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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무’ 이미지의 변천사- 백석의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에서 김혜순의 「겨울 나무」까지

비평쟁이 괴리 2024. 3. 24. 11:20

※ 이 글 역시 앞의 글과 마찬가지로 김혜순 시인의 날개환상통(문학과지성사, 2019)이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The National Book Critics Circle·NBCC) '시부문'에서 수상한 걸 계기로 올린다. 이 글 또한 필자의  '한국적 서정'이라는 환()을 좇아서 - 내가 사랑한 시인들 세 번째(문학과지성사, 2020)에 수록되었다

나무 인류의 집단 무의식에서 가장 뿌리 깊은 이미지 중의 하나일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사전에 의하면 나무는 가장 풍요하고 가장 널리 퍼진 상징재 중의 하나[1]이다. 사전의 집필자는 이어서, 엘리아데Mircea Eliade 성스러운 만나려는 인류의 심성은 그것이 지상에 자리잡을 있는 중심의 자리를 요청하여, 그로부터 우주적 나무 이미지가 세워졌다고 주장했다는 전한다. 이때 나무는 영원한 재생 표현되는 장소이다.

그러나 오래된 나무 이미지와는 다른 비교적 최근의 것이 있는 듯하다. 크게 보아서 둘인데, 하나는 나무를 꿈꾸는 자가 나무로써 자신을 은유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은유의 가장 특별한 형태로서의 겨울 나무 이미지이다.

옛날 나무가 영원한 재생을 보장하는 성스러움이 깃든 장소로서 이해되었다면 그것을 사람이 바로 동일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보존된 기록들, 전승된 기억과 잔존하는 몸짓들이 그대로 증거하듯이 사람들에게 그곳은 소망을 비난수하는 곳이었다. 그러한 신탁의 장소는 서서히 인간이 세상을 지배해 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개발할 재료로 탈바꿈한다. 그럼으로써 나무에 전제되었던 성스러움의 속성 역시 제거된다. 가장 오래된 문학 작품들로 항용 거론되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그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를 보여준다.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우스 자신의 소유물인 여자를 빼앗아간 아가메논에게 홀을 두고 저주의 맹세를 퍼부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보시오! 홀은 속에 있는 나무 둥치를 한번 떠나 이상 / 잎이나 가지가 돋아나는 일이 없을 것이며, 청동이 잎과 껍질을 / 벗겨버렸으니 다시 새파랗게 자라나지도 못할 것이오. / 그리고지금은 제우스의 위임을 받아 법을 지키는 아카이오이족의 / 아들들이 판결을 내릴 적에 홀을 손에 들지요. 그러니 이것은 / 그대에게 엄숙한 맹세가 것이오.[2]

신탁과 맹세가 집중된 대상으로서의 나무이되, 자연성으로서의 나무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수직성 권능만을 갖는다. 권능만을 갖기 위해 신성한 나무 대상은 자연성의 부분들을 잃어버린다. 나무를 깎아나가는 도끼[3]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때문이다. 반면 『오뒷세우스』에서 나무 무엇보다도 귀향의 뗏목에 쓰일 재목으로서 나타난다. 여신들 중에서도 고귀한 칼륍소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곳을 가리켜주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 오뒷세우스는 나무들을 베기 시작했고 작업은 신속히 진행되었다.[4]

『일리아드』의 나무() 성스러움을 표지하는 대가로 지상적 속성들을 버린다. 반면 최초의 인간의 모험의 흔적을 포함하고 있다고 일컬어지며, 실제로 인간 자신의 모험을 기록한 『오뒷세우스』에서 나무는 인간을 실어나를 뗏목을 만드는 쓰일 원료이다.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는 뚜렷한 사례로서 보일 법하다. 대신 그것은 지상적 존재로서 성스러운 어떤 것도 갖지 않는다. 그렇게 하늘과 사이는 너무나 멀다.

