 실천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리에 근거하지 않고 상황과의 관계에 근거해서 현재의 존재상태를 판단하며, 현상학적 관점에서 현재의 존재 상태는 끊임없이 다른 상태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무샤르 교수는 르포르의 현상학적 급진주의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무샤르의 정치적 입장의 다른 원천은 그가 6.8혁명 세대라는 것이다. 그는 당시 파리 8대학에 있었던 6.8 학생혁명의 점거농성장을 혁명 기간 내내 그의 애인 엘렌느와 함께 머물러 있었다. 무샤르 교수는 내게 애인이 훨씬 급진적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지만, 그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6.8 혁명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가장 이성적인 방식으로 비이성(현실에 대한 육체적 관계 및 개입)을 실행하여, 굳어버린 이성을 무너뜨린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1차세계대전 이래 ‘서양 이성의 몰락’에 대한 반성을 극단으로까지 밀고 간 태도이면서 동시에 그보다 앞섰던 초현실주의의 정치적 실패를 만회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러한 ‘반이성적 이성주의’를 요약하는 명제가 “금지를 금지하라”는 절묘한 구호이다.
그런데 무샤르는 문학적으로는 전위를 지향하였다. 그의 전위성은 다음과 같은 그의 시를 일별하기만 하면 금세 느낄 수 있다.

“나는 혼자 있고 싶지 않아” 칼레드는 말했지.
저 말을 나는 듣고 또 듣네.... 저 목소리, 웅웅거리고, 오돌도톨하고, 
오늘의 근친보다도 더
무한 친숙해.
*
혼자가 아니지만 길 잃은 자라면
그건 마치 그의 고통과 타자의 고통이 
제 3의 고통을 분만하는 것과 같아. - 블라디미르 홀란
「전진하는 행렬」 (사비에 갈미슈가 번역중.)
*
그저 미끼일 뿐이야, 저 줄글들은, 요동 속에 던져진.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었어.
여기 오늘은 그저
“이룬 대로 거두어지리로다” (「칼레드, 혼자야?」부분, 『포&지』, 152호, 2015, p.10.)

언어의 규칙성을 마구 흩어버리는 이런 전위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필자는 그것이 그의 태생적 자유로움이 “금지를 금지하라”는 정치적 급진주의와 결합한 데서 온다고 본다. 그의 자유롭고자 하는 성향이 어디서 연유하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그것을 증명하는 표지들은 있다. 하나는 그가 10살 때 빅토르 위고의 시를 처음 접해서 문학에 입문했으나 위고에게서 ‘무시무시한 것’만을 보았고 15살에 앙리 미쇼의 시에 접한 후  “일생동안 앙리 미쇼에 대한 글을 써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국민문학으로 들어와서 자유로운 문학으로 빠져나갔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른 하나의 표지는 그가 프랑스의 최고 수재들을 뽑는 ‘파리고등사범’ 준비반에 들어갔다가 2년 만에 중퇴했다는 것이다. 중퇴의 이유는 그곳에서 가르치는 문학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이 내용들은 2011년 ‘창원KC국제시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내한하여, 『서정시학』2011년 봄호에서 최동호, 필자와 행한 좌담, 「시와 정치,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에 담겨 있다.)
그러니까 그는 문학을 전면적인 자유와 동일시하고 있었고, 그것이 그를 전위문학으로 이끌었다고 나는 짐작한다. 이 정치적 급진주의와 문학적 전위주의가 결합한 곳에 그의 범인류애가 작동한다. 그는 모든 차별에 반대하였고, 고난받는 자를 항상 거두어 집에서 보살피는 일을 쉬지 않았다. 필자도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던 아이티의 시인, 고(故‘) 장 메텔뤼스Jean Métellus’나 앞의 시에 등장하는 ‘칼레드’ 모두 정치적 망명 혹은 난민 상황이라는 고난에 처해서, 그의 집에서 장기간 머무르곤 하였다.
무샤르 교수의 문학적·정신적 면모를 이상과 같은 방식으로 풀이할 수 있다면, 이는 그의 한국문학 비평에도 고스란히 투영될 것이다. 스포일링은 필자가 원치 않으며 독자 또한 그러하리라고 생각하노니, 어서 이 책의 본문을 읽으시기를 권하는 바이다. 여하튼 무샤르 교수의 범인류애적 전위주의는 세계 문학 및 인류의 공진화를 위해서도 소중한 태도이지만, 동시에 그 태도가 한국문학을 향하면서 산출한 글들은 단순히 ‘외국인이 쓴 한국문학비평’이라는 희귀성에 대한 흥미를 넘어서서 매우 소중한 한국문학 연구의 참조자산이 될 것이다. 필자는 무샤르 교수와의 인연을 생각해서, 직접 한국어로 된 무샤르 비평서를 만들어 드리고 싶었으나 내 사정이 허락지를 않아서 늘 송구한 마음이었다. 다행히도 구모덕 선생이 정성을 기울여, 대망의 책을 내게 되었으니, 번역자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4. 그 이름은 스스로 영원하리