지상적 존재가 스스로 성스러움을 내장하고자 원하는 사건,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신의 권능을 참칭하기 시작한 시대, 근대 이후일 것이다. 바슐라르는 그러한 사건의 최초의 예증으로 스웨덴보리Swendenborg(1688-1772) 꼽는다. 그는 상승의 심리학psychologie ascensionnelle 권화로서 스웨덴보리를 가리키고는 그에 심취한 발자크Honoré de Balzac 『세라피타Séraphita』에서 인간만이 특별한 신체기관 안에 위치한 수직성의 감각을 갖고 있다라고 데에 주목한다. 수직성의 감각은 역동적이다. 그것이 인간을 수직의 방향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도록, 드높은 곳으로 자신을 올리도록 추동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인간은 위대한 자로 나타나고자 하는 욕구, 이마를 높이 쳐들고자 하는 욕구로 불붙는다.[5]

그런데 수직성의 감각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스웨덴보리적 상승을 살기 위해서는 겨울의 금속성이 필요하다. 산들을 더욱 메마르게 하면서, 더욱 번득이게 하면서, 산들을 위로 밀어올리는 추위가 요구되는 것이다.[6] 이때 수직성의 감각은 단순히 천상 지향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상적인 것과 천상적인 , 땅과 하늘의 통합을 꿈꾼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이렇게 하늘과 지상적인 것의 조응 기운차게 작동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조응 지상적 존재의 천상적 솟구침, 다시 말해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 지적 생명의 도약을 형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산은 인간의 은유이다. 스웨덴보리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통합의 수단이다. 조응의 예지적 호흡을 내적 인간은 저의 수직적 적성 속에 심어 놓는다.[7] 그래서 인간만이 특별한 신체 기관 안에 수직성의 감각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나아가 산들을 이루고 있는 것은 흙이 아니라 나무들이라는 점을 알아차려야 한다. 솟구치는 , 그것은 헐벗은 나무들이다. 바슐라르는 포우Edgar Allen Poe 구절을 인용한다: 거대한 잿빛의 나무 동체들이, 잎을 떨어뜨린 , 끝없는 행렬처럼 있다.... 그들의 뿌리는 거대한 소택지 안에 잠겨 있으니, 물은 소름끼치게 시커멓고 음울하고 무시무시한 형상을 하고 멀리까지 뻗쳐 있다. 이를 두고 비평가는 해석한다. [포우의] 환상은 소택지 안에서 작동한다. 다시 말해 바다의 내부에서. 뿌리들은 파충류처럼 움직이니, 어느 것에도 매달리지 않고 쉼없이 이동하고 있다. 포우에게 나무들은 걷고 기어 오른다.[8] 나무는 최대의 무게로 지상적인 것에 붙잡혀 있을 가장 기운차게 천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 그래서 소나무들은 각각의 가시 끝에 창공의 이슬을 담고 있다.[9]

나무는 하늘과 땅을 통합하는 가장 선명한 상징이자, 그러한 구경(究竟) 꿈꾸는 인간의 은유이다. 그리고 인간의 은유로서 나무는 무엇보다도 겨울 나무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헐벗을수록 수직성의 움직임은 거세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시에서도 그런 인간화된( 정확히 말해, 자신의 삶에 대해 자각적인) 나무가 등장한 비교적 최근의 경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고를 통한 해방의 기원을 드러내는 은유로서 빈번히 식물의 순환을 동원했던 아주 오래전부터이다. 그러나 존재의 상승 의지 자체로서 자연과 하늘의, 혹은 적어도 현실과 이상의 통합을 투사한 나무는 옛날의 언어문화에는 보이지 않는다. 최근까지도 그렇다. 가령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시인이 오로지 주목한 것은 이지 나무가 아니었다. 게다가 화자와 모란은 동떨어져 있다. 마치 소월의 「산유화」에서 저만치 피어 꽃처럼. 간극을 바라보며 시인은 울고 기다린다.

필자의 독서 기억 안에서 최초의 예로서 떠오르는 것은 백석의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1948) 갈매나무이다. 타향에서 길을 잃고 지인의 허름한 방에 기숙하게 화자가 자신의 처지를 우울히 되씹다가 굳고 정한 갈매나무 생각하며 불우를 견디어내는 이야기를 담은 시이다. 마지막 대목이다.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아니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10].

 

여기에서 갈매나무 이미지의 수일함은 방향의 감각적 고양으로부터 온다. 하나는 갈매나무가 함께 견디는 존재 하나 없이 외로이 서서 눈발을 맞는 가운데 주위는 더욱 어두워져 존재의 삶에 암담의 색채를 칠하고 암담의 잔매들이 눈이 되어 저를 치는데, 그것을 굳고 하게 고요히 견디어낼 뿐만 아니라 나아가 눈발의 매를 견딤의 호흡으로 바꾸어내는 생명적 활동이다.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에서 의태어의 의미 환원성(의태어·의성어는 언어 본래의 기호성으로부터 형상 자체를 표출하려 한다) 소리도 나며 생성하는 시간적 여유가 바로 죽음의 시련을 삶의 숨결로 변환시키는 장치다. 다른 하나는 화자 자신의 모습으로서 추위, 불우를 견디기 위해 화로를 끌어 안는 모습이다. 거기서 시인은 굳이 무릎을 동작을 묘사하여 갈매나무의 모습과 대비시킴으로써 화자를 각별한 반성적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 그럼으로써 불행의 상태로부터 벗어날 가능성과 방법적 태도를 환기시킨다. 환기는 궁극적으로 독자들의 심성으로 전이될 것이다.

백석의 갈매나무 따라서 일종의 자아의 이상으로서, 최소한 자아의 참조점으로서 기능한다. 갈매나무의 정당한 모습의 타자성 섬세한 언어적 절차를 통해 화자 자신에게로 옮겨 문을 연다. 문을 통해 나는 불우를 이겨내는 생의 호흡을 터득하는 것이니, 호흡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윤리적 자긍심에 근거하는 것이다.

자아의 이상 자아 자체의 운동으로 진화하기 위해 한국시는 무려 30 이상을 기다린다.  정현종은 겨울-나무의 헐벗음에서 오히려 생의 약동을 읽고 약동에 자신의 리듬을 싣는다.

 

겨울 나무에 보인다 말도 없이

불꽃 모양의 뿌리

헐벗은 가지의

에로티시즘[11]

 

에로티시즘의 발견은 무엇보다도 헐벗은 겨울 나무가 봄을 준비하고 있다는 자연적 사실에 기대었기 때문이다. 시에는 따라서 자연과 인간 사이의 자유자재한 교통이 있다. 백석에게 각성의 근거였던 것이 정현종에게는 호흡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행의 말도 없이 자연스러움의 여유를 적절히 환기시킨다. 그런데 자연스런 만남의 장소로서의 자연은 후배 시인들에 의해서 인간의 은유로 조밀해진다. 그럼으로써 겨울봄으로의 이행을, 의지의 실행과 성취로 모은다. 황지우의 「겨울-나무로부터 -나무에로」(1985) 그것이다[12]. 비슷한 모형이 박용철의 「절망에서」(1939) 있었다. 그러나 일제하의 시인은 절망으로부터 희망으로 솟아오르는 시적 논리를 구축하지 못하고 감상의 요동에 실려 허망한 섬망처럼 감정을 뱉어낸다. 황지우 시의 독창적 수월성은 절망으로부터 희망으로 전화하는 역전에 정확한 논리적 구조를 부여했다는 데에 있다. 나는 이미 시에 대해 충분히 말하였다[13]. 간단히 말하면 황지우의 『겨울-나무』에서 겨울 나무 이미지는 겨울과 가장 상응하는 모습을 형상하면서 동시에 겨울에 가장 대척적인 형상을 환기한다. 겨울-나무는 계절 안으로 깊이 진입할수록 계절에 포박되면서 동시에 계절을 터뜨릴 강력한 에너지를 충전한다. 바로 그러한 모습이 세계의 질곡을 뚫고 나가는 인간, 오로지 의지로만 만들어진 주체적 인간의 형상이다.

하지만 나는 시인이 시의 성취뿐만 아니라 시의 한계를 자각하고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시도한 사연도 적었다. 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후일담을 전하고자 한다. 물론 후일담에 대해서도 나는 가지 이미 언급하였다. 우선 황지우가 「겨울-나무」의 세계를 떠난 반면, 시의 형식은 차후 민중시의 상투적인 형식을 만드는 표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였다. 가장 뚜렷한 예는 현재의 정당의 당가에 가사로 쓰인 도종환의 「담쟁이」이다. 다음 내가 이미 언급하긴 했지만 충분히 풀어 놓지 않은 것은, 황지우 자신이 세계를 떠난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에 대한 패러디가 다른 시인들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가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에 끼친 영향이 컸기 때문이었다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러한 집단무의식의 문제성 시인들이 직감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고 있다.