마지막으로 무샤르 교수의 이름에 대해 한마디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 성의 어간을 이루는 ‘무슈mouche’는 ‘하찮은 날벌레’라는 뜻도 있고 ‘핵심에 해당하는 점’이라는 뜻도 있는 양가성이 양극성에 가까운 어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원은 아주 다르지만 ‘수염’이라는 뜻의 moustache와도 어감상 모종의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moustache가 흔히 ‘윗 입술 위 쪽으로 난 콧수염’을 가리킨다면 ‘barbe mouche’는 ‘아랫 입술 아래에 난 솜털’을 가리킨다. 그래서 필자는 짖궂은 호기심이 일어서 그이에게 성의 기원을 물은 적이 있는데, 무샤르 선생은 자신도 잘 모른다고 하면서 간단히 그건 자신이 귀족 태생이 아니라는 뜻과 같다는 식으로 대답했었다. 그의 태생적 자유로움과 범인류애는 서민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것일까? 하지만 그의 집에는 지체높은 집안 출신으로 무샤르 교수와 하는 일이 유사한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런 판단은 적의하지 않은 것 같다. 그이의 평생 반려인 앨렌느는 비시정권에 의해 희생당한 옛 교육문화상 장 제Jean Zay의 따님이시다. 엘렌느는 오를레앙시의 부시장을 비롯해 공적이거나 사적인 공공사업, 특히 인권과 관련된 사업들을 오래 하였고, 필자가 마지막으로 뵌 2014년에는 독일점령기 중 프랑스인에 의해 저질러진 유대인 학대 및 고발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 전시함으로써, 파시즘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책임을 돌이켜 생각하는 운동을 벌이고 계셨다. 따라서 오를레앙의 무샤르씨네 댁에는 출신성분과 아무런 관련없이 범인류애를 북돋는 실천들이 나날이 전개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니 필자의 호기심은 아마도 ‘날아다니는 생물’ + ‘핵심이 되는 점’의 결합으로 마무리될 것 같다. 무샤르 교수가 우리 삶의 진정성에 대한 물음을 물고 프랑스와 한국을 자주 날아다니시면서, 인간과 생명을 함께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북돋는 사업을 때마다 펼쳐보임으로써, 그이가 그렇게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아” 뚫어 놓은 해방의 점들이 은하수처럼 넓고 긴 강을 이루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 상상은 선생의 한결같은 삶의 태도와 실행으로 곧바로 현실로 입증되곤 했으니, 상상이 현실이 되면 현실이 상상의 날개를 타고 비상하는 법이라, 이번 책 역시 한국사회와 한국문학이라는 리얼리티에 집중해, 그로부터 세계인의 자유와 해방의 지평을 여는 일로 이어지는 운동에 또 하나의 추진력을 보태는 일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무샤르 평론집,   『 다른 생의 피부 :  오를레앙 ,  파리 ,  서울 그리고 시 』의 책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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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을 쓰기 위해, 무샤르 선생과 막역한 교류가 있었던 서울 시립대 법학과의 김희균 교수, 현 한국문학 번역원장 곽효환 시인, 번역가이자 비교문학 연구자인 주현진 박사와 긴 전화 통화를 하여, 필자가 가진 정보를 점검하고 새 정보를 얻어 들었다. 그들이 제공한 정보가 이 글에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자리를 빌어 세 분에게 감사의 마응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