유하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황지우의 시를 번이나 다룬다. 우선, 연작 표제시의 번째 시편,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1[14]」의 행에서 압구정동에 겨울-나무로부터 -나무에로라는 카페가 생겼다 시행을 배치하였다. 배치는 매우 암시적이다. 그것은 욕망의 하수구 문화의 표장을 다는 것으로 저의 생장을 시작한다는 것을 은밀히 암시하고 있다. 표장을 다는 순간부터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15]으로 진화한다. 그리고 이어 3편에 와서, 「겨울-나무로부터 」의 드라마가 압구정동에 이식된 풍경이 펼쳐진다. 황지우의 시에서 풍경이 굴종으로부터 저항으로, 라는 반전의 드라마를 짰다면, 유하의 압구정동에서는 열락이 굴종을 삼켜버린다.

 

온갖 젖과 꿀과 분비물 넘쳐 질퍽대는 약속의 밑에서

고문받는 몸으로, 고문받는 목숨으로, 허리 잘린

한강철교 자세로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없는 나무다[16].

 

황지우의 시에서 겨울 나무는 이게 아닌데 외치고 역전에 성공한다. 그러나 유하의 배나무는 이상 외쳐도 결코 미동도 않는 보도 블록의 견고한 절망 뚫고 올라갈 수가 없다. 유하의 패러디는 상황적 패러디이다. 황지우 자체를 문제 삼는 아니라 시가 설정한 현실이 불가능해져버린 1990년대의 한국 상황을 문제 삼는다. 그것은 유하 역시 「겨울-나무로부터 」가 강렬하게 현상한 주체성의 철학 기꺼이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에게 문제는 주체적 나무가 가짜 꽃들에 둘러 싸여 자기 몸으로 없는 상황이다.

반면 주체성의 철학 자체에 대한 패러디로 나아간 시들이 있었다. 황인숙은 「처녀처럼[17]」에서

 

꽃들은 긴장 때문에 시들어요.

싱싱한 장미꽃은

얼마나 관자놀이가 욱신거릴까요?

 

라는 재담을 통해 주의주의 혹은 의지의 현상학이 내포하고 있는 집념의 우스꽝스러움을 조롱하였다. 그것은 내가 황지우의 시를 평하며 말을 다시 옮기면, 현실 극복의 욕망이 환상을 통해 성취되 것에 대한 반발의 표현으로 읽힌다. 한편 박용하는 「나무 앞에서」에서 나무가 현실 극복이 아니라 인고의 자체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나무들 그들만이 그들의 生의 홀로 흔들려 바로 서는 절대의 자세를 안다. 절대의 슬픔을, 슬픔의 끝인 피눈물을, 절대의 생로병사에 서서, 오로지 초지일관, 죽어도 서서, 텅텅 말라 비틀어지는 육신에 피닉스를 게워낸다[18].

 

박용하는 나무가 인간의 은유가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거부는 삶의 태도일 뿐만 아니라 시의 태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은유 시의 기본적인 존재 양식이기 때문이다. 신생의 발명, 그것이 은유가 하는 일이라면, 박용하는 은유를 밑받침하고 있는 환상, 세상을 통째로 바꾸고 싶은 갈망이 세상이 통째로 바뀔 있다는 확신으로 치닫는 욕망의 길을 부정한다. 그의 나무는 있는 그대로의 나무이다. 나무의 헐벗음은 삶에 무한히 의미부여하고자 우리의 욕망이 유발하는 생의 무거움을 쿨하게 비웃는다. 그의 나무는 홀로 흔들려 홀로 불타는 절대의 독립을 산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인고가 절대의 가능으로 불가능의 삶을 확확 살아내는 것은 의미를 향한 무한 욕망의 가지에 매달려서일 뿐이다. 인용된 시구는 사정을 언뜻 비쳐 보인다. 시인은 텅텅 말라 비틀어지는 육신에 피닉스를 게워낸다 썼다. 잎은 우선 욕망의 전달체이다. 잎은 가능한 멀리 뻗어 나가려는 가지 끝에서 핀다. 다시 말해 불사의 욕망이 가장 멀리 나아간 지점에 있는 잎이다. 그러나 그것은 떨어지면서 메마른 모습으로 욕망의 종말과 욕망의 허망함을 동시에 발각한다. 이제 잎은 욕망을 최대한도로 건조된 모습으로 현상한다. 은유의 박탈을 은유한다. 잎을 떨굼으로써 나무는 욕망을 게워내고 시원적 양태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나무가 본래의 삶을 회복하는 것은 주체성의 욕망을 끌어안을 때만 가능하다. 그것이 오로지 초지일관, 죽어도 있을 있는 것은, 거기에, 서려고 하는 다시 말해 솟아오르려는, 솟아올라 무한대까지 삶을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배접되기 때문이다. 피닉스 욕망이 그를 피닉스처럼 거듭 회복시키는 것이다. 은유의 거부가 세계의 지배자로까지 발전한 인류의 진화사를 정면으로 직시케 하고, 주체성의 철학 뒤에 숨어 있는 조잡함과 쪼잔함과 추악함을 각성케 한다고 해서, 비웃는 것에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은유의 욕망은 생의 충동을 신생의 요구에 결합시킨 것으로서, 충동이 없는 어떤 생명도 수가 없고, 욕망이 없는 지적 생명은 태어나질 못하는 것이다.

김혜순의 「겨울 나무」는 이런 사연들을 무의식적으로 지각하는 가운데 씌어진 것이라고 있다. 그는 이미 겨울 나무 헐벗었다고 해서 모두 빼앗긴 아니라고 말했었다.

 

내리고 바람부는 겨울 산에

올라보라.

저기

수천 수만 싯퍼런

눈동자들이

보이지 않는

겨울 나무 이맛빡 아래

푸른 !

환히

보리라[19].

 

시인이 푸른 분명 봄의 푸릇푸릇한 새싹을 미리 데서 온다. 점에서 시는 앞에서 정현종 시의 연장이라고 있다. 정현종에게 자연스러운 김혜순에게는 소망스러운 걸로 바뀌었다는 차이이다. 그런데 「겨울 나무」에 오면 나무에 대한 시각의 뚜렷한 변화를 있다.

 

나뭇잎들 떨어진 자리마다

바람 이파리들 매달렸다

사랑해 사랑해

나무를 나무에 가두는

굽은 길밖에 없는

나무들이

떨어진 이파리들 아직도

매달려 있는 알고

몸을 흔들어보았다

 

나는 정말로 슬펐다. 몸이 흩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흩어져버리는 몸을 감당 몸을 묶고 싶었다. 그래서, 속의 갈비뼈들이 날마다 둥글게 둥글게 제자리를 맴돌았다. 어쨌든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전체에 박혔어. 그리고 이건 너와 상관없는 일일 거야 아마.

 

나는 편지를 썼다

바람도 부는데

굽은 길들이 툭툭

안에서

밖으로

부러져나갔다[20]

 

「겨울-나무로부터」의 문제의식은 이제 근본적인 차원 이동 속으로 접어든다. 언뜻 보면 주체성의 철학으로부터의 환원이 일어나는 듯하다. 여기에서의 나무는 솟아오르는 아니라 나무를 나무에 가두는 / 굽은 만을 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박용하의 시에서와 같은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지상에 묶인 존재의 운명적 질곡에 대한 불가피한 인식에 의한다. 따라서 시는 우리 인생의 끝없는 좌절과 도로(徒勞) 대한 정직한 직면으로 비칠 듯도 하다. 그러나 바람 이파리들 주목해야 것이다. 그도 나무에서 동체와 이파리들을 구분한다. 이파리들은 역시 신생의 충동이 최대한도로 멀리 나간 자리에서 돋아난다. 그러나 박용하에게 그것이 자기 의미화의 욕망이라면, 김혜순에게 그것은 다른 생의 가능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파리는 나무 안의 다른 나무, 안의 너가 된다.

시에 와서 달라진 점이 바로 그것이다. 동체와 잎의 분리가 일어난 것은 현생의 직시와 내생에의 소망을 동시에 구출하기 위해서라는 . 현생의 직시는 분명 주체성의 환상으로부터 물러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다른 생에의 소망에 대한 감각적 상응물을 찾음으로써, 환상은 버리되 주체의 의지는 보존한다. 그것을 통해서 다른 생은 다른 , 나의 타자가 된다. 둘을 연결하려면 사랑 통로밖에 없다. 번째 행부터 사랑해 속삭임이 아무리 작은 목소리로써라도 터져 나오는 것은 때문이다. 그러나 시에서 사랑 사실 소망의 양태로 표출된다기보다는 아주 논리적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논리적 구축이 시적 아름다움의 근간을 이룬다. 핵심이 고딕체로 씌어진 번째 연에 뭉쳐져 있다. 안의 나무의 굽은 모양처럼, 2연이 시의 이다. 등이 어떻게 굽었는가?

동체가 그대로 신생의 통로가 「겨울-나무로부터」의 경우이다. 그게 일종의 환상이라고 누누이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생의 가능성을 열기 위해 이파리가 태어났다. 그러나 이파리는 동체로부터 분리되는 순간허약하게 흩날린다. 그것들은 바다로 가는 새끼 거북들보다도 비율로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린다. 동체의 슬픔은 거기에서 나온다. 나로부터 아닌 존재가 태어나서 나를 변신시키길 기원했으나 그가 나가 아닌 내가 길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슬퍼서 이파리들을 동체 안으로 끌어안으려는 동작이 동체를 굽게 만든다. 나무의 굽음은 그러니까 운명적 질곡이라기보다 신생의 가능성을 보존하고자 하는 몸짓이다. 그러나 몸짓은 신생을 낡은 안에 가두고자 하는 제스쳐가 된다. 하지만 또한 거꾸로 읽으면 그것은 신생을 향한 몸부림이 낡은 생의 몸체에 박히는 일이다. 그것이 상처가 되어 낡은 생은 피를 흘리고 굳은 몸이나마 밖으로 떨어져 나간다. 바람도 부는 / 굽은 길들이 / 툭툭 / [] / 부러져 가는 것은 움직임을 가리킨다. 안에 떨어져 나간 굽은 길들은 때로 안에서 / 밖으로 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부러져 나간 길들은 8할의 낡은 생을 유지하고 있으나, 안에 박힌 이파리들에 의해 2할은 신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의 , 낡은 안의 신생, 굳은 안의 물고기일 것이다. 여기에서 사랑은 소망이 아니라 실행이 된다. 자체가 된다.

 

겨울 나무는 인류의 자기 부정과 자기 확인이 하나로 통일되는 장소이다. 장소에서 인류는 생의 의지를 북돋았으며 그로부터 자기 발견과 세계 발명을 하나로 일치시킬 있었으며 나아가 확장을 반성적으로 곱씹어 더욱 정직하면서도 공정한 길을 찾아가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겨울-나무라는 한결같은 이미지를 통해서 수만 갈래의 다른 길들이 열렸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한국시문학사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판단된 개의 길을 되짚어 보았다.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나마 보느라고 고생을 것도 사실이다. 엄연한 사실은 능력과 관계없이 길은 거듭 다시 열릴 것이라는 점이다. 세상이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깨닫는 존재가 존속하는 , 그러니까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존재가 출몰하는 , 겨울-나무는 끊임없이 씌어질 것이다. 당연히 겨울-나무의 이미지도 끝없이 변주되어 나갈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건 독자에게 설치는 일이다.



[1] Dictionnaire des symboles (A-Che) - Mythes, Rêves, Coutumes, Gestes, Formes, Figures, Couleurs, Nombres, Paris: Seghers, 1973, dixième édition[L'édition originale : 1969], p.96.

[2] 호메로스, 『일리아스』, 천병희 옮김, , 2010, 4, 34.

[3] 앞의 책, 89.

[4]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천병희 옮김, , 2010, 126.

[5] Gaston Bachelard, L'air et les songes: Essais sur l'imagination du mouvement, José Corti, 1990(1943), pp.70~71.

[6] Gaston Bachelard, Le droit de rêver, Paris: P.U.F., 1970, p.109.

[7] ibid., p.110.

[8] ibid., p.117.

[9] 다눈찌오DAnnunzio의 시구. Gaston Bachelard, L'air et les songes, p.197.

[10] 백석, 『정본 백석 시집』 (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08, 169.

[11] 정현종, 「헐벗은 가지의 에로티시즘」,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1984), 『정현종 시전집 1, 문학과지성사, 1999.

[12]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민음사, 1985.

[13] 추상적 민중에서 일상적 타자로 넘어가는 고단함 - 『나는 너다』를 되풀이 해 읽어야 할 까닭」, 정과리 평론집, 1980년대의 북극꽃들아, 뿔고둥을 불어라』, 문학과지성사, 2014

[14] 유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문학과지성사, 1991, 60~61.

[15]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 앞의 책, 63.

[16] 같은 책, 66~67.

[17]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문학과지성사, 1990, 28.

[18] 박용하, 『나무들은 폭포처럼 타오른다』, 중앙일보사, 1991, 11.

[19] 김혜순, 『어느 별의 지옥』, 청하, 1988, 89.

[20] 김혜순, 『불쌍한 사랑 기계』, 문학과지성사, 1997, 64~65